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염려>

영혼이 거듭되는 악으로 진통을 겪을 때 우리의 신앙은 침몰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의지가 나약함으로 인해 눈앞에 벌어지는 자신의 악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도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제일로 경계해야할 일은 낙심과 포기, 그리고 항시 우울한 정서적 분위기에 젖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 이 세상 많은 신앙인들은 지금도 이런 비참의 시기를 지나며 회복의 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춥고 긴 겨울이 지나면 언젠가 봄이 오리라는 기대감을 지닌 채…

물론 영혼의 진통은 아무나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항상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 실천은 생각 속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 뜻과 세상적 기쁨이 우선하는 것을 본다. 악에 져서 자꾸 뒷걸음질만치는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보노라면 서글픔을 너머 절망적인 기분에까지 빠져들어 간다.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성전을 언제 다시 지을 수 있을지, 더럽혀진 단을 어떻게 다시 거룩하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전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는 영혼에게는 눈부신 태양조차 그리 밝게 느껴지지 않고 주변의 풍경 역시 어둡고 칙칙한 색조로 변모되어 비쳐질 것이다. 마음을 들어 주님께 받치고 싶은 열심은 아직 식지 않았으나 정작 외부에 드러나는 증거는 없으니 그 열심이 오히려 마음의 조급함과 답답함을 부추겨 신앙의 성숙을 저해하는 역작용을 내기도 한다.

이 모든 좋지 못한 결과는 영혼이 떨쳐버리지 못한 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모를 자 없을 것이다. 악은 한시도 쉴새없이 우리 곁에 다가와 때로는 두려움으로 위협하고 때로는 달콤함으로 유혹하여 마음을 소란스럽게 한다. 이에 마음은 사뭇 갈등하다가 스스로 허물어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하였던가. 악에 질 때마다 차곡차곡 기억에 쌓이는 씁쓸한 느낌들은 영혼을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악에 대항할 용기를 앗아가 버린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본들 무슨 이득이 있을까. 차라리 모든 것 잊고 마음을 달래는 쪽이 훨씬 신앙에 유익하지만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저 어둠을 단숨에 뚫고 높이 날아오를 날은 언제나 오게 될까. 요원하기만 한 그 날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혼의 염려는 하루하루 더해가기만 하는데..

