얼마 뒤 저희 교회를 조용히 떠나기로 결정한 가정이 있습니다.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모른 척하고 있
었는데 지난 주 초에 우연히 밖에서 만나게 되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마음에 답답함을 느꼈고 ‘소통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좋은 신앙의 스승들로부터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고 있습니다.그런데 …저희 교회에 불만이기보다는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별 기대를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입니다. 지금 교회를 옮기지만 앞으로 자기 인생에서
교회의 비중은 점점 줄어 들것이라고 했습니다.아마 그 교회로 가는 이유도 교회를 선택했다기보다 그 안에 계신 어
느 분과 함께하며 일을 돕기위해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를 다니는 동안 자신은 누군가와 속내를 털어 놓는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라는 것이… 단지 잘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들이 뜻밖이었던 이유는… 이 집사님이 교회에서 소외된 분이 아니라 여러 집사님들과 교분을 잘 맺고 있고
얘기도 잘하고 교회 활동도 잘하고 있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소통한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서로 생각이 다르고 바라보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과 삶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는 것
같았습니다. 이를 위해 노력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야 겠지만 한계를 느끼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자니
언쟁이 되어 남에게 누를 끼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일반 교인들은 기존의 생활방식에 안주하려고 하기 때
문에 이것이 깨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얘기를 나누면서 솔직히……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과 자만심이 상대의 마음을 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계안에서 대화를 할 때 오히려 중요한 것은…
예의를 갖추고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상대에게 담담히 맡기면 됩니다.

요즘 반복해서 듣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겉모습이나 그림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참모습을 보고 그 관심과 필요에 맞게 대화의 물꼬를 여
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동자는 바리새인과 같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집사님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과 그 사람 수준에 맞추어 대화하려는 것은….얼핏 예수님이나
바울의 자세를 본받는 것 같지만……그 내면에 바리새인처럼 평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조금 뜻밖의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적인 부분에 초점을 두어야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 집사님과 헤어지고 난후 거듭거듭….오히려 우리가
< 외적인 부분 > 에 초점을 맞추고 노력해야한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는 말이었습니다.
지난 예배시간에도 잠언4:23~27 말씀을 나누시면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긍정적인 언행을 습관이 되도록
훈련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내가 가식적인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이런 행위의
훈련은 마음을 지키는데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교만해서 대화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이 처리되는 것이나 진실한 대화를
위한 때의 분별과 언어의 지혜는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란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 부분을 자주 놓칩니다.

결국 이 집사님도 올바른 지식과 이런저런 훈련의 과정을 넘어..내면이 더 처리될 것이고 더 좋은 신자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상대의 태도에 신경쓰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 예의를 지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