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란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우리 손에 보화를 쥐어 주어도 그것을 모르면 그것만큼 어리석고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보화가 천국잔치라고 저는 믿습니다. 2000년전 예수님으로 인해 죽은 자가 살아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오늘 우리에게 재현되는 것도 바로 이 천국잔치가  내 안에 베풀어져야 가능한 것이겠지요.

식욕을 채워주는 것이 음식이듯 우리의 영원을 향한 영적인 배고픔은 오직 천국잔치로 인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나 영적인 배고픔을 가진 가난한 자가 된다면 천국은 그의 것입니다. (마5:3)
왜냐하면 그는 반드시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만 천국잔치가 있고 그는 그 잔치로만 그의 영적인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실패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까지 그를 만나로 오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그에게 천국잔치를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천국잔치(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왔고 이미 우리와 함께 공존하며 그 잔치는 우리마음에서 베풀어지길 원하고 있습니다. 천국잔치인 하나님나라는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린 그곳의 놀이터에서 뛰어 놀 수 있으며 그곳에서 왕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십자가로 열어 주셨고 원하는 누구에게나 값없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에게 있습니다. 천국잔치가 나를 위한 천국잔치가 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몫입니다.
눅14장처럼 하나님은 큰(천국)잔치를 준비해 놓고 우릴 초대하시는데 우린 밭을 샀으니 나가 보아야 하겠다, 나는 소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야 하겠다, 나는 장가를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밭을 샀다는 것은 회사를 하게 되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죽어서나 가는 나라이니 당장은  회사일이 중요하고 급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사일로 천국잔치의 초대(건설)는 꿈(?)이 됩니다.
또 장가들었다는 것은 요즘말로 바꾸면 세상사는 재미가 생기게 되었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겠지요. 세상사는 재미 때문에 믿기지도 않는 천국잔치의 초대는 꿈(?)이 됩니다.

이제 그 자리는 가난한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의 차지가 됩니다. (눅 14:21)
그래도 그 자리는 남습니다.(22)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자리가 많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자리를 사모하는 사람이 그렇게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잔치에 초대하여 함께 그 잔치를 맛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릴 창조하신 목적이고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일반은총으로 보호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린 예수님의 잔치에 지금 참여해야 합니다.
“나는 밭을 샀으니까, 나는 소를 샀으니까, 나는 장가를 들었으니까”라는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린 이 잔치에 지금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기쁨과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헌신하는 것으로, 착해지는 것으로, 아니면 세상것을 얻기 위한 기도응답의 기쁨으로…. 물론 이런 것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우리가 이 잔치를 내 마음에서 누리고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생활은 마치 앙꼬없는 찐빵이요 보화가 담기지 않은 질그릇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 신앙생활이 어떻게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은혜가 고작 그 정도의 효력밖에 우리에게 발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린 신앙이 “콩심은데 콩나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콩심은데 팥나는 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콩을 심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이 영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젠 우리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린 예수님과 같은 영광과 존귀함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아 갑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만물의 으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영원히 사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이 복을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이 복을 누리기를 소망합시다. 이 복을 누리는 자가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과 하나 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되길 원하다”는 요15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기쁨”은 무슨 기쁨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영광의 몸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우리의 푯대요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우린 가장 불쌍한 존재들일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영광중에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우린 인류최대의 사기극의 희생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영광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요 생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고 초대교회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요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요 예수님이 생명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천국의 기쁨을 입은 사람들이며
이들이 천국의 예복을 입은 천국의 주인공들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