그러나 우리의 이런 조급한 생각과는 달리 신앙은 급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악을 버리는 일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내적 변화는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고 수많은 과정과 단계를 거치면서 스스로도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각자 자기 영혼의 진전 과정을 바라볼 때에 어느 한 시점만을 한정하는 좁은 시야에서 탈피하여 보다 넓게 멀리까지 한 눈에 내다보아야 되겠다. 이 뜻은 지금 우리의 신앙 상태가 양호하다고 웃음 지을 것도 아니요 또 지금 이 시점이 너무 어둡다고 낙심할 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사실 우리네 범인들의 신앙 여정은 야곱의 고백처럼 기쁨보다는 험난한 세월의 연속이라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겠다. 싸움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안식의 상태 이전에 어찌 이 땅에 진정한 쉼이 있을까. 장막을 여기 저기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옮겨다녀야 하는 나그네 생활에 진정한 쉼이란 그리고 진정한 평화란 그리고 진정한 웃음이란 어찌 보면 사치에 가까울지 모른다. 가나안으로의 여행을 하는 도상에 있는 영혼은 대개 밝고 화사한 마음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가 없는데 이는 인간은 그 특성상 어둠으로 인해 밝음을 지각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한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허용하신 것도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인 것이다. 악의 더러움과 그것이 가져오는 영혼의 참상을 깨달음으로 영혼은 더욱 선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그 상태를 갈망하게 되며 그리하여 궁극에 악을 버리고 선을 지향하는 영혼마다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는 선한 목적으로 악을 허용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는 물론 저 하늘에서조차 우리 피조물들은 모두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끊임없이 영적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피조물 전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 변화 과정에서 영혼은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밝은 상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히 진행된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나 자신 있고 밝은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며 이를 간증하는 이들을 흔히 봄으로 인해 마치 그들이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양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대적인 비교로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기에 속에 가득한 악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하며 번민하는 상태를 빨리 벗어나 그들처럼 밝은 광명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조급함을 지니게도 된다. 하지만 내면 깊은 데에 거하는 그 사람의 주도적 애정이 어떠한 빛깔을 지녔는지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아무리 영성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인간 내면 세계의 그 깊은 영역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영혼의 본질은 내면 깊은 데에 있고 외부로 드러난 움직임은 여러 갈래의 내적 동기(원인)들이 모여 그러한 결과를 낸 것이지만 인간이 보기에는 단순히 하나의 행동으로만 인식되기 마련이다. 사물의 이치는 목적으로 인하여 그 원인(일을 수행하는 동기)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데 우리의 얕은 시야는 가장 외적인 움직임인 결과만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중심 곧 속에 숨어있는 목적과 동기를 보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속에 있는 ‘참 있음’으로 말미암아 외부에 ‘참 나타남’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과 겉이 일치하여 함께 선을 이루는 상태는 바로 마음 안에 천국을 이루지만 속과 겉이 다른 경우 곧 외부에 나타나는 것은 선한 빛으로 보일지라도 정작 그 내면이 되는 목적과 동기가 선하지 못할 경우 그 마음에는 지옥이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외부에 펼치는 선악간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각 영혼의 상태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이 외부에 나타내는 언행을 단순히 수정하는 일은 그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의 내면은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아무런 막힘 없이 자유로 행할 수 있는 본질적 생명이 거하는데 반하여 사람의 외성은 필요에 의해 본래 의도와는 달리 언제든지 위선적으로 치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이 외부에 나타내는 것은 그때 그때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순식간에 바꿀 수 있지만 영혼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그 진행도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며 따라서 오랜 세월을 거칠 수밖에 없다. 한 단계를 지나면 다음 단계가 있고 그리고 또 그 과정을 거치면 그 뒤 또 다음 과정이 기다리는 등 이런 식으로 영적 진전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간다. 중도에 멈추면 그때부터는 추락이 시작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작 당사자 자신은 이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설령 감지한다고 할지라도 자기 영혼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적 침체기는 경우에 따라 꽤나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진통의 과정을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시인하고 그 고통을 달게 받을 각오로 겸손히 참아 나아간다면 머지 않아 선하신 하나님의 자비의 때가 반드시 저를 찾아 올 것이니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이치를 계절이나 일기의 상태 변화를 통해 알려주신다. 다 아는 것처럼 기나긴 겨울 다음에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고 비가 온 뒤 하늘은 더욱 푸르게 보이는 법이니 앞을 가로막은 깜깜한 절망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혼이 진통할 때의 괴로움을 주변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오직 그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 한 분은 아실 터이니 이럴 때 두려워 낙망치 말고 가능한 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노력한다면 예기치 못한 때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남겨 놓으신 두 아내들 이야기를 보자.

<사무엘 상에 등장하는 인물인 엘카나에게는 두 아내 곧 한나와 브닌나가 있고 야곱에게도 두 아내 곧 라헬과 레아가 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두 아내 곧 사라와 하갈이 있다.>

