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2) (왕상21:17~29)
2021. 12. 26. (일)
박 영 선 목사

1. 내 용
가. 서론
(1)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린 여러 왕들의 역사적 기록이다. 모든 왕들은 결말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 혹은 여호와께 불순종하고 악하게 살았다, 라는 간단한 평결로 나뉜다.

또 다윗의 뒤를 따른 자와 여로보암의 뒤를 따른 자로 나뉘는데, 여로보암의 뒤를 따른 자라는 표현에 아합이 추가되게 된다. 여로보암과 아합의 길을 걸은 자라고 하여 극히 악한 왕을 나타낸다.

(2)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열왕기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조로 아합의 악하고 못난 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아합은 여러 가지 악을 행했지만 조금은 이상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여호와를 믿는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고 엘리야마저 죽이려고 했다.

또 왕궁 주변에 있는 포도원이 좋아 보여서 정당한 거래를 통해 사려고 했으나, 그 주인이 하나님의 법도에 자신의 땅을 팔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거절을 하자, 전전긍긍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부인 이세벨이 그 문제를 해결했다.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하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합이 기분 좋게 포도원으로 뛰어가다가 엘리야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대뜸 이런 말이 나온다. 나를 대적하는 자, 엘리야 너냐? 또 너구나? 그렇다. 너는 네 죄로 죽고, 네 아내도 죽고, 개들이 너희들의 피를 핥을 것이다. 무서운 저주를 예언한다.

그러자 아합은 마음이 움찔해져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베옷을 입고 겸비하게 행동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너에게 내릴 죄를 네 자식 대에 가서 내리겠다, 라고 하신다.

이것을 보면 열왕기는, 쉽게, 누구는 착했고, 누구는 악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왕들의 실제적인 인간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엘리야가 대표하는 것과 아합이 대표하는 것을 대비시켜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 본론
(1) 아합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25절처럼 줏대 없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아합은 자신의 의지가 강하지 못했고, 헛된 일에 부추겨지는 대로 끌려다닌 사람이었다. 소심하고 마음이 여리고 연약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누구를 악한 자라고 할 때는, 그에게는 마음 깊이 악한 힘이 용암처럼, 우뢰처럼, 태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솟구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최고로 악했던 왕이 소심하고 연약했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 된다.

우리의 인생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소심하게 살고 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시간에 밀려서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가 아합을 여러 선지자와 여러 사람을 죽인 악의 화신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으로는 여린 사람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우리 마음은 섬뜩해진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음에도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로 악한 왕이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라는 생각 때문이다.

성경은 아합이 자신의 마음을 팔아먹었다고 기록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마음에 더더욱 의심이 든다, 아합이 자신의 본심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왜 성경은 아합을 그토록 악한 왕이라고 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팔아먹었다는 것은 이것이다. (엡 4:17~24)
여기서 이방인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다 허망한 사람들이다. 아합의 경우를 빌려서 말하면, 마음을 다 팔아먹은 자이다. 예수가 없으면 속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생명에서 떠나 있으니까, 생명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자라나거나 번성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소멸된다. 부패하고 썩고 낡아지고 없어진다.
19절에 방탕이란 단어는 도덕적 개념이 아니다. 줏대가 없이 가치 기준이 없이, 경우와 사건에서 판단 없이, 자신을 시간에 맡겨 버린 것을 방탕이라고 한다. 시간에 맡긴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버려두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합에게서 보는 악한 자의 극치는 악을 이루는 폭력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심, 자격, 생명, 선한 일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경우에 휩쓸려가 버리고 만다.

(2)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곧 이 증세를 보인다. 저들이 벗었음을 알고 두려워하여 동산 숲에 숨는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 한 것이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치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실력도, 목적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인간은 그때 두려워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 두려워진다.

