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의 모자의 대화에서 얻은 교훈]
한가한 아파트의 뒤편 길 건널목에 신호등이 있다.
차도,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한가한 아파트 뒤편 길의 건널목에 초겨울의 스산스런 찬바람을 맞으며 한 젊은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파란 신호등을 기다리고 서있다.
신호등도 건널목도 그냥 무시하고 건너도 될성싶은 뒷골목의 한가한 건널목에, 더욱이 초겨울의 스산스런 찬바람이 부는 저녁나절에 젊은 엄마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끈질기게 파란신호를 기다리고 서있다.
‘웬 신호등이 이렇게도 길담’
나도 그 모자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어린 아이 때문에 차마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너기가 민망하여 엉거주춤 몸을 움추리고 그 모자와 함께 파란 신호등을 멋쩍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신호등을 아랑곳 않고 우리 앞을 가로 질러 건너가 버린다.
그것을 본 젊은 애 엄마가 아이 보기가 민망했는지 아이에게 변명(?)을 해 준다.
“저 아저씨가 매우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치? ”
아무렇지도 아닌 듯한 이 평범한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녀의 지혜로움에 그 젊은 엄마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젊은 엄마였다.
‘저 아저씨 나쁘지? 그치? 빨간 불인데 막 건너가네.’
만일 이렇게 아이의 교육을 위한답시고 좋고 나쁨을 정죄하는 이야기를 했다면 내가 그 젊은 엄마를 다시 쳐다 보았을까?
우리는 가끔 일상 생활 속에서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게된다.
그 젊은 엄마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를 들으면서 나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익이냐 손해냐 등 이분적인 논리에 만 익숙해 있는 우리 사회의 각박함이 떠 올랐다. 술수가 판치는 그래서 정치적이라면 옳고 그름과 제로섬의 게임인 것으로 비추어지는 우리의 과거와 현실에서 그 젊은 엄마의 지혜가 돋보인 것은 너무도 비약적인 생각일까.
옛날 소련시절에 한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고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아버지를 고발한 것이다. 소련은 체제 유지를 위하여 그 아이를 영웅화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나를 위해 열을 잃는 우매함 밖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음을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서 알 수 있다. 붕괴되는 가정과 윤리가 종국적으로는 국가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것을 왜 간과하지 못했을까.
최근 북한에서 발생한 용평 폭발 사고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북한이 선전에 이용한 이야기를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적이 있다. 폭발 때 집이 무너져 내리는데 벽에 걸렸던 김일성 부자 사진을 엄마가 애들보다도 먼저 안전한 곳에 갖다 놓고 돌아 와 보니 방이 무너져 내려 아이 둘이 사망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이들을 죽게 한 그 어머니의 충성심을 북한 당국이 체제 선전에 이용했고, 더욱이 외국 언론에도 보도되어 그 기사를 본 목사가 한민족으로서 챙피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나를 위해 열을 잃는 또 다른 무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하루 아침에 어린 학생들에게 우상이었던 지도층의 사람들이 파렴치범으로 몰리고,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죄수 복을 입고 마스크를 하고 구차스럽게 휠 체어에 앉아있는 모습들이 텔레비전에 비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우리 사회, 그로 인하여 제대로 된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이 사회, 아마도 언젠가는 이순신 장군도 그 광화문의 높은 자리에서 끌어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하게 하는 이 사회에서 건널목의 그 젊은 아이 엄마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는 나에게 신선한 희망을 주었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 영악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정치요, 세계화요, 세계 속의 경쟁력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자라고 있는 젊은 이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한 건널목에서 만난 젊은 엄마의 말 한마디였다.(끝)

잠언15:1 부드럽게 받는 말은 화를 가라앉히고 거친 말은 노여움을 일으킨다.
잠언15:2 슬기로운 사람의 혀는 바른 인생길을 깨우쳐주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소리를 뱉는다.
잠언16:24 다정스러운 말은 꿀송이 같아 입에는 달고 몸에는 생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