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G.I. 윌리암슨, 나용화역,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제 9 장 자유 의지


9장 1-5조.


p.145.


개혁주의 신앙(장로교, 청교도 등등)이 “자유 의지”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서는 개혁주의 신앙에 대하여 폭언을 퍼붓고 비난하는 일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예정은 그 주권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으로 말미암아, 모든 참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소멸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개혁주의(칼빈주의)신앙을 곧장 거부해 버린다. 그렇지만 반어적으로, 어떠한 다른 신학 체계도 개혁주의 신앙만큼 참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자유 의지이고 무엇이 자유 의지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살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란 인간의 의지가 강요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행하도록 자신보다 더 큰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 외에 자유를 달리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유란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자유와 능력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둘을 혼동함으로 해서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릇된 사상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실상은 사람들에게 선이나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면서도, 선이나 악을 행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명백하게, 그리고 시종일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1) 인간에게는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어느 것이나 자유로이 행할 수 있다.


(2) 그러나, 그가 타락한 상태에 있는 까닭에 오직 악을 행할 능력밖에는 없다(신30:19, 요6:44등). 많은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는 이 요인은 마12:33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해결된다. 그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의지는 인간 영혼 또는 인격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인간의 영혼(자아,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 의지는 그것의 원천이 되는 도덕적 성격을 떠날 수 없다. 만일 영혼이 완전 부패하여 그것의 지식과 소원이 불완전하고 불건전하다면, 결국 영혼은 악한 것을 항상 행하려 할 것이다. 이렇듯 절대적 자유는 선을 행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경우일지라도 존재한다.


인간은 본래 무죄한 인격을 소유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만을 소원하였다. 그는 그 자신의 소원에 일치하는 것을 행할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본성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소원들은 선할 뿐이었다. 그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와 또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있던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는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 대동소이하나, 그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전혀 없는 완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죄가 들어옴으로 해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자유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대로 한번의 범죄가 선한 열매인 의로운 행위만이 나올 수 있었던 순전한 본성을 멸망시키는 데 충분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나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인간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는 남아 있었으나, 능력면에서 다만 악을 행할 능력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창6:5, 비교8:21, 고전2:14, 시14편, 53편).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죄 많은 인간은 자기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선을 하나도 행할 수가 없다. 아무도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가 없다(요6:44).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본성 때문이다. 외부의 힘이나 압력에 의하여 그가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부패한 성격 때문에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체에는 팔, 다리 등이 있으나, 그것들을 사용했던 자가 죽어 있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몸을 부활시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때에는 다시금 사용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그는 그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꺼이 행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다시금 갖게 될 때에만 선을 행할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엡2:1이하, 요3:3, 빌2:13).


거듭난 사람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타락 이후의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절대적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거듭난 사람간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이지, 자유면에서의 차이가 아니다. 양자 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한쪽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는 능력이 있다(엡2:10 요일5:18, 겔36:26).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갈6:15). 그러므로 그는 선한 것을 원하며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능력은 아담이 본래 갖고 있었던 것과 같지 않다. 한때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할 능력이 아직은 없다. 이것은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한다. 그는 의의 길로 일관하여 나간다(요일3:9이하). 죄가 더 이상 이전처럼 그 안에서 이길 수 없다(요일3:3, 엡5:9, 롬6:14).


그러나 죄가 그와 함께 있다(롬7:21). 이렇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자들이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본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완성품들”이 아니다. 그들은 “원리면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언젠가는 “속속들이”완전하게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일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 그들 안에서 일하시어, 그 자신의 선하신 뜻을 더욱 더 많이 행하며 행하게 하신다.


점차적으로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그의 일이 성취되어, 그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가서도, 인간은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자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차이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에 있으며, 자유에 있지 않다. 그는 그때가 되면 옳은 것만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그때에 그의 본성이 완전히 거룩해지고 전적으로 모든 악한 것과는 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추호도 악한 것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저자와 독자가 그날을 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