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625와 인명 중시

6월은 6월6일 현충일과 6.25가 있는 달이기에 보훈의 달이라 부르고 있다.
6.25의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을 겪은 우리들이기에 이 보훈의 달은 뜻깊고 여러가지를 생각하게하는 달이다.
이러한 보훈의 달에 어제(6/20) 서부전선 전방에서 한 사병이 동료들이 자고 있는 내부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을 난사하여 8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도 동고동락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전우들에게 가해진 사건이기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전우애란 무엇인가? 생명을 놓고 싸우는 살벌한 전장에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힘이 되는 것이 전우애요 그러하기에 전장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전우들 간의 사랑인 것이다. 전쟁 중 옆의 전우가 적군의 총탄에 맞으면 그 슬픔과 통분을 가장 먼저 삼키는 사람이 그 부모도, 형제도 아닌 바로 생사를 같이 하는 전우들인 것이다. 그런 전우, 더욱이 편안히 잠들어 있는 동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일로 정말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우리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소중한 생명체인 것이다. 이러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잘 보존하고 다스릴 책무와 함께 생명을 존중하고 중시할 도덕관을 가진다.
요사이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인간을 하나의 동물체나 기계로 보는 경향있다. 이로 인하여 인명경시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컴퓨터 게임과 영화 등을 통하여 인명이 수시로 쉽게 살상되고 더욱이 죽었다가도 끄떡없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들을 접하면서 우리 젊은 세대, 아니 어쩌면 이 세대 전반에 걸쳐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날로 증가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뿐인 각자의 생명을 경시할 수 없음을 곧바로 터득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남의 생명도 존중해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명 존중의 도덕관이나 룰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정말로 비피린내나는 지옥과 같은 전장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 경시 풍조는 각자의 삶의 의미를 퇴색시켜 결과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서로 적이되는 사회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런 생명경시 현상이 전장터에서 일어 난다면 누가 자기 죽음을 정당화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할 것인가? 내 죽음이 승화되고 생명이 고귀하게 취급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던질수 있을 것이다.

6.25 전쟁 초기에 우리 군은 제대로 된 훈련이나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해 거의 맨 손으로 적과 싸우다 싶이했다고 한다. 그런 상태이기에 패퇴하는 군인들이 부상병이나 전사자들을 돌볼 여유가 없어 그대로 방치하고 퇴주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부상자나 전사자를 유기하고 소홀히 다룬 결과 군대의 사기는 더욱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인식한 군부에서 전쟁의 혼돈 중에도 부상병이나 전사자를 유기하는 자는 이유나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여 군기를 바로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명을 귀히 여기지않는 군대나 국가는 위태롭게된다. 그 이후로 우리 군의 사기도 올라가고 유엔군의 참전 등으로 우리 군이 승리하게된 것이다.
6.25가 끝난지 50년 가까이되었으나 아직까지도 미군이 유해 발굴 작업을 벌이고, 그 유해들을 정중하게 모시는 미국의 자국민의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국가의 정통성과 국가관을 형성하는 주요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여진다 할 지라도 우리는 고귀한 생명을 중시하는 이와 같은 각종 사업을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625때 나는 7살 나이로 철모르는 국민학교 1학년생이었기에 625의 참상을 잘 모르지만, 고1의 나이에 징집되어 군대에 끌려간 큰형님은 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많은 고생을 하셨다. 전쟁 중에 포탄이 터져 옆 겨드랑이 근처에 파편을 맞고 상이 군인으로 제대하였으나 다행히 큰 후유증이 없어 아직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그 형님이 몇 년전 원호처에서 모집한 6.25 참전용사의 수기에 응모하여 입상한 글이 있어 그 일부를 옮겨 본다.