아합이 저지른 모든 일들은 그가 방향도 못 잡고 목표도 잡을 수가 없는 상태에서 불안을 표현한 것인데, 그가 하필 왕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한 사람의 잘못이나 자폭이 자신에게 입힌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백성에게 입힌 것이다. 악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허망하며, 당황하고, 마음이 약하며, 실력이 없는 행동을 한 것이 고스란히 백성의 고통이 되었다.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그가 한 존재로서 가치 있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 존재의 근거, 존재의 핵심, 존재의 운명 같은 것들이 만들어 질수 없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 우리의 존재의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라면 못하실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큰 힘이 된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된다. 그리고 이 일에만 명예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방향을 잃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경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분명히 나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래서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나누는 것보다 크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설명할 때,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라는 것은 가장 간단한 설명이다.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면,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고 천당 갑시다, 가 된다. 한 단계 더 간다. 지옥 가지 말고 천당 가는데 살아생전에 주를 위하여 쓸모 있는 인생이 됩시다. 여기까지가 거의 모든 성도가 가지고 있는, 신자로서의 자기 이해이다.

성경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것보다 하나를 더 가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했던 목적을 완성하려고 하신다고 가르친다.

창세기의 부끄러움은 지옥에 가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죄인된 현실에서의 부끄러움이다. 이 부끄러움을 지우면 명예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을 지우면 정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명예는 부끄러움과는 반대 방향으로 실력과 내용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정직이라는 것도 거짓말에서 돌이켜 정직에 해당하는 책임있는 고급한 길로 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가치로부터 빗나가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아들로 우리를 다시 빚어, 원래 창조의 목적을 이루게 하셨다, 는 것을 알아야 하는 종교이다.

그러니 순종이라는 것은, 불순종을 지워버린다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자신을 붙들어 매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일이다. 안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순종일 수는 없다.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잘해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회개이다. 이것은 쉽지 않은 신앙 현실이다. 잘한다는 것은 간절한 소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기에 어렵다. 순종이 없다면, 그는 헛된 것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3) 열왕기 아합 왕의 역사에서 보는 엘리야가 다른 선지자들과 다른 것은, 그에게는 자발성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엘리야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신이 뛰어나간다. 갈멜산의 전투도 그것은 하나님이 명하셨다기보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구한다.

하나님만이 이 백성들의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십시오.

이렇게 엘리야는 불순종을 넘어 순종의 자리로 와 있는 것이다. 아합은 순종을 할 곳이 없었다. 그는 이미 자기를 팔아먹었다. 그는 무력감과 공포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왕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었으니, 너희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예수께서 돈을 주고 새로 사 오셨으니, 너희는 순종하는 이 명예로운 길을 가라, 라고 한다.

이것은 안 가면 지옥에 가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적이나 사건으로 증명하는 게 아니다. 인간성을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인성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예수가 없는 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파괴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초대이다. 빈 캔버스를 주고 네 마음대로 그려봐, 피아노를 주면서 네 마음대로 연주해 봐, 라고 한다. 물론 명작을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놀라워 해야 한다.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지혜를 준다.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려면, 바이올린을 집에 사다 놓고 아이에게 만지지 못하게 하다가 아이가 간구하게 되면 만지게 하라는 것이다. 그 후 연주를 해도 처음에 무척 짧게 해서 아이가 욕심이 생기도록 유도하면서 재미를 붙이게 해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를 소개할 때,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거나 요구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배짱이 좋은 신자가 된다. 나는 어떻게든 천국에 가는데, 뭐.

다. 결어
(1) 고급한 기회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자랑과 명예를 알아야 한다. 인생이 영웅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일상과 소소한 반복 속에다가 기적을 담으신다.

아합은 유별난 마귀가 아니다. 예수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다. 예수가 있다면 언제나 위대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얼마나 열려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뛰어갈 필요는 없다.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면, 그 영웅과 못난 사람을 대조하여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책임을 다한 것처럼 자신을 속이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했지만, 구함을 받은 백성들은 이순신 장군만 생각하면서 울고 있을 수는 없다. 군인들이 피 흘려 지킨 것은 무엇인가? 국민과 가정과 국가이다. 그 속에 담는 하나님의 무한한 약속들이 모든 신자들의 삶 속에 감사와 찬송으로 녹아난다.

(2)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시 1:3~4)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매우 다르다.

잘못을 지우고 만족하지 말자. 하나씩 더 해 나가자. 이것이 매일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발전하고 크고 자랑하고 감사할 것이 많은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각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나 하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인생을 사는 자가 가지는 기적과 찬송과 자랑을 우리 모두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인하여 이 세상이 구원받고 소망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