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도올과 기독교

얼마 전 KBS에서 방영되었던 도올 김용옥의 논어이야기는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하는 특별대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도올은 초기 한국 기독교(여기에서 기독교는 천주교를 말함)의 전래사를 말하는 자리에서 기독교가 당한 숱한 박해를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가 기록한 천주실의의 발문을 다시 인용하면서, “만약 기독교의 하나님이 2천년 전,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수와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만의 하나님이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시느라 얼마나 바쁘실까?”라는 조소섞인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빈다면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를 소개한 천주실의의 발문자 역시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진리는 받되, 지역적이고 배타적이며 협소한 문자주의적 기독교는 거부하였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점은 여기에 반응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대답 또한 도올의 생각과 동일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었을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사회에 전통적으로 내재한 다분히 유교적인 하늘에 대한 경외사상이 있었는데, 천주교는 단지 그러한 하늘에 대한 사상을 보다 더 심화시켜 준 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종교는 다 가치있는 것이며, 각각의 종교에 속한 개인은 자신이 믿는 믿음에 따라 참되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모두다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도올은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답변에 맞장구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매우 편협된 주장이라고 일축하였습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표명한 것이지요. 그는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는 바로 사랑에 대한 가치인데, 이것은 공자의 인(仁)과 상통하는 가치로서 모든 인간들이 점점 황폐화되어져 가는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의 문화로 바꾸는 노력을 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에!
동의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는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진리 안에서 모든 종교의 참된 진리와 비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도올과 김수환 추기경의 기독교는 결국 다른 모든 고차원적인 종교의 도덕적 이상(理想)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기독교는 단순히 고차원적인 여러 도덕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하였고, 기독교는 그 자체로서 갖는 독특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된 그 무엇이 아니었고, 오로지 그와 같은 도덕적 이상에 매진할 때 획득될 수 있는 것이 되고만 것입니다. 점점 더 만연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지켜보면서 “그렇다면 현대인들에게 과연 기독교는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만의 독특한 구원이라는 것이 과연 자리할 수 있는가?”라는 얘기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생각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그릇된 신앙의 여러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보다 분명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실지로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다른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신앙의 모습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그릇된 신앙의 네 가지 유형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의 다양한 신앙의 모습들을 면밀히 고찰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을 찾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들을 몇 가지로 지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잘못된 신앙의 유형으로 현세 중심적인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서의 주된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결핍 혹은 부조리와 관련하여 이를 극복할 만한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이들은 모든 종교적 열심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 건강과 무병장수(無病長壽) 등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이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와 같은 현세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엄청난 정성과 맹렬한 태도로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참석, 기도, 봉헌 등과 같은 종교의식적인 행위나 직분을 맡아 충성봉사하며 교회를 섬기는 일 등은 모두 이 세상에서 지복(至福)을 누리기 위한 자기 공로적인 노력에 다름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사후세계는 그다지 관심있는 일은 아닐지라도 혹여 천국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이들은 이또한 쟁취하기 위하여 열심으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종교적인 노력은 철저하게!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무한행복(無限幸福)을 위한 도우미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2)
잘못된 신앙의 두 번째 유형으로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성향을 띠는 감정적 체험신앙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현세 중심적 신앙의 일종인데, 이것은 타락한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영적 혹은 정서적 결핍으로 인하여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깊은 의식 속에는 본능적으로 영적인 고독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마음 속에는 비록 그들이 타락했을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내밀한 갈망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를 가리켜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한 ‘종교의 씨앗’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때때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될 때, 심각할 정도의 정서적인 허탈감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치명적인 상실감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무엇인가 절대적인 존재를 의지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로 통한 아픔이든, 미래에 대한 인생의 좌절을 경험하게 된 경우이든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정서적 상처는 그로 하여금 정신적인 아노미 상태에서 건져줄 구원자를 찾게 하는데, 바로 이것이 반지성주의적인 ! 체험적 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 전통의 교회의 신앙고백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적 공허감을 채워줄 수 있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영적 체험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경배와 찬양예배와 같은 모임이나 신유은사집회 등과 같은 열광적인 모임을 즐겨 찾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간절한 마음의 이면에는 자신의 영적 공허감을 채워줄 강렬한 무의식의 욕구가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절대자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의지하려는 경향을 넘어 수많은 영적 은사를 추구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에로의 열망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잃어버린 영적 자존감을 강화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줄 카운셀러에 불과할 뿐입니다.


