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를)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기독교는 상황에 좌우되거나, 우연적이며 불확실한 종교가 아니다. 억지로 기독교라고 이름한 것 중에 알미니즘(알미니안주의)이라는 것이 있는데, 알미니즘은 로마 철학의 후예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성경을 인정치 않으며 영혼을 망치는 타락한 가톨릭의 일파로서 그들의 아비는 마귀이다. 그들은 인간의 공적이나 피조물의 능력이나 선행을 쌓을 것 등을 지껄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신성모독적인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어서,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을 불확실성이라는 안개와 늪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확실한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 확실성은 착한 일을 시작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불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 아더 핑크 / 여수룬>



이러한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이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그 손에 들린 진흙덩이가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그릇으로 만들어지든지 하나님을 노하게 할 그릇으로 만들어지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롬9:21). 죄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안에 들어 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신적 특권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항변도 하지 말고 그 엄숙한 사실을 관찰하고 숙고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32:39). 그러한 분을 경박하게 취급하여 말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가장 큰 경외심으로 존중해 드려야 한다……


(p.317) 죄인의 의지가 죄의 노예에 사로잡혀 있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 복종할 마음을 먹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적대감을 이기셔야 한다’. 성경이나 현실의 관찰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모든 배도자들을 다 복종케 하는 것은 아님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만 은총을 받을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다. 시편 110:3은 이렇게 선언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비록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지만”(엡2:3), 또한 동등하게 부패하고 죄를 지었지만, 이 소수의 사람들은 중생치 않은 상태에서마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들은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영원한 경륜에 의해서 하나님의 소유요,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렘31:3).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그들을 선택하셨다(엡1:4). 그리고 그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롬8:29).


따라서 그의 권능의 날에 하나님은 그들을 새 생명으로 살리시고, 그 영혼의 질들을 받을 조건으로 바꾸시며 그 영혼을 정중히 받아들일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정한 시기에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또한 그 긍휼의 그릇 속에 신적 능력이 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시온(p.318)의 백성들에게 은총을 보이실 정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시102: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시간을 정하셨기 때문에 그 때가 찼을 때 아무도 그 포로기간을 연장시킬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그 정하신 때에 죄와 사단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낳고 죽는 순간의 때를 정하신 분(전3:2)은 우리의 회심의 날을 결정하도록 우리에게 내맡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회심할 것인지 회심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하여는 더욱더 그러하다.


<인간의 전적타락 / 아더 핑크 / 청교도 신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