[옮김]

나의 6,25 한국전쟁 참전기

1950년6월25일
드디어 불안하던 38선에서 전쟁이 터졌고, 눈감짝할 사이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우리 가족들은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고, 나는 당시 15세로 인민군에 잡혀가지 않으려고 9.28 수복때까지 공산 치하에서 몇달 간을 천장과 마루바닥에서 숨어지냈다.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고 우리 국군들이 한창 북상 진격하고 있을 때에 느닷없이 국민병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보를 받고 1950년12월14일 동네 친구 둘과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6.25전쟁이 발발한지도 어느덧 6개월째, 당시 들리는 전황은 우리 국군이 38선을 넘어 승승장구 진격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을 때였다.
당시 신체검사장은 종로에 있는“비원”이었다. 검사판정은 을종 합격이었다. 신체검사를 마치자 우리는 한쪽으로 정열하는 사람과 귀가하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정열되는 쪽으로 분류되었고 우리는 잠시 후 행렬로 걸어서 서울역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끌려간 사람은 꽤 많았고 우리들은 역내로 들어가 석탄을 운반하는 지붕없는 무개화차에 짐처럼 실렸다. 나는 그때 무엇으로 점심과 저녁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튼 우리는 부모님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드리고 신체 검사장에서 곧바로 강제징집되어 영문도 모르고 목적지도 모른채 돼지같이 끌려 가고있는 신세들이 된 것이다. 화차에는 차량당 현역군인 두 명이 우리들을 감시 통솔하고 있었다. 하늘을 지붕 삼아 추운 겨울날씨에 하룻 밤을 꼬박 화차속에서 지내고 이튿날, 1950년12월15일 날이 밝자 우리를을 실은 무개화차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서울역을 출발하였다.
얼마를 달렸는지 밖은 어느덧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 되었고 열차는 어느 작은 역에 잠시 정차하였다. 통솔자가 도망자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겁을 주고는 용변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변을 마친 후 인원을 점검해 보니 2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차는 다시 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추위를 이기려고 쪼그리고 서로 부둥켜 앉아서 알지도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열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꽤나 지루한 시달림 속에 며칠이 지난 후 희미한 전등불이 여러 곳에 걸려있는 제법 큰 역에 도착하였다. 전원 하차! 하차! 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리며 고요하고 적막하던 역구내가 갑자기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우선 이 곳이 어느 역 인가를 살펴보았다. 푯말을 보니 경상북도 대구역이었다. 통솔자는 5열 횡대로 정렬시키고 인원 파악을 한 다음 낙오자가 발생치 않도록 서로 손을 맞잡게 한 후 어디론지 행진을 시작하였다. 12월도 저물어가는 한 겨울인데 그다지 춥지는 않었지만 음산한 날씨와 어두운 대구 시가지는 마치 죽은 도시같이 적막감이 흘렀다.
우리들은 대구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한 학교안으로 인솔되었고 교실안으로 들어가니 마루바닥에 원조받은 쌀부대 속에 짚을 넣어 만든 방석 같은 것 하나씩을 나누어 주며 휴식을 취하라고 한다. 추운날씨에 며칠을 무개화차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지내서인지 찬 마루바닥 일 망정 두 다리를 쭉 펴고 누우니 세상 살것만 같았다.
내 생애에 처음 겪은 고통의 지난 며칠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신체검사를 받고 오겠노라고 한마디하고 집을 나선 내가 지금 이시간, 이곳 찬 마루바닥에 누어 집 생각을 하며 그리워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정신차릴 틈도없이 어리둥절 그저 끌려서 난생 처음 이야기만 듣던 대구까지 온 것이다.
우리가 묵은 학교는 대구남산국민학교였고, 우리는 날이 밝자 다시 성남중학교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다시 대구에서는 속칭 가다꾸리 공장이라고 부른다는 큰 공장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이 바로 “대구제1훈련소 제7교육대” 였고, 이 곳에서 드디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병으로 입대를 한 것이다.
집을 떠나온지 나흘만에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를 한 것이다. 우리는 이 곳에서 15일간 매일같이 야외교육장<화장터가 있던곳>으로 나가 군사교육 및 전투훈련을 받았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매일 아침 중대 별로 보무도 당당하게 교육대 군가를 소리 높이 부르며 야외 교육장으로 행진하던 것이다.
기억에도 새로운 그 때의 교육대가를 생각하면 나는 이 나이에도 절로 힘이 솟는다.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 뛰고
싸우다 쓰러진 전우의 소리에
빛나도다 우리들의 힘찬 모습은
정의간에 일어서는 우리의 진군
화랑의 정신으로 전우를 부른다
씩씩하다 우리들의 전우여,
빛나도다 우리들의 교육대,
전우들아 굳게 뭉처 싸우자
우리들은 삼천만의 힘찬 선봉대
건설 건설 조국광복, 민주국가 세워 나가자.”

