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조론
창조론은 기독교의 핵심사상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죄성론 따라서 구원론도 성립될 수 없다. 창조론의 중심에는 창세기 1~2장(천지창조)이 있다. 이를 쓴 모세의 사고틀은 그때 그당시 천지에 관한 지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동설을 믿었을 것이고 대개 사람들이 성경 내용대로 믿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세계관은 근세에 와서 지동설이 증명되고 진화론이 대두되자 혼란에 빠졌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경의 한획도 틀림이 없다고 창세기 1~2장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무리다. 이부분에 관해서는 현대과학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 창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몇년전 만나 뵌 학부 때 물리학을 공부한 모 목사님이 하나님의 영이 크로마뇽인(?) 시대쯤 인간에 들어왔다고 언급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동물적인 인간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믿음이 싹텄다는 것이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설(說)이다.

2. 존재와 무(無)로서의 하니님
역사상 수많은 참상, 가까운 현대에 발생한 유태인 학살, 캄보디아의 killing field, 최근의 동남아 해일 참상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에 회의를 가지는 신도들이 많다.동남아 참상을 보고 캔터베리 대주교도 어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고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우리는 신자의 입장에서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수원 카톨릭 교구의 심상태 신부님의 견해가 도움이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그는 그의 책 “속(續) 그리스도와 구원”에서 존재와 무가 병존하는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현존양식을 주장한다. “역사를 통해 이 세계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무고한 고통의 발생을 지켜보면서 신은 거기서 이를 개선하고 변혁하는 전능하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무력하기 그지없는 무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부님은 이 무는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신의 계시인 육화된 신의 모습을 통하여 완성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통합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현존은 인간의 삶의 조건에 상응하여 동적인 양식으로, 그리고 정적인 양식으로 발생한다. 동적인 현존양식으로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제시할 수 있고 정적인 현존양식으로는 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면서 바로 그러한 가운데 우리 앞에 현존하는 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 회퍼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바로 피안자로 머무는 그러한 분”이라 할 수 있으며 이분이 우리를 존재케 하였고 우리을 무의 상태로 방치시키면서 죽음과 부활의 도정을 거쳤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