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간섭]



이스라엘 민족같이 기적 속에서 살아온 민족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 나오고, 만나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서 가나안땅을 얻은 족속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이 인류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수난의 연속이었던 민족은 다시 없습니다.
이스라엘 옆에 있었던 모든 나라가 흥하고 망했지만
이스라엘은 망한 적이 없습니다.
놔두고 계속 고생 속에 있게 합니다.
지금도 아랍 제국가 속에 홀로 갇혀서
사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쪽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게 이겁니까?
홍해를 가르고 나와서 뭐 좀 나은 줄 알았더니 광야였고,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전쟁이었고,
거기서 언제나 싸워야 했던 블레셋이 있었고,
애굽이 있었고, 나중에 바벨론이 있고, 페르시아가 있고,
알렉산더 대왕한테도 한 번 당하고, 그리고 로마에 당하고,
그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져서 나치한테 당하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 하면
언제나 저 밑에 있는 족속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그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에는 자꾸만 핵심을 바꾸려는 시도가 생깁니다.
축복을 만들자 이겁니다.
하나님을 믿었더니 연필을 대고만 있으면 정답이 써진다거나,
논술고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거나,
누구를 쳐다보면 저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석점 앞을 지나가면서 원하는 보석을 3초만 쳐다보면
이미 주머니에 들어와 있던지 뭐 확실한 것이 있기를 원합니다.
아니면 하다못해 십일조를 헌금함에 넣고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보면 열 배가 있다든가…얼마나 좋습니까?
병원에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프게 되면 성호를 3번만 그으면 뭐 그냥입니다.
무좀부터 비듬까지 싹 낫는 것입니다.
요새는 그게 축복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하나님께서 한번도
간섭하신 손길을 놓은 적이 없으되
이스라엘 민족이 좋아했던 날 수는 몇 날 없습니다.
전부 고생한 날들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했다 그럽니다.
이게 사랑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말1:2)”

에서가 야곱의 형이 아니냐라고 묻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에서가 야곱보다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자라는 것입니다.
장자가 언제나 재산을 거의 물려받는 법이니까 조건이 더 나은 법입니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고 하십니다.
야곱과 에서의 생애가 어떻게 다릅니까?
야곱은 고생했고 에서는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야곱은 고생을 무지무지하게 했습니다.
그의 전 인생에 걸쳐서 고생했습니다.
그게 사랑이라 그럽니다.

사랑이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죽을 것을 위하여 뛰어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태만과 비참을 향하여 뛰어가는 우리의 발을 자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돌이켜 생명과 진리와 영원을 준비케 하는 것입니다.
그 간섭이 우리에게는 싫은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원래 우리의 욕심을 따라 뛰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강해/박영선목사/도서출판 엠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