우리 훈련병들은 며칠이 지나면 어느덧 완전한 한 군인으로 탈 바꿈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1951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무사히 15일간의 훈련을 마친 나는 1월3일 대구 제5보충대로 전속되었고 1951.01.04일 당시 보충대 연병장에는 우리 한국군에게 처음으로 보급 된 것으로 알려진 일산 도요다 트럭 수십 대가 정열되여 있었고 우리 보충병들은 그 트럭에 몸을 실었다. 수송차량은 전부 호로를 씌워 우리들은 밖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긴급 야간 병력수송 작전인 것임이 틀림없었다. 오후 다섯시에 출발한 차량 행렬이 몇시간을 달린 후 휴식과 용변을 위하여 잠시 멈추자 우리들은 호로를 걷고 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졌으며 언제 내렸는지 백설이 온 천지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부모님 생각과 가족의 그리움으로 눈물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훈련내내 부대에서는 전쟁의 전황에 대하여 일체의 이야기가 없었으며 서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나는 그 고된 훈련을 마치고 지금 대한민국 육군2등병의 신분으로 역사적인 한국전쟁의 전장터로 투입되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를 1951.01.04일 오후5시에 떠나 7시간을 달려 이튿날 새벽0시경에 차량 행렬이 도착한 곳은 충남 천안역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아연 실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천지에 거리는 피난민으로 들끓고 있었다. 피난민과 우리 군의 차량 행열이 함께 뒤엉켜 일대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나 올 때만해도 우리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며 승전보만이 전하여 지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 피란행열이 왠일인가? 몇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니 중공군이 서울까지 처들어와 피란을 가고 있다고 한다, 바로 그 유명한 1.4후퇴였든 것이다. 피난민들은 우리 국군을 보자 만세를 외치며 환영을 하였다, 특히 어머님 연세와 같은 아주머니들이 밥을 가지고 오셔서 먹으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려가며 격려와 위로를 해 주셨다. 그 아주머니들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 졌다.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계실까? 나 같은 군인을 보시면 지금 이 아주머님들과 같이 이 아들을 그리워하시면서 반가워 하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메여지고 어머니가 보고싶어졌다.
남쪽으로 이동하는 피난 행열은 끝이 없었다. 피난행렬을 뒤로 하고 우리 군의 차량행렬은 북쪽을 향해 달렸다. 오후3시경 도착한 곳이 충남 천안군 입장면 면소재지의 어느 초등학교였다. 이 곳에서 우리 일행중 일부는 하차하였고 다른 차량들은 그대로 어디론지 계속 떠났다.– 소위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어 난 1.4후퇴

<중략>
당시 우리 소대 전투원들은 개인화기로는 M1소총과 대검으로 무장하였고 철모대신 작업모에 국산작업복을 입었고 발에는 작업농구화를 신고 전쟁을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대대장 명령이라면서 대대원 전원은 철모를 구해서 쓰고 집합하라는 것이다. 군대에는 이유가 없었다. 몇시간 뒤 집합을 하였는데 어디서들 구했는지 전부 철모들을 쓰고왔다. 나도 이 부락 저 부락을 해메고 다니다가 어느 집안에 찌그러진 철모 한 개가 나딩구러저 있길래 쓰고왔다. 화이바없이 철모 만 썼으니 모두가 가관이었다.