<그런데 이 세 쌍의 아내들의 경우에 있어서 한결같은 점은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는 아이를 늦게 낳고 덜 사랑 받는 아내는 아이를 먼저 낳아 그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참된 아내를 경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먼저 태어난 아이보다는 사랑 받는 아내에게서 늦게 태어난 아이가 훗날 더 위대해졌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참고 : 주님이 우리의 신랑(남편)이라면 교회가 되는 우리는 그분의 신부(아내)가 되기에 성경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의미는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영적 생명을 잉태하는 것을 나타내고 이런 이유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선한 여주인공들은 출산을 그토록 원하였던 것이다. 여기 여성이나 아내들은 선과 진리를 안에 채우기 원하는 그 사람의 애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저 말씀의 의미는 이러하다. 본처는 아이를 낳지 못해 괴로움을 겪는 반면 둘째 부인은 아이를 먼저 낳아 잠시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게 되지만 남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뒤늦게 낳아진 본처의 소생으로 이 아들만이 주님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영혼은 이제 불순하고 이기적인 사랑에서 돌아와 주님 주시는 참 생명과 그 자유 안에서 나타나는 순수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진정으로 선한 열매가 생산되는 것은 매우 느린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보면 처음 우리 생각과 의지에 나타나는 신앙의 여러 요소들 속에는 불순하고 이기적인 것들이 대부분 선한 빛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순수하고 질 좋은 믿음과 선으로 바꾸어지려면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영혼에 찾아오는 수많은 시험들을 거치는 동안 악들과 끊임없이 싸워 그것을 극복해야 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겪는 영적 진행 과정 중 신앙이 성숙하여 진정한 선, 질 좋은 선, 그리고 자유 안에서 행하는 선을 양산하기 전까지는 아직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거나 또는 그 속에 자기를 위하여 행하는 선 곧 그 목적과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불순한 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게 된다. 나아가 이렇게 인간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불순한 선을 외관상으로 보면 그 빛이 얼마나 화려하게 보이던지 만일 우리가 이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주님에게서 비롯된 진정한 선은 멸시를 받아 그 생명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저 말씀에서 먼저 아이를 낳은 ‘브닌나와 레아와 하갈’이 훗날 주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상속자를 낳는 ‘한나와 라헬과 사라’를 학대한다는 의미이다.

여기 ‘불완전한 선’을 의미하는 ‘브닌나와 레아와 하갈’에게 아이를 낳는 특권을 주님이 먼저 허락하시는 이유는 불완전한 선일망정 이것은 아직 참된 선을 낳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영적 진전을 위하여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 있는 자들은 선을 지향하는 자기 마음 속 애정들을 수시로 탐색해보기에 자신에 의해 지금 높이 쌓여지고 있는 선이 후일 그 어느 때가 되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허망한 산(山)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하여 참된 선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의 갈급함은 더해 가지만 악을 버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스스로 애만 쓸 뿐 진전은 없다. 그럴지라도 오랜 세월 동안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인내로 참아 나가다 보면 진행은 더딘 것 같아 늘 만족스럽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신앙이 아주 형편없던 때보다는 그래도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룬 것 같이 느껴져 이를 겸손히 주께 감사 드리며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순한 선을 버리고 참된 선으로 변모해 가는 영혼의 진전 과정은 아주 느릿느릿 진행되기에 전혀 그 움직임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것은 인생의 전 과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주님만이 아실 뿐 유한한 시력을 지닌 우리로서는 자각할 수 없는 일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영혼의 변화를 극히 선명하게 감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이 앞으로 겪게될 무수한 변화 가운데 어느 극히 작은 한 지점이나 한 상태에 불과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죄로 인해 영혼이 진통하는 시기는 불순한 선을 행하던 때를 종식하고 이제 질 좋은 선으로 전환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보다 성숙하여져 브닌나와 레아와 하갈의 때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한나와 라헬과 사라의 때 맞기를 갈망하는 상태에 진입하려는 순간에 처해 있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영적 세계의 일들을 잘 알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의 입장으로 볼 때 시험이라는 것은 우리가 유혹에 자꾸 져서 악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지는 상황으로만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악조차도 선한 씀씀이(선용)를 위해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원해내시려는 역사만 행하신다는 그분 자비의 측면에서 볼 때 시험은 우리의 영적 진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시험을 통하여 인간은 그동안 자기 내면에 잠재해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특정한 악들을 아주 투명하게 보고 이를 제거하거나 혹은 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비슷한 성질의 악들에 대한 면역력을 키울 수 있기에 그러하다. 만일 우리가 그 시험을 잘 극복한다면 영혼은 한 단계 위로 도약할 것이고 그것에 진다면 영혼의 남은 그루터기는 더욱 고갈될 것이다.

