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져서 피했지만 문경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과거 길이 된 새재의 첫 관문이다. 사진=한문화사.

[⑫문경새재길] 맨발로 걷기에 최고인 길이 있습니다. 바로 문경새재지요.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어려운 고개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아주 다정하고 다감한 길이지요. 다정다감이란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걷다 보면 다가옵니다.

문경새재는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이지요. 조령鳥嶺이란 말이 곧 새재를 말합니다.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 대로상의 재 중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습니다.

새재는 지명유래가 몇 가지 있습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지명유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사이재가 새재로 변이되었다고 하는 유래와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합니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 길이란 표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면 옛 길이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 1414년에 개통된 관도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하는 길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대로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로막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나누는 지역을 잇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길은 소통을 위하여 존재하고, 길은 행동하는 자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문경새재가 다른 길보다 주목을 받은 이유는 편리성에 있었겠지만 과거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다가오는 반가움 같은 게지요.

문경聞慶이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지요. 과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경사란 과거급제였겠지요. 과거를 보는 사람들에게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두 길이 있었지만, 그 이름이 모두 낙방과 연관됐기 때문입니다. 추풍령과 죽령이었습니다.

추풍령에선 추풍낙엽이란 말이 연상되고 죽령에서는 대나무처럼 쭉쭉 미끄러진다는 느낌이 들게 되어 두 곳을 피하고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합니다. 남아가 태어나 뜻을 세우고 세상에 펼치는 일의 첫 관문이 과거였습니다.

출세란 말도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뜻이거든요. 모든 길은 과거를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요. 개인의 입신양명보다도 가문의 생존과 지속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거든요.

개인과 가문의 영광과 몰락이 달린 일생의 중요한 사건인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서 추풍령이나 죽령을 택하지 않고 굳이 문경을 택하게 된 사연을 이해할 듯합니다.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은 지금도 좋은 길로 남아있습니다.

    

문경새재가 도로포장이 되지 않고 맨발로 걸어도 좋은 옛길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참 묘한 일이지요. 길은 넓히고 굽은 길은 직선화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라니 더욱 그렇습니다.

젊은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3년 동안을 보냅니다. 첫 부임지였습니다. 의욕과 패기 그리고 순수함을 지닌 나이였고 그러니 문경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문경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재를 포장해달라는 지인들의 민원을 들어주지 않고 비포장도로로 보존하도록 지시해서 팔자가 바뀐 길이라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발보다는 보존하는 게 좋겠다는 견해를 내놓고, 국민관광지 경북 제1호가 되게 하고 이어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여, 문경새재는 자연보호법과 문화재보호법을 적용받는 곳으로 묶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6년 국무회의에서 강한 어조로 지시를 했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 보름에 5시경 출발해 조곡관이나 조령관까지 갔다 돌아올 때쯤 되면 보름달이 뜨는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길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달빛 쏟아지는 마사토 길은 환상 그 자체입니다.

문경새재 길은 조선 태종대에 큰길로 열렸지만 지금 국방의 요새로 관문을 설치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고 나서였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격이었지요. 아쉽게도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눈을 즐겁게 하는 용도로 남아있습니다.

3개의 관문이 있는데 볼만합니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지요.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였지요. 순서대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3개의 관문과 원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서낭당과 각종 비석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습니다.

훗날 이곳 새재 길을 넘나들던 과거 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며 돌 하나씩을 올리니 이들도 모두 과거급제를 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책바위 위에 얹힌 부처상인지 보살상인지 아니면 민간신앙의 표시인지 모르는 석상이 있습니다. 귀엽기도 하고 신성스럽기도 하니 한번 들러보시기를 바랍니다.
    
새재 정상에 있는 제3관문.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다정하고 다감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