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다시 보기(4) (창 22:15~19)

2024. 2. 25.(일)
박영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최고의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본보기가 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이삭을 바친 사건 때문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었고 그의 아내는 당시 구십 세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때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얻은 아들이다.

그 귀한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열 살 안팎의 아이를 잡게 된다.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칼로 잡으려고 할 때 천사가 내려와서 말린다.

네가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너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진심을 인정한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또 주리라.

(2) 이 약속은 창세기 12장에서 이미 했던 약속의 확인이지만 그때 약속보다 훨씬 진하게 맹세라는 방법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믿음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성경이 이 모범적인 사례를 제시할 때 우리는 약간 기가 꺾일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믿었다가 말았다가 하는 것이 정상이다. 자식을 잡으라고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잡는 사람은 없다. 물론 성경도 그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나. 본론

(1)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는 이 사건은 보기보다 중요한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설명이 필요하다.

처음 아브라함이 불려 나와서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문맥상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 문맥의 말씀을 하실 때는 세계사적인 그 시대가 더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아담이 범죄하여 다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구백 년 이상을 살지만 헛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을 취하는 영적인 무지와 부패 속에 있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이 저들을 심판하게 되었다. 벌을 준다기보다 이런 독백이 숨어 있었다.

이건 아니야. 나는 너희를 이따위로 만들지 않았어.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이러한 외침은 노아의 홍수로 나타났고 홍수 이후에 다시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자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 버리신다. 공멸을 면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과 그들이 멸망 당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탄식하셨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다시 선언하신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굉장한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이때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기울였던 인류가 다 망하고 난 지금,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어마어마한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인류는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바보짓을 하고 못 난 데로 가고 벌을 자초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심정이 심판에도,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데에서도 나타났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복을 주심으로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복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야단을 치신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이것밖에 못 하느냐, 라고 수사학적인 표현을 쓰시고 있다.

이삭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물으셨다.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줄까? 아브라함이 답했다. 저는 자식이 없으니 제가 데리고 있는 양자 엘리에셀이나 잘 키우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답하신다. 그는 네 몸에서 난 자식이 아니니 내가 네 몸에서 낳는 자식을 주리라.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하갈과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게 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잘 키우게 해 주십시오, 라고 다시 말하고 하나님은 아니다, 너와 사라 사이에서 자식이 생길 것이다, 고 하셨다.

제 나이가 백 살 가까운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다. 이때 사라가 웃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잘 감추고 웃지 않았을까?
너 웃었다. 자식을 낳으면 이름을 이삭이라고 해라. 네가 나를 비웃었으니 네 자식의 이름을 비웃음이라고 해라.

이삭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은 굉장한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삭을 잡으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을 것이다. 믿음의 진전이 있었지만, 이삭을 잡아야 한다는 말씀은, 지금까지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는, 청천벽력 같은 경악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친다. 그리고 정말 잡으려고 칼을 빼 들었을 때, 하나님이 말리신다.

네가 나를 여기까지 믿었으니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건 데, 내가 너와 약속한 것을 지키겠다.

(2) 우리는 이삭까지 바치면 모든 복을 받는다, 고 쉽게 생각해서 이 사건은 신자들에게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아브라함이 당황했던 것처럼 우리도 당황한다. 잘 믿고 있는데 그 믿음에 대한 보상보다 그 믿은 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 현실을 경험한다. 아브라함의 경험의 현대판인 셈이다.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흔들릴 때 이삭을 바친 사건을 기억하고, 그것과 지금이 유사하다, 고 새겨야 한다.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롬 5:19~21)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론은 우리가 잘 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가 핵심인 것이다. 예수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는 영생을 받는 자가 되었다.

아담이 실패하여 그의 후손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것처럼, 예수의 승리로 그의 후손들은 구원을 은혜로 얻는다.

구원을 은혜로 얻었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은 평안과 형통이어야 맞지 않는가? 그러나 쉽지 않다. 고뇌하고 갈등하고 의심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롬 6:6~11)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다른 신분을 가진 존재이다.

(롬 7:18~24) 이렇게 죄와 신앙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다. 로마서 6장에서 본 대로 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고 영생에 대해서는 살아 있기 때문에 영생에 대해서만 감각이 있고 죄와는 분리되며 사망과도 관계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뜻밖에도, 위와 같은 과정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내 속에 죄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생명과 갈등이 있고 나는 늘 죄에게 진다고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바울은 고함을 지른다.

우리가 로마서 5장과 6장을 모두 인정하지만, 현실은 로마서 7장인 것이다.

로마서 5장과 6장은 거짓말인가? 사망이 다시 등장하고 사망에 의해 끌려간다.

(롬 7:25) 25절의 앞부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래, 이 갈등도 결국 예수 안에서 이긴다, 라고 들린다.

그러나 그다음에,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쓰여 있어서 위의 갈등이 아직도 해결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인생이 형통하고 같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대일 뿐 현실은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과 영생을 얻는다고 알고 있지만 죄는 자연스럽게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잘하려고 하면 죄는 더 기승을 떤다. 내가 신앙생활을 낮추면 죄도 시험을 낮춘다. 내가 열심을 내면 죄도 열심을 낸다. 그래서 언제나 힘이 든다.