시험의 특징은 밤이 깊어질수록 주위는 더욱 깜깜해지지만 그 이면을 보면 그만큼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이치와도 같은 식이다. 또 평상시보다 악이 더욱 극성을 부릴수록 어쩌면 그 반대적 시각에서는 악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논리와도 같다. 이스라엘의 악이 마지막 최고조에 달해 주님의 죽음을 재촉하기 전 사단이 하늘로서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와 맥을 같이하고 바울의 말한 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원리도 이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이 이렇게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 무엇이 낙심과 절망과 우울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이 자연계에 만들어놓으신 현상 중 한 가지 곧 칠흑 같은 어둠 속일수록 더욱 선명한 형체를 드러내는 빛의 특성에서도 배울 수 있는 바와 같이 영혼이 시험에 빠질 때 평소보다 더한 빛으로 도움을 주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는 일일 것이다. 이어 또 하나 우리의 할 일은 이러한 주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과 이 믿음을 무기로 자신의 모든 연약함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결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지라도 이런 일반적인 깨달음만 가지고는 죄에 대해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날아드는 어두웠던 기억에서 우리 영혼의 염려를 벗겨주기에 미흡하기만 하다. 이는 영혼의 진통을 멈추게 하는 일이 지식의 깨달음에 속하지 아니하고 영혼 그 자체가 실제로 정결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나약하기만 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낙심과 절망과 우울을 불러들여 하릴없이 영혼의 염려만 가중시킨다. 진심으로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속에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더욱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에서 자꾸 자기가 일전에 지은 죄의 기억에 붙들려 있기보다는 오히려 작게 느껴지는 것일지언정 무엇인가 앞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움직임이 영혼에 유익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간에게 오시기에 인간 역시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화답하여야 하지만 인간을 자신의 악에서 불러내어 순수한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것의 으뜸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 데서 이 경외심은 서서히 우리 안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비록 겉보기로는 인간에게 이해성과 의지가 주어져 저 스스로 최대한 애쓰며 노력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듯 여겨질지라도 신앙 생활 전반에 걸친 이들의 활약은 주님의 역사 하심 안에서나 가능한 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들을 앞세우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인도와 역사 하심만을 간절히 고대하는 훈련을 통해 경외심은 우리 영혼에 뿌리내려질 수 있다. 영혼이 이 경외심에 물들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이해성은 진리의 말씀을 더 이상 기억의 지식으로 대하지 않고 생명 있는 영의 지식으로 올려 지각하게 되며 나아가 영혼에 역사 하시는 주님의 직접적인 조요를 받음으로 모든 나약함을 벗겨내고 마음에 선한 애정을 가득 채울 수 있게 된다.

이토록 경외심이 중요한 이유는 신앙의 진전여부가 그분과 나와의 관계 설정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과연 나의 신이시던가? 나는 진정 그분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거룩함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를 쓸 것이고 그분 앞에 방자히 행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항상 그분은 까마득히 높고 존귀하신 분이시며 나는 흙과 같은 비천한 존재이기에 그분 앞에 나를 낮추며 무릎을 꿇고 옷깃을 여밀 것이다.

또 내 뜻 대신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분의 유무형 교회와 모든 제도를 거룩히 여길 것이다. 성경을 대할 때 지식이나 글자로 보지 아니하고 바로 그분 자신을 모시듯 할 것이며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이 모두를 내 기억의 지식에서 비롯된 인간의 총명과 능력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그분의 역사 하심을 먼저 간절히 구할 것이다. 이렇게 그분에 앞서 나를 우선시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삼갈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심은 되살아나고 신을 무시하던 악한 마음은 소멸되리라. 또 경외심이 살아날 때 그분의 계명은 곧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고 그것을 준행 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 자명하지 않겠는가.

이 작은 시작이 결실을 맺을 때 바야흐로 우리 영혼에는 언젠가 기쁨과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제 이 원리대로 작은 것부터 한 가지씩 해보자. 영혼이 어느 상태에까지 이를지 그것은 주께 맡기고 단지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려는 습관을 배우도록 하자. 그러면 주께서 도우시리라. 이 세상에서 아직 육체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는 굵은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경주하는 자와 같기에 때로 주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은 무척이나 부자유스럽고 힘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힘을 기르며 인내로 참아나간다면 언젠가 쇠사슬이 풀어질 때 우리는 악을 거부하고 선을 사랑하는 아주 강한 힘을 얻어 천국 생활에 잘 적응할 것이다. 아직은 버려지지 않은 악 가운데 있는 까닭에 이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곧잘 슬퍼지지만 낙심하지 말 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도움은 우리 마음 속에 거하는 악들을 경계하도록 갈등을 일으키며 마음 전체를 진동시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