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 (왕상3:3~15)

2021. 8. 8.(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열왕기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저에게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엘리야, 엘리사를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있었고 어떻게 다윗왕이 후대의 좋은 왕과 나쁜 왕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는가도 알고 싶었다.

아시는 대로 정말 다윗은 내세울 게 별로 없다. 우리야 장군의 충정과 우직함은 다윗의 교활함과 충분히 비교가 되고, 다윗은 악인의 상징이었다. 그런데도 사무엘서는 계속해서 다윗 편을 들고 있다.

(2) 왕자 암논이 누이 다말에게 일으킨 사건을 보고 받고도 다윗은 심히 노하기만 했다. (삼하13:21)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도 벌이 너무 약했다. 그 결과를 다윗은 그대로 받게 된다.

노년에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인구 조사도 감행하여 벌을 받았다. (고통은 백성들이 당했다.)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이 은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고 기준으로 삼는다. 열왕기에서 다윗 이야기를 목사님께서 얼마나 하실지는 모르나 기대가 된다.

(3) 이번 설교에서 솔로몬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셨다. 덕분에 솔로몬을 머릿속에서 개운하게 정리했다. 풀리지 않았던 숙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 생각, 그래도 솔로몬은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지혜로 살아온 사람 아닌가?

목사님은 한마디로 답을 하신다.

솔로몬의 지혜는 순종으로 가지 않고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쓰였다.

2. 내 용

가. 서 론

(1) 솔로몬왕은 열왕기상 22장과 열왕기하 25장 등 모두 47장 중에 2장에서 11장까지 소개된다. 성전건축과 부와 외교력, 국방력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왕으로 나타나 있다.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성전을 짓는 일이나 부를 쌓는 일이나 국력을 확대하는 일들은 전부 우리의 소원과 일치하지만, 바벨론까지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서 자신들 국가의 역사를 쓰는 후손들에게는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탐탁할 리가 없다.

솔로몬을 흠잡을 필요가 없다 해도, 포로인 우리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냐 하는 현실 때문에 솔로몬의 치적을 자세하고도 길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 소개마다 어떤 원망과 원한이 묻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열왕기는 왕들의 치적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다윗의 길을 따랐다, 또는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나누고 있지 솔로몬의 길을 따랐다고는 소개하지 않는다.

솔로몬은 성경적으로 모범이 될만한 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솔로몬을 늘 부러워한다. 말할 수 없는 부자, 말할 수 없는 권력을 가졌고 지혜로운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질문 앞에 백성들을 가르칠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놀라운 왕이었다.

(2) 그러나 이런 지혜는 그 후에 보면,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을 모범적인 형태로 열매를 맺기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정치 경제 국방 외교 이런 쪽으로 지혜가 소모되고 마는 것을 본다.

아마도 솔로몬은 이런 변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 1장에서 다윗의 아들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임을 천명하는 사건부터 만난다.

그는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이고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는 아들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솔로몬보다 연배이고 자기가 왕권을 이어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당시에 최고의 실력자들인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의 지원 속에 그가 왕이 된 것을 국민들 앞에 선포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와 나단의 충고를 듣고 급히 솔로몬을 왕위에 앉혔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이 되자 가장 시급했던 것이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요압도 죽여야 했고 사울 왕가에 남아 있는 잔존 세력의 대표인 시무이도 죽여야 했다. 아비아달 제사장은 고향으로 유폐를 시켰다.

이것이 솔로몬이 할 수 있는 변명일 것이다. 솔로몬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왕권이 든든히 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강대국들 사이에서 나라가 생존하려면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솔로몬은 신앙의 모범은 세우지 못했지만, 인간적인 욕심은 만끽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잠언이나 전도서에서 그의 후회를 듣는다.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나. 본 론

(1) 솔로몬의 치적과 솔로몬 개인의 위대함, 그러나 아쉬움 같은 것들이 뒤에 오는 왕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뒤에 오는 왕들은 솔로몬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 솔로몬 같은 영광, 솔로몬 같은 권력, 솔로몬 같은 명예를 따라갔다.

이래서 다윗의 길을 따른 자가 거의 없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받아 주시지 않았는가?