(롬 8:1~2) 여기서 드디어 해결이 된다. 그러면 로마서 7장 24절, 25절의 말씀은 왜 있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면 그 말씀들은 필요 없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는데 왜 나는 현실에서 죄에게 매일 져서 쓰러지고 있는가?

비밀이 있다. 죄는 아직도 살아있고 우리를 공격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이고 사망은 모든 존재와 가치의 소멸이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의 분리가 일어날 수 없다. 내가 예수를 놓는 일은 있지만, 예수가 나를 놓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믿을 때만 붙잡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리에 갈 수 없다. 우리의 존재는 값이 없어질 수 없고 존재가 무너질 수 없다.

그러면 왜 죄와 사망의 법이 이긴다고 기록했는가?

실제로 지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윤리적 법적 승리의 상태라고 기대한다. 잘못을 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예수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그 수준이 어떤가는 다음 문제이다.

세상의 법은 죄를 지면 벌한다. 구금하거나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학교에 있다면 공부를 안 했을 때 매를 때릴 수는 있어도 죽이지는 않는다. 학교는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곳이다. 그러니 벌이 아니고 격려이다.

가정으로 오면 더 하다. 가족은 죽을죄를 지었어도 버리지 않는다.

너 나가서 죽어 버려. 그래서 나갔더니, 그런다고 진짜 나가냐? 이 나쁜 놈아!

성경은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잘못했을 때, 자책감에서 떨 때라도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너는 더 커야 해. 더 자라야 해. 더 훌륭해져.

예수를 믿어서 우리의 신분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 나는 놀아도 되는 것 아닌가? 얼마나 부끄러운 반응인가를 생각하라.

학교에서는 쫓아내지 않는데. 그럼 왜 학교를 가야 해?

부모와 삼촌은 어떻게 다른가? 삼촌은 속상해하는 데까지는 다그치지 않는다. 부모만 속이 상하는 데까지 다그친다. 부모는 죽어서라도 자식을 훌륭하게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로마서의 이야기이다.

너희는 이제 훌륭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속상해하시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다그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아니시고, 고아원 원장이라면 너희를 대충 살게 놔두셨겠지.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하시기 때문에 너희는 이제 잘 살아야 해. 너희는 훌륭해 져야 해.

(롬 8:14~17) 영광으로 가는 길에 왜 고난이 따라오는가? 훌륭해지라고 매질하시겠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는 훌륭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 인생에 고난과 눈물이 있는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안심과 평안과 형통이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수준에 이르려고 한다.

우리는 그 이상 가고 싶어 하지 않으나 하나님은 그 이상 가자고 하시고 거기서부터 고난이 온다.

(롬 8:18~25) 하나님이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수준은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우리에게 고통으로, 절망으로 버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성육신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를 땅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보내셨다. 무슨 일에 쓰려고 하시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삼으신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모든 족속에게 보내신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오시지만 죄인들의 손에 죽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손에 죽어 나가는 것 같은 인생을 산다.

(3) 우리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 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놀린다.

예수를 믿으면 평안해진다며?
예수를 믿으면 기적을 행할 수 있다며?
이 밥으로 볶음밥을 한번 만들어 봐.

이런 놀림에 일일이 답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놀림의 대상인 건 사실이다.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못났는지를 봐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예수께서 왜 침묵하셨는지를.

빌라도가 물었다.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이냐?
정당한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답을 하셨다. 그렇다.

세상이 묻는다. 너는 진심으로 예수를 믿느냐?
그렇다. 왜 믿느냐? 설명이 좀 복잡하다.
너도 철이 들면 알게 될 거야. 진지하게 답을 해야 한다.

백 살에 얻은 이삭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하나님. 그럴 거면 왜 이삭을 주셨어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아내고 이삭을 내놓은 아브라함의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답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놓으라고 할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한국교회의 신앙 수준은 별로 높지 않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짧기 때문이다. 순교와 부흥까지밖에 못 했다.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에 답을 할만한 실력을 키워야 한다.

현실적인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여 순탄한 삶을 사는 것이 보상이 아니라, 기가 막힌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손에 죽는 자리까지 가심으로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증명하고 계신다.

기적과 초월과 높음의 신이 아니다. 가장 억울하고 가장 처참한, 가장 아닐 것 같은 자리에 내려오셨다. 예수님이 당하신 조롱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항상 있다. 아니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한다. 예수 믿어서 얻은 게 이게 다야?

그때 우리는 내가 빌라도 앞에 섰구나, 라고 여겨야 한다. 이제 내가 십자가 만, 지면 되는구나, 라고 기뻐해야 한다.

쉬운 신앙의 길로 가지 말라. 형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길로 가지 말라.

다. 결어

(1) (엡 4:13~16)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쉬운가?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 쉬운가? 자신이 오시는 것이 쉽다. 자신이 죽는 것이 쉽지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다. 부모는 못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놓으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우리 손에 죽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히 5:8)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이신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신다. 조종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다.

우리에 대하여 예의를 지키며 우리의 조롱과 배신과 핍박에 답하셨다. 겁주지 않으시고 사랑한다. 라고 답하셨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실력이, 장성한 분량이, 우리에게 보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 일이 처음이 아니라 성경에 수많은 증거가 있다. 이것을 이루어 내는 놀라운, 멋진, 존재가 되기 바란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구나,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목적하셨구나, 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란다.

【기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우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그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의 모습을 내 인생에 채우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에게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