<중략>
고지 여기 저기에는 미군 공수부대의 보급품이 낙하산으로 투하된 채로 널려 있었으며, 미군과 함께 야간 경계근무를 하였다. 미군 보급품에 눈독을 드리고 있던 우리들은 날이 밝자 미군들 몰래 보급품을 다른 곳으로 운반해서 숨겨 놓았다.
미군들이 철수한 뒤 우리들은 보급품을 풀어 보았다. 우리들이 정말로 필요하였든 철모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물건들이 쏟아저 나왔다. 철모도 철모이지만 특히 야전식량인 C 레이숀은 우리에게 더 더욱 기쁨을 주었다. 이곳에서 얻은 미군 물자로 우리 전 중대원은 신사군인으로 탈바꿈하였고 식사도 양식으로만 하였다. 이렇게 행복에 겨운 생활을 하고 있던 우리 중대에 패잔병 소탕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날씨에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완전 무장에 우의를 입고 작전에 나섰다. 도로가에는 적군의 시체가 널비하고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참혹한 현장이었다. 몇집 안되는 민가를 수색하였는데 그 집안에는 민간인이 많이 죽어 있었고, 한 곳에서는 어린이까지도 누가 사살 하였는지 죽어 있었다. 다 확인은 못하였으나 주로 집안 방공호 속에서 죽어 있었다. 수색중 길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한 시체가 움직이지를 않는가, 깜작 놀란 우리들은 모두 총을 겨누고 살펴보았다. 부상을 당하여 기진맥진해 다 죽어가는 부상병 한 명이 쓰러저 있었다. 부상병은 중공군인 것 같았으나 의사가 통하였고 발뒤금치가 떨어저 나가 출혈이 심하였다. 우리는 후송시켜 살려주려 하였으나 적군 본인이 삶을 포기한 듯 고개를 저으며 삶을 포기하기에 총살을 하고 돌아섰다. 그날 우리 수색대는 포로1명을 생포하고 사살 1명, 다발총1정, 기관포1정, 칼빈총1정, 살아있는 소 7마리 등을 노획하고 많은 정보 수집을 하고 귀대 하였다.

<중략>
봉일천 근처까지 적의 전방부대가 있다는 것이 포착 된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반격을 하기위하여 3소대가 최전방 수색대로 차출 되어 출전을 하였다.  우리는 전투행렬로 행군중 우측의 고지로부터 기습적인 사격을 받았다, 우리 소대가 행군하던곳은 봉일천에서 문산으로 가는 국도로 넓은 길이였으며 우측으로는 높은 고지가 있고 좌측으로는 논밭을 지나 봉일천의 개울물이 흐르고 있엇다. 당시 지형상으로 볼 때 우리소대는 적으로부터 완전 포위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기서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생사를 걸고 봉일천 뚝방을 넘는 것이였다.
후일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고지에 적 일개 대대가 잠복하고 있었다고 함. 고지를 향해 대응사격을 하였으나 역부적 이였다.
이제부터는 명령에 따라 한사람씩 각개약진으로 봉일천 뚝방 넘는 일이다. 그때 한사람이 하천을 건너 뛸때마다 적으로부터의 집중 사격은 그야말로 비오듯 하였다.
하천을 건너 인원점검을 하여보니 총상으로 인한 부상병2명 그리고 행방불명으로 분대장이 한명 있었다.<당시총원32명에서 3명의 사고자 발생은 다행한 일이였으며,일개월후 우리가 봉일천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일개월전 생사를 걸고 건넜든 그곳 냇가로 빨래를 갔다가 개울 모래밭에서 국군시체 한구를 발견 하였는데 그시체가 바로 한달전 이 하천을 건너다 실종된 분대장의 시신이였다>
그후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고 국군은 북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봉일천의 한마을은 우리중대가 완전히 차지하고 모든 민가는 병영 막사로 변모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훈련도 받고, 전방으로 전투에 출전도 하고 죽지않으면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이곳에서 잊지못할 사건이 있엇다. 우리들은 전쟁터에서 너무나 배가 곺았다 지급되는 보급품이 적었든지? 보급품에 부정이 있었든지? 간에 너무나 밥이 적었다. 일개분대 9명이 배식을 받아와 분대장, 부분대장 분으로 두그릇을 따로 떠 주고나면 나머지 밥이 너무나 적어 나눌수가 없어 국에말어 7명이 둘러앉아 시작!하는 소리와 동시에 한술이라도 더 먹기 위하여 씹지도않고 꿀떡꿀떡 삼켜 먹은 일이며, 나는 어느날 취사장에서 쌀을 한 홈큼 흠처 주머니에 넣었다가 배가 곺을 때 이 생쌀을 씹어 먹었는데 그만 이것이 체해 토사곽란이 얼마나 심하였든지? 모두들 죽는다고 하여 중대장까지 뛰어온 사건이 있엇다.

