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박찬호를 혹평했던 미국기자가 올해는 박찬호가 좋아질 것이라 호평을 내 놓았습니다.
그 이유로 박찬호가 더 이상 자신이 빠른 공을 가진 투수로 자신을 인식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은 “우리를 혹평하실까 아니면 호평하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8-29)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핵심이요 본질이겠지요. 과연 예수님의 몸은 무엇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코드(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요12장에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속에 예수님이 왜 오셨고 예수님의 몸이 무엇이고 우리의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가 함축적으로 모두 담겨 있다고 봅니다.

바로 우리의 죄는 사람의 영광을 추구한 것이요 예수님의 오심은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고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육에서 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람의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썩어질 것에서 썩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결국 세상의 영광을 먹고 마시던 사단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부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인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부유하신 자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유케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씻어 내어 주셔야 하는 부분은 바로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나의 마음이며 그 공간에 채워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럼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해석할 때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해석하실까”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인간적인 우리의 필요와 인간의 한계가 아닌 성경이 요구하는 해석을 할 때 그 말씀으로 우린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사람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강해지고 지혜로워지길 꿈꾸는 것입니다. 고전1장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듯 예수님의 몸 특히 겉모양을 닮으려 함으로서 우린 우리가 강하고 폼나고 지혜로워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은 고전1장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신 것처럼 내가 아닌 하나님이 능력자요 하나님이 사랑이요 지혜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집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말씀처럼 우리 자신이 강해지면 자신을 더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이 강하심을 알아 갈수록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슷한 말이 아닌 반대말이며 이것이 넓은 길과 좁은 길을 가르고 모래와 반석을 가르며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를 가른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거의 동일한 얘기지만 사람의 영광을 추구함은 육신의 문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은 영혼의 문제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본능은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해결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영혼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 대화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육신을, 하나님은 영혼을 원하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육신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도 아니며 또 그것을 놓고 기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이요 또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더 착해지고 더 부유해지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 없이도 즉 세상의 무엇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영역입니다. 이것은 육이 영이 되는 것이 아닌 육이 더 나은 육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나 바울이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다”라고 한 말도 이것을 두고 하신 얘기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울지라도 예수님의 몸(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먹고 마시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위해 이 두 가지가 해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어쩌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핑계(?)로 사람의 영광을 먹고 있는 우리를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우리는 박찬호가 자신의 빠른 공을 믿었기에 혹평을 받듯이 우리도 우리를 강화시키며 그 연장선상으로 육신의 문제에 너무 치우쳐 있는 우리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 혹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처럼 우리 코드를 하나님과 또 우리의 영혼의 문제로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신앙의 코드를 갖는 것이요 옥토와 좁은 길의 코드가 됩니다.
우리가 이런 코드를 가지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로 신부로 온전히 서 갈 수 있으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금도 절실히 필요한 방패요 길이요 구원자가 되시는지를 더 깊이 알게 되겠지요.

무엇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런 기쁨을 누리겠지만 더 풍성해 진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에 작고 작은 우릴 두심으로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길어야 120년인 태엽을 우리 몸에 두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의 부질없음을 가르치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눈을 떼지 못하시며 지키시며 사랑하심도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리시는 능력과 생명을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저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저 바다가 넓은 것도 …….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우린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 알게 되는 만큼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자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수준까지 이르면 우린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신앙의 자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이 밝아지는 것이며
또 하나님 안에 있는 내 영혼이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실까. 얼마나 부유하실까. 얼마나 사랑이 많으실까.
그리고 하나님안에서 내 영혼은…
저도 조금씩 배워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이젠 억지요 어려움이 아닌 기쁨이요 만족으로 바뀌어 갑니다.
하나님이 능력자요 사랑이요 아름다움이요 부유하심임을 알아갈수록 더욱 내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람이요 열매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말씀)과 코드를 맞춥시다. 그 코드가 우리를 돌밭과 가시덤불 밭이 되는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풍성한 나무로 자라게 할 것입니다.
그 풍성한 나무를 기대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가꾸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