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의는 원래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고려해 볼 때, 어떤 사람의 의지가 전혀 변하지 않았고, 비록 지금 당장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지 속에서 죄를 범하겠다는 상습적인 고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이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윤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도 죄를 범한 사람이 죄에서 돌이키고 이전의 성향으로 회귀해야 용서받기에 매우 적합하게 됩니다. 칭의와 중생은 떼어놓으려 해도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면서도, 또한 서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중생은 우리 ‘내면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두 가지 모두의 기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이 두 가지 모두의 공로적 원인이 되십니다. 칭의는 성부 하나님께 선언하시는 것이고,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선언이요,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관계적인 변화와 실제적인 변화는 동시에 이루
어집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 두 가지가 늘 함께 간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우리는 믿음을 갖기 전에는 결단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기 때문입니다(롬 5:1).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삶의 근간이 된느 극히 중대한 원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믿음은 뿌리가 되는 은혜입니다. 믿음안에는 다른 모든 은혜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언제든지 다른 모든 은혜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진압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미 7:1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짓밟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만든 근원인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긍휼의 심정을 품으실 때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죄악으로부터 발을 돌이키도록 만드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기 때문에 모든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살아 있어야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먼저 있은 후에 행하는 것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롬 8:1) 그러므로 스스로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죄를 용서받게 되면 반드시 의로운 본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비록 그 의로운 본성 때문에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