<중략>
북쪽으로 진격하여 올라갈수록 높고 험준한 산이 우리 앞에 가로놓이며 힘든 전투가 벌어진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고지에서 백병전을 치르기도 하고, 구화리지역에서는 야간전투도 감행 하였으며 한 개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도 많이하였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분대원의 한 전우가 죽었다.
어느날 전투중에 철수명령으로 임진강을 건너 다시 봉일천으로 복귀 하였다.
그 다음날 상부의 지시라며 각자 소지하고있는 모든 탄약<소총실탄및수류탄>을 반납 하라는 지시다. 이때가 51년7월초순으로 기억된다. 휴전이 선포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자유 휴식시간이 2일간 주어졌다.
무기력한 적은 저항 없이 북으로 북으로 바쁘게 쫒기다가 연합군에게 휴전 제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쉬지않고 훈련과 교육으로 날을 보냈으며 이러한 세월도 어느덧 칠월달이 지났다.      
1951년8월초? 어느날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일개월 전 휴전 전과 같이 임진강 건너 그 지역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것 같았다. 비지산이란 고지에서 전투는 재개 되었다.
적과 전투를 하여보니 이게 웬일인가? 휴전 전엔 무기력한 그들이었는데, 이제는 공격적으로 포탄도 많이 날라왔다. 구체적으로 설명 하건데, 한달전 휴전 전에는 우리가 북으로 진격할 때 하루에도 수킬로미터씩 적군의 별 저항없이 북진하였고, 간혹 한두발의 포탄 공격을 할 정도로 무기력하였으며 후퇴하기에 바빴던 그들이었다. 그러하였든 적이 이제는 각종 야포 및 엄청난 화력전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휴전 한달간에 적은 재보급받아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춘 듯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연합군<유엔군>이 괴뢰 공산군에게 기만 당하고 북진을 이루지 못하여 결과적으로는 오늘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략>
서부전선의 지리상 실질 공격루트는 임진강 건너 장단을 거처 봉동, 개성으로 진격을 하여야 하는데, 그당시의 휴전회의 장소가 판문점으로 그 판문점을 중심으로 반경 몇 km 까지는 어느누구도 허가없이 침범을 못한다는 조약을 맺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매일아침 출동하기 전이나 점호시간에 판문점 침범을 아니하겠다는 서약문을 낭독하고 출전하였다. 이러한 터무니 없는 조약으로 판문점을 우회하여 지리상으로 불리한 구화리 방면으로 진격을 하게 된 것이다.
때는 8월 장마철!  야간전투 출동명령이 떨어젔다.
어두움이 깔리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바로 앞의 사람이 보이지도 않을정도로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천둥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어찌나 많이 쏟아지는지! 정신을 못 차릴정도로 쏟아젔다. 군복은 속속드리 흠뻑 적고 계속되는 행군에 피로가 쌓여 잠도 오기 시작한다. 그러한 빗줄기 속의 행군 중에도 잠간 휴식시간이 주어지면 모두가 잠에 취해 떨어지고 졸면서 행군을 하였다.
억수같이 쏟아졌든 비는 그치고 날이 밝았다. 그런데 우리병력이 적진 깊숙히 들어온 것이다. 밤새 내린 비로 적군도 우리도 적진속으로 들어간 것을 모르고 날이 샌 것이다. 그래서 적은 적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가 포위된 것으로 착각 하여 우왕좌왕 이리 뛰고 저리뛰며 전투가 벌어젔다. 이 전투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것 같다.
적진으로부터 벗어난 우리는 어디론가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부대 보급품의 보급이 않된다는 것이다. 식사를 비롯하여 일체의 보급이 끊켜 전원이 허기와 굼주림에 지칠되로 지쳐버렸다.
행군중에 낙오자가 속출하고 기진맥진 모두가 쓸어저갔다.
삶이 무엇인지? 그래도 살겠다고 먹을거리를 구하려고하였다.
그 당시 밭에는 전쟁통에도 누가 심었는지 옥수수, 오이, 참외 등이 자라고 있었다. 옥수수는 이제 막 알이 형성되는 과정이고 오이와 참외는 새끼손가락 만하게 자랄 때였다. 눈에 띠는데로 밭으로 달려가 옥수수는 옥수수대로 오이 참외는 넝쿨체 들어 몽땅 따서 먹었다.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평생 잊지못 할 맛이었다.