(3)
그 다음으로 잘못된 신앙의 세 번째 유형은 고상한 도덕주의적 신앙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도올 김용옥과 김수환 추기경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죄, 곧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에덴의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경험하는 부조리한 이 세상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져다주는 신화(神話)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최상의 도덕적인 모범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상하고 숭고한 도덕적 삶을 교훈하는 살아있는 윤리서(倫理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훌륭한 도덕적 스승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자신을 내어버린 희생의 삶을 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교의 자비(慈悲)와 유교의 인(仁)의 정신처럼 기독교가 지닌 숭고한 사랑(愛)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는 사람들은 두고라도 실지로 많은 교인들이 기독교의 중요한 임무를 불의한 사회구조의 개혁이나 구제와 자선을 통한 사회봉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
淪?비판 역시 이러한 도덕적인 잣대에 의해서 비롯되는 실정입니다. 최근 신선한 이미지로 매스컴을 통하여 각광을 받고 있는 신흥 대형교회들의 출현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인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보다도, 그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에 대한 정당한 평가보다도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도덕적 인격이 강조되고 그 교회의 윤리적 평판이 부각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이러한 도덕주의적인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일반적인 도덕규범을 제공하고 그렇게 살도록 강화하는 엄격한 윤리교사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4)
이도 저도 아닌 네 번째의 유형은 형식과 습관에 길들여진 종교의식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대개 모태신앙을 비롯해서 어렸을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경우에 나타나게 되는데, 장성한 어른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구원 신앙의 도리를 배우지 않고 오랜 세월을 흘러보내는 경우에는 이러한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류의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경험하는 기존의 선배 교인의 신앙과 소속된 교회의 외형적인 신앙의 스타일을 자신이 배워야 할 신앙의 전형(全形)으로 삼습니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성경을 보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각종 행사에도 참여하며, 이를 통하여 다른 교인들과 함께 친밀한 유대를 도모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와 같이 다양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자신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여깁니다. 자신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며 이러한 종교적 활동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종교적 신앙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색깔만 기독교이며, 이름만 !
기독교일 뿐 이러한 신앙의 본질은 다른 종교적인 신앙과 조금도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주로 신앙의 내용보다 외형적인 겉모양만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이나 종교개혁 이후의 국가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의식주의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경우, 보통 한번쯤은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정당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때에는 기독교에 대한 극단의 반발현상까지도 보이며 심지어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습관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당한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경건의 모양만을 지닌 채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관습적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헬라인들의 알지 못하는 한 신(神)’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구원의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

이상에서 지적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절대절명의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구원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까닭에 각자 나름대로의 자기 신앙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설정한 기독교를 바라보며, 자신이 만든 예수를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냉냉한 가슴과 습관적인 종교적 생활만이 남은 오늘의 교회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힘겨워하는 오늘날의 교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를 섬긴다고는 하나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기에 더욱 힘을 씁니까? 교회를 위한 수고가 왜 다른 교우들을 중상하고 모략하며, 분쟁을 일삼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요? 현대의 교회는 수많은 세인들의 지탄의 대상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혹 이러한 모습이 바로 당신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그러나 참된 구원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의 행로를 걷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을 바르게 알 때, 비로서 진정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할 사실은 참된 구원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정당한 내용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구원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을 위한 유일한 은혜의 방편으로 내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만 참된 구원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믿음은 정당한 믿음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먼저 교회 내에 있는 사실상의 불신자들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운데 정당한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 때, 그 곳에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결코 역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7).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복음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 1:16).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고 바르게 선포될 때에야 비로서 참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으나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유아(幼兒)인 자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도리를 배우지 못할 때에는 진정한 영적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아니라 영적인 갓난아이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라나지 못할 때에는 우리는 심각한 영적 장애를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구원 신앙으로 자라 가도록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 개혁신앙에 기초한 참된 성경적 구원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참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살핌으로써 여러분들의 구원 신앙을 새롭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펌-도르트 신경으로 보는 구원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