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직장생활이 바빠져서 교회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저는 이런 어이없는 기도를 하곤 했었습니다.

“하나님아버지,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어제는……….”

회개와 감사의 내용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안부기도에 가까웠습니다.당시에 저는 말씀도 보지 않았고 저의 존재가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구원받은 후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바르게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중에 저는 시간을 내어서 행려병자들을 돕는 봉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그 일은 저를 더 기도하게 만들
었습니다. 시작은 맘대로 했지만 그만두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하고 싶다’ 는 기도를 간절히 했던 기억과 뜻밖의 방법으로 응답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후에 저는 전능자 하나님,야곱의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을 도와주신다는 말씀을 깊이 새기게 될 일이 있었습
니다.하지만 그때에는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죽은 자를 살리시며,앉은뱅이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은 멀쩡한 육신을 절름발이로 만들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야곱은 많은 축복을 받은 인생
이었지만 한편으론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전능자 하나님은 한 번의 일로도 고백되어질 수 있지만….
전 인생을 걸쳐 간섭하시고 빚어가시는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내용은 …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 < 사랑할 수 있는 근거 >와 < 인간,신자,비신자에 대한 이해와 시각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궁극적으로…복받자는 것도,거룩하자는 것도 아니며 결국 <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겠다 > 는 것’
이라고 설명하셨는데…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사랑의 근거를 < 이미 받은 사랑 >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별개가 아닙니다.
<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 > 는 것은 신자가 십자가 은혜뿐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갈때 느끼는 내적 상태의  표현입니다.

올 봄에 선교사인 제 친구가 자신이 요즘 듣고 있는 설교가 좋다며 모새골을 소개해 주었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오랫만에 다시 생각이 나서 임영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 부르심 >이라는 제목의 설교였
는데…신자는 가급적 착하게,인정받게,호감을 주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살게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유의 주체자로 살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좀 어려웠지만 중요한 내용같아 보였습니다.

이번 주 저희교회 예배에서는 갈5:13~16을 본문으로 < 자유인을 향한 2대 명령 >이란 주제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삶의 방향이 세상적 성공을 쫓는 방향이 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윤리적 방향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법을 지키느냐, 착하게 사느냐 아니냐로 가면 자기 의가 쌓이고 사랑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쫓아 살면 좋은 나무로 가꾸어져서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성경 본문을 다시 보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 새로운 마음을 따라 훈련하는 것….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과 육체의 일,죄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과 이웃 사랑….이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생명의 삶’을 보니..<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세로 살아갈 때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서 살아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주는 즐거움은 온갖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 >
라는 토저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서로 독려하기 위해 우리는 < 은혜와 책임 >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야겠지만 결국 신앙의 끝자락은 < 만족과 자유 >을 향해 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