<중략>
때는 1951년10월 초 서부전선에 이상!! 그리고 전 전선에 비상!!
경기도 장단군 구화리 근방, 전 전선에 걸처 적의 추계 총 공세전이 전개 되었다.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10월5일10시경 고지를 향하여 소대공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536무전기를 둘러 메고 소대장 바로 옆에 바짝 닥아서 소대장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소대장이 먼저 앞의 작은 둔덕으로 뛰어가 엎드린다. 바로 뒤따라 나도 2,3 m 간격을 두고 소대장옆에 엎드렸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일까. 소대장이 엎드린 곳이 바로 말벌집이었든 것이다.
이 말벌 떼의 공격을 받아 소대장은 곧바로 얼굴이 퉁퉁이 부어 눈도 못 뜨게 되여 소대장을 대리하여 선임하사가 지휘를 하였다. 선임하사의 지휘로 한발한발 고지위로 공격 하였다. 그러나 7부능선에 도달할 때 완강한 적의 저항을 받게 되고 적의 수류탄까지 날나오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선임하사는 중대본부로 지원사격 요청을 하라고 나한테 명령을 하여 즉시 무전기로 지원요청을 하였다. <아! 여기는 비쓰리, 비쓰리, 독수리 나와라 오바!! 지금 비쓰리 7부능선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돌진 못하고 있으니 7부 능선위로 지원사격 요망 오바!>
잠시후 아군의 진지로부터 전차직사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7부위 고지를 초토화 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고지를 점령 하였다.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부상자중에는 이경노하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고지 정상에는 3평정도의 크기로 완벽하고도 튼튼하게 방카를 구축하여 놓고있었다. 지원사격시 탱크직사포로 그많은 포탄이 명중되어 고지를 초토화시켰는데도 끄떡없이 있었다.
방카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수색을 하였는데 두놈이 죽어 쓰러저있고 한 구석에 두손을 높이들고 투항을 하겠다는 한놈이 있었다. <당시 우리와 상대한 적군은 중공군 이였다>
나는 즉시 생포한 포로의 양손을 포박하고 벙커 밖으로 끌고나와 주머니속의 소지품을 조사하였는데 만년필, 중국지폐한장, 인공지폐 등을 가지고있었다. <지폐는 현재까지 소장 하고있음>
나는 포로를 감시하고 선임하사는 중대본부로 현재상황을 무전기를 들고 한참 보고를 하는 순간,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 발견 하였는지? 개미떼 같이<인해전술> 중공군이 고지 아래에서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대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하며 후퇴명령도 없는 후퇴를 하기시작 하였다. 순식간에 소대원 전원이 모두 퇴각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선임하사와 나 그리고 중공군포로 세명 뿐이였다. 선임하사는 어렵사리 점령한 고지를 너무나 어이없이 내주고 돌아가는 것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퇴각을 불사해 내가 끌다싶이 퇴각을 서둘렀다. 어쩌면 그때 우물쭈물 좀더 지체 하였다면 나는 그곳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지에서 퇴각작전중 이상룡전우가 전사 하였다.<경상도 사람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나이도 나와 비슷해 친절히 지냈던 전우>
우리소대가 잠시나마 점령하였든 고지는 적군의 중대본부였으며 포로는 중대 교육계로 그후 심문 과정에서 아군의 작전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함. <고지 공격중 부상한 이경노하사는 부산 839부대에서 맞났고, 전사한 이상용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1951년10월07일
오늘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천고마비 화창한 가을날씨 이다.
연일 치열하였든 전투도 어제부터 소강상태로 들어가 산천이 조용하다. 우리는 약간 후퇴 하여 어제부터 방어용 철조망 가설작업을 하였다.
작업중 휴식시간에 후방으로부터 편지가 왔다며 몇사람의 호명을 하며 나누어준다. 그런데 나의 편지도 있었다.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든 편지드냐?  집에서 온 편지 였다.
삼개월전 봉일천에서 아버지 직장 주소로 보낸 편지를 받아보셨다는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1.4후퇴의 피란으로 부산까지 내려가 모두 잘 있다는 내용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편지였다. 나는 눈물을 흘려가며 편지를 읽었다. 오늘도 무사하게 하루해가 저산넘어로 넘어갔다.