그가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네가 이것을 구했기 때문에 내가 부귀영화도 네게 주겠다, 라고 크게 축복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솔로몬의 생애를 보고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든 실패의 시작은 사울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고 그는 제비뽑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선택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폐위되었다.

아말렉을 쳐라. 진멸해라. 가축도 남기지 마라. 듣지 않았다. 사무엘이 꾸짖는다.

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이것은 다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아낀 것이다, 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벼락같은 말씀이 떨어졌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불순종하는 것은 거짓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다. 무서운 질타이다.

솔로몬의 지혜는 순종으로 가지 않고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쓰인 것이라는걸,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성전을 지은 일은 대단한 일이다. 성전의 값지고 찬란한 것들 속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뒤에 와서 알게 된다.

(왕상3: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성에 데려다 가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솔로몬은 시작부터 바로의 딸을 데려온다. 이유는 있다. 약소국인 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애굽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솔로몬의 지혜가 이상한 곳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혜를 가진다는 것과 순종한다는 것을 어떻게 결부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솔로몬을 읽으면서 이것을 의문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이 지혜인가?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 지혜는 현실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명분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따르는 것이다. 매일 매일의 도전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순종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사사기의 역사와 열왕기의 역사에서 보듯이, 또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반복한다.

긴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편에 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긴장을 요구하며 쉽지 않은 물음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지혜는 어떻게 쓰이는가?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이 지혜인가?

(2) 지혜의 어려움과 순종의 무게는 하박국 선지자가 잘 보여주고 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조국의 패망이 빤히 보이는데 당시의 권력자들과 사회적 지도자들은 불의를 행하고 있었다. 강포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하박국은 여기에 불만을 터뜨렸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벌을 내릴 것이다. 내가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 이 악인들을 잡아가고 죽게 할 것이다.

하박국은 또 묻는다. 잘못한 자들만 벌하셔야지 나라를 뭉개버리시면 의인들까지 공연히 벌을 받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보상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억울하고 그것은 당황스러운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는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지금, 순종을 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선택의 여지가 없고, 주변이나 과거의 경험을 돌아봐도 믿음을 지킬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언제나 시험은 그전에 왔던 것보다 강도가 높아져서 오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결했던 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누적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순종은 우리에게 너무나 어렵다.
(고전2:1~5)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바울은 말한다.

나는 그때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준비가 없었다. 나는 그냥 보내심을 받아 갔을 뿐이다. 그리고 가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이다. 둘이 손을 잡는 현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억울하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억울한 게 정상이다.

억울한 것을 보복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솔로몬은 될 수 있지만, 다윗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른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벌주고 바벨론으로 끌고 가실 때에 선지자 예레미아를 세워 외치게 하셨다.

너희 곱게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가라.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을 듣고 모두가 기절하고 뒤집어졌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에게 항복을 하는가? 싸우다가 죽으면 죽었지.

포로가 되는 것이 싫어서, 여기서 싸워서 여기서 결말을 보겠다, 가 우리에게 오는 시험이다. 미래로 나아갈 힘이 없어서 오늘 끝장을 내자, 운명을 결정하자, 나 고민하기도 싫고 더이상 화를 낼 마음도 없다. 하나님 오늘 끝을 냅시다. 저는 이 삶을 반복하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무엇을 한 것인가? 그는 성전을 지어서 미래의 걱정이나, 긴장을 묻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유명한 순교기와 부흥기를 거쳤다. 한때 순교가 최고였던 시기가 지나가 버렸다. 왜 그런가? 순교가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 에서 증언을 보자. 나는 순교를 거부당한 죄인이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오늘 여기서 죽으면 책임이 끝나는 거잖아. 물론 살아 있으면 책임이 반복적으로 온단다. 이것을 순종해. 살아서 책임을 반복적으로 감당해.

안이숙은 살아남았고 좋은 마음이 아니라 억울한 마음으로 책을 썼고 순교 시대를 우리에게 증언했다. 그리고 부흥기가 왔다. 기억하는가?

부흥사가 강단에서 기침만 해도 은혜를 받았던 때를 기억하는가? 천국이 멀리 있지 않고 지금 내 안에 있다. 이 감격이 우리에게 다 있다.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있다. 그다음을 살아야 한다. 감격이 답이 될 수 없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내가 가졌던 감격은 거짓이라는 말인가? 내가 가졌던 확신은 왜 지금은 맥을 못 쓰는가? 누구의 탓인가?

