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달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즉 ” 알츠하이머 증세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할머니들에게 기독교가 무슨의미가 있을가. 우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죽은 뒤에 아무 의식도 없고 현재의 나라는 존재와 일체성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기독교는 이생의 삶의 방식이지 사후와는 무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 부활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가. 혹자는 삶이란 무슨 보상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삶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저 열심히 살다가 성취감을 느끼고 마지막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느끼면 족한 것이다. 삶에 열중하면 인생, 사후 그런 것 자체가 뭐 그리 중요한가. 기독교란 그와같은 삶에 관한 하나의 방식이지 그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에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어제 목사님의 성탄절설교는 상기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즉 상기 의문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몸을 낮추시고 우리의 고문에 순한 어린양같이 순종하시며 십자가를 지셨다”는 지극히 높으신 뜻에 비하면 하찮은 질문이다. 그런 질문은 우리 믿는 자에게는 무의미하다.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산타반의 입장으로서는 상기 의문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기독교는 세상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가치, 세상 삶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몸을 바치신 예수님의 숭고한 뜻에 감복하여 (수원 카톨릭대 교수이신 심상태신부님은 그의 책 “그리스도와 구원”에서 “그분이 인간사에 개입하면서 고통당하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신학작품등을 대할 때 전율을 느낍니다. 참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죽음과 고통의 운명을 겪으신다는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를 깊이 감동케 합니다”라고 표현하셨다) 이를 기리고 감사해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 가르침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우리는 그 신비, 놀라움에 감탄하여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신약의 부활에 관한 증거, 또한 이를 증거하는 성령의 역사를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세상 어느 위대한 발명 또는 발견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깨달음(?)을 이미 오래전에 얻은 뒤 세상에 빠져 살다보면 까막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의문을 계속 던진다는 점이다. 96년 교회 나가기 직전에 나름대로 이를 깨닫고는 얼마 지난 뒤 다시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던 것같다. 아마 기독교에 세상적 복을 구하기 때문이리라. 사실 우리의 기도는 거의 전부 돈, 부귀, 영화 그런 것 뿐이니까.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와같은 것들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 따라오는 부수물로 보아야지 그자체를 추구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