1951년10월 08일
오늘은 삼일전 전투지휘중 벌에 쐬여 후송 되었든 소대장이 복귀하였다.
오늘 날씨도 어제와같이 좋은 가을날씨다. 오늘의 작전은 야포중대의 관측장교가 일선소대까지 파견을 나와 최전방의 관측을 포대로 연락하여 포대로 하여금 야포사격으로 바로 우리앞의 적진을 포격으로 때리고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주간전투는 이러한 작전으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야간전투의 훈련과 경험이 없는 우리 군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항상 2,3km정도 작전상 후퇴를 하고 내일의 전투에 대비를 하곤 하였다.
오늘도 주간전투를 끝내고 해가 지기전에 후퇴를 하여 한 고지로 돌아와 개인호를 구축하고 있는데, 갑자기 포탄 날아드는 소리가 “쒹”하고 나더니 약10미터 옆에서 폭발, 잠시 후 또 한발이 내 옆에서 고막을 찢는듯 폭발하며 폭연이 눈앞을 가리는 순간 나의 옆구리에 이상한 감각과 느낌이 왔다. 본능적으로 아! 한방 맞았구나 하며 위생병! 위생병! 하고 소리처 부르고 쓰러젔다.
나는 곧바로 달려온 위생병<중대본부에 소속된 위생병으로 나하고는 형제같이 절친하게 지냈음> 의 도움으로 응급치료를 받았다
그후 나에게는 통증과 아픔 그리고 호흡이 제대로 안되어 이젠 죽는구나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죽음의 두려움이 뇌리를 스쳤다.
들것에 실려 고지 아래로 내려와 대기하고있던 찦차에 실린 뒤 나는 정신을 잃었다.<부상시간은 저녁5시에서 6시 사이로 추정됨>
나의 부상 시 또한사람의 부상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와같이 찦차로 후송중 출혈이 심해 사망하였다고 후에 전해 들었다.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 최전방 고지까지 식사 및 탄약등을 운반하던 민간인들이 있었다.밥은 주먹밥으로 사과 괴짝에 넣어 짊어지고 올라와 보급하고 군인 이상가는 고생과 희생당한 분이 많았다. 그때 그들을 지게부대라고 불렀다.>
나와같이 부상당하여 후송 중 죽은이도 그 지게부대 민간인으로 명예와 군번도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당한것이다. 우리 국가는 이제 그렇게 가신이의 가족을 찾아 보상과 보훈의 사랑으로 명복을 빌고 어루만저줘야 한다.
나는 찦차에 실린이후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무엇을 하였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와 있는지? 전혀 생각이 안난다.<전방에서 찦차로 야전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고 그곳에서 또 서울까지 후송하는 과정에서 몰핀<마취>주사를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큰병원의 병실이였다. 병실내 침대와 병실바닥에도 온통 부상병으로 초만원이였다. 나는 그래도 언제 왔는지 침대에 누어 있었으며 아침식사로 죽을 주는데 도저히 먹지못하여 그대로 굶었다. 그리고 이곳병원에서 중대장, 소대장등 많은 전우들을 만났다. 중대장이 부상을 당할정도로 아군에게 심각한 고전이 있었나보다.
계속밀려드는 부상병을 수용하기 위하여 중환자는 후방으로 후송했다. 서울역에 대기중인 적십자마크가 그려진 병원열차에 나는 실렸다. <당시 서울병원이 지금 수도육군병원>
나는 문뜩 전날 받아본 집의 편지가 생각났다. 서울역 앞에 차량과 사무실이 있어 아버지 홀로 서울에 와 계시다는 편지가 생각이 나, 2층 침대 열차였는데 다행이 나는 아래침대였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려일어나 앉아 밖의 철도 직원을 찾아보았다. 때마침 검차 직원 두명이 망치를 들고 열차 뒤쪽으로부터 탕!탕! 금속성 소리를 내며 검차를 하고 내게로 닥아오고 있었다.
나는 차창밖의 그 철도직원을 손짓으로 불렀다. 아저씨, 나는 철도 가족인데, 지금 이 열차가 언제 떠날는지 몰라도 우리 아버지께 연락좀 취하여 주십사하고, 서울역앞 차량과에 근무 하신다는 내용 및 성함을 말씀 드리고 부탁을 하였다.
그중 한분이 흔쾌히 나의 부탁을 받아 주시고 곧 연락을 하겠으니 기다려보라고 하시며 뛰어갔다. 그후 기다렸으나 아버지를 못만나고 기차는 서울역을 출발하였다.