이것이 신앙의 현실이요 오늘이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결국 승리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지키고 그 운명을 예수 안에서 확정하셨다. 나는 이것을 기억하고 사자 굴에 들어간다.

순교를 각오하고 들어가는 결심, 감동으로 물결치는 황홀이 아니라 답이 없는 곳을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열왕기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 결 어

(1) 우리는 왜 솔로몬을 부러워하는가? 솔로몬이 결론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성공과 자랑으로 나가는 도상에 우리가 서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전2:6~9)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예수를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우리의 생애도 이 귀한 영광과 복의 자리로 가기 위해 오늘 울어야 하고, 오늘이 끝장일 것 같은 길로 인도받고 있다.
여기가 믿음이고 여기가 순종이다.

(2) 순종이란 자폭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권능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강력한 행동이다.

이런 중요한 문제가 우리에게서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밤낮 한탄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비난하다가 변명하다가, 가장 부끄럽게 도망가다가 비겁하게 마감한다. 솔로몬에 대한 성경의 판정은 그것이다. 그는 비겁했다. 그는 약삭빨랐다.

솔로몬을 꾸짖는다고 여러분 마음에 불쾌감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성경이 하려는 얘기를 모르는 것이다.

솔로몬은 잘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약속대로 하셨지만, 그는 후손들에게 아무런 교훈도, 아무런 귀감도, 영향력도 남기지 못했다. 그의 뒤로 왕조는 남북으로 찢어졌으며 그 이유는 솔로몬 때문이었다.

남 왕조 유다와 북 왕조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고 이웃 나라들에게 다 먹혀서 그 찬란했던 성전은 훼파되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게 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살게 하시는 우리의 정체성과 운명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 만세 전에 준비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드러나는 현실을 우리는 밤낮 부정한다. 그렇게, 믿지 않는 것보다 못한 잘못을 우리가 반복할 필요가 있는가?
누가 강요할 수 없다. 각자가 자신의 생애와 현실을 돌아보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으로 자신의 생애를 새롭게 하시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몸소 십자가를 지신, 몸소 죽음을 감수하시고 거기서 부활하신 영광과 영생과 권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쩔쩔매는 것은 당연히 믿음이 부족한 탓일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오늘 나누었으니 우리를 솔로몬 같게 하지 마시고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의 자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인생을 이기고 진정한 승리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우리 교회 2021년 언택트 전교인 여름 수련회가 8월 10일 시작해서 8월 14일에 끝이 났다. 열심으로 준비해 주신 여러 교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2) 나는 당구 얘기를 하려고 한다. 혹시 남당회를 아시는가? 남포교회 당구모임이다. 수련회 일정에 맞추어 8월 12일에 남당회 당구대회도 열렸다. 경기는 복식 경기였고 이헌기 집사와 이종욱 집사 조가 우승했다. 축하드린다.

오랫동안 목사님은 교회 주변과 좀 멀리까지도 신천 당구계의 왕자이셨다. 천하의 박영선 목사님과 당구? 조합이 안 맞는다고 말하는 분이 있는가? 전혀 당구를 모르는 말씀이다.
목사님은 소위 말하는 천 다마였다. (천은 우리말이고 다마는 당구공을 뜻하는 일본 말이다.) 설명은 필요없다. 목사님 시대에서는 당구 인구 10만 명이 있을 때 오백 다마가 10명이 안 되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목사님은 가끔 왜 저렇게 치시지, 라고 생각되는 공을 치신다. 물론 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치고 나야 안다. 와, 저런 길이 있었어? 모두 감탄한다.

(3) 나는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종종 그렇게 감탄할 때가 있다. (물론 두 대상물의 수준은 다르다.) 여기가 이런 말씀이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하는 일정을 소개한다.

수요일 정오 12시에 신천에서 목사님 만나 점심 먹기. 1시부터 당구 치기. 6시까지 계속 치기. 6시에 목사님과 저녁 같이 먹기. 저녁 7시에 수요예배 참석하기. 1시간 동안 기도하기. 8시부터 예배드리기. 목사님 말씀 듣기. 본당을 나오면서 목사님과 인사하기. 은혜가 넘쳤습니다. 목사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