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살았는가?”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리스도라 불렸으며, 19세기 전 팔레스타인에 산 사람이 있으며,
그의 삶과 가르침이 신약에 올바르게 쓰여져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상하고 낯 선 질문이 될것이다.

예수는 현대 사회의 각분야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러한 만큼 그의 역사적 실체는 당연시 되어 왔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버려졌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 존재했다는 것도 점점 더 심각하게 의심을 받고 있다.

이미 역사적 비평에서 그가 살았던 적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되고 있다.

그이유는 이상하리 만치 예수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전무 하다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들은 예수에 대해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동 시대 역사 학자들의 저서에 예수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는 없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 만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유물이

나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예수는 동시대인들이나 당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된 것이
아니라면,그가 실존했는가에 대한 의심은 끊이질 않는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현재까지 예수에 관한 논문들은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들이 예수에 관해 인용한 자료들은 거의다 성서의 내용들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매우 공격적인 예수 연구가 진행되어 19세기에는 성경속의 예수에 대한 기록중 사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구별하기에 이른다.

이정도의 파격이면 중세에는 화형을 당할 만한 내용이다.

그리고 성서 외의 객관적 자료를 통하여 예수의 실존 여부를 확인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 가이사아구스도의 호적조사는 로마의 역사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구조사가 정말로 있었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누가복음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를 받으러 갈 때에
시리아(=수리아) 총독이 퀴리노(Quirinius=개역한글판에는 ‘구레뇨’임)라고 나와 있는데 헤롯대왕 시대에는 시리아 총독으로
퀴리노라는 사람이 존재한 사실이 없다.

요셉푸스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퀴리노가 시리아 총독이 된 것이 A. D. 6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퀴리노는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Archelaus. B.C.4~A.D.6년 동안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분봉왕으로 통치)가 실권해서 망명한 뒤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 지방을 편입한 시리아에 파견된 사람이다.[요셉푸스 / 유대 고대사 / 18.1.2]

그의 임무는 세금을 걷기 위해 인적 자원과 자산을 평가하는 일이었고, 또한 아켈라오의 궁전을 팔라는 시저(로마 황제)의 명을
받기도 했다.[요셉푸스 / 유대 고대사 /17.13.5]

아켈라오가 실권해서 망명한 것은 10년의 통치 이후였는데[요셉푸스 / 유대 고대사 / 17.13.2ff], 그는 헤롯대왕이 죽은 이후가
되어서야 유대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후자의 사실은 마태복음 2:22의 내용으로도 확인 가능함).

따라서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탄생시기는 AD.6년경인셈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호구조사가 행해지면 모든 남성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가장 혼자만이
보고를 했으며,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아내나, 혹은 다른 피부양인들이 그와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단지 호적조사 때문에 만삭이된 아내까지 그토록 먼거리에 있는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둘째로, 헤롯대왕은 BC4년에 임종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헤롯대왕이 예수탄생시기에 유아학살을 자행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헤롯대왕은 아랍계와 이스라엘인의 혼혈로 로마의 지지를 받아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신전과
경기장등 각종 건축을 행하였으나 바리세인들과 이스라엘민족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BC 4년에 헤롯이 죽자 이스라엘은 헤롯의 아들들인 헤롯 아켈라오, 헤롯 빌립, 헤롯 안디바가 이스라엘땅을 분할 통치하였으며,
그후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와 헤롯 아그립바 2세가 통치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유아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는 헤롯왕은 바로 헤롯대왕(‘헤로데’가 일반적 명칭임)이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태복음 2장 22절]

위 구절에서 알수 있듯이 유아학살을 자행한 왕은 헤롯 아켈라오(=헤롯 아르켈라우스)의 아버지인 헤롯대왕인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헤롯대왕의 유아학살은 역사적으로 전혀 기록되지 않은 사실무근이며(헤롯대왕은 자신의 출생과, 로마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에 콤플렉스에 빠져서 유대민족에게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가 유아학살을 자행했을리가 만무하다),그는
기원전 4년에 죽음을 당했으므로 예수탄생시기의 유아학살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누가 복음과 마태복음간의 예수탄생시기는 10년의 차이가 생긴다.

세째로, 예수의 출생지로 알려진 나자렛이라는 지명은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지명이었다.

고고학적으로 아무리 발굴 해도 예수 당시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없었고, 로마의 지도, 문서, 그리고 기록들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탈무드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복음서들보다 먼저 작성된 사도 바울의 어떤 기록속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예수와 관련되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갈릴리의 군단들을 지휘했으며 그 지방의 마을들을 목록으로 작성한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역사학자 요세푸스도 나사렛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자렛은 성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마을은 3세기 전까지는 존재한 것 같지 않다. “나자렛의 예수’는 성서 학자들이
원래 그리스의 구문인 ‘나자레안의 예수’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지역성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특별한 종교적/정치적인 기원을 가진 특별한 단체 또는 분파 내의 회원으로서의 예수를 언급하는데 현대 전문가는 ‘나자레안
모임’이라고 부른다.” [아틀란테스/김원/도서출판 와우/p.244]

우수운 사실은 오늘날 성지로 불리워지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로마제국시대 예수가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기원후 3세기쯤에
갑자기 등장한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