10월11일 대구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 14일 부산5육군병원 종합병동 외과1호실에입원
철도직원의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곧바로 와서보니 이미 열차가 떠난 뒤였다고 한다. 그뒤 서울을 떠난 열차의 행선지를 추적 하셨다고한다. 대구27병원에서 문의한바 마산육군병원으로 갔다고 하여 어머니와 같이 마산으로 오셔서 마산에있는 병원을 온통 다 뒤집어 봐도 내 이름이 없어, 이번엔 부산으로 오셔서 급기야 5육군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시고 10월18일 면회를 오셨다. 부모님들이 면회신청을하고 유준이가 어디를 다쳤느냐고 관계자에게 문의하니까 다리에 총상을 입고 다리절단을 하였다고 하기에 눈앞이 캄캄하고 절망을 하셨다고 하신다. 그러나 나타난 아들이 두 다리가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꿈인지? 생시인지? 놀라셨다고 당시를 회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후 어머니는 매일같이 음식을 새롭게 만들어 가지고 면회를 오셨다. 그 어머님의 지극정성한 간호로 나의 부상은 빨리 회복되었다.

<중략>
내가 원호대로 갔을 때는 명예제대 제14차 제대자가 나갔으며, 나는 이곳에서 기간요원으로 차출되여 3중대 행정요원으로 근무를 좀 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근무하는동안 많은 전우들을 만났다. 정상순 형, 정요보소대장, 이경로하사, 김영호중사, 김용학 분대장, 김기영일병<김기영은 부상당한 후, 누구나 다 죽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여 입과 코 그리고 귀등에서 출혈이 낭자한 상태로 후송하였으니 모두가 죽었을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기서 만나다니! 그런데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장애자로 변신되였다> 또 한사람은, 이름은 모르겠는데 봉일천에서 적의 기습으로 생사를 걸고 봉일천 뚝방을 넘을 때 부상당한 사람으로 한쪽다리를 절단한 중환자가 되었다.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다 쓰러저 죽은 전우들도 있지만 그래도 살아서 이렇게 만나보니 감개무량하였다.          
나는 원호대 제23차로 1952년7월5일 명예제대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2000년 6월 대한민국 국가유공자로 다음과 같은 증서를 받았다.
              
국가유공자 증서
유       준
1933년7월17일생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
2000년 6월 1일
대 통 령   김  대  중

이증을 국가유공자증부에기입함
제14-11333호
국가보훈처장  최 규 학

2000년12월15일
유 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