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가(聖歌)의 유래는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한다.

원래,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B.C.5C-A.D.4C)에는 그들의 신(아폴로신, 디오니서스신, 바카스신,제우스신 등)을 위해 리르나, 아울로스, 하프 같은 악기를 가지고 찬양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음악은 주로 국가적 행사나 체육대회, 전투나 사냥을 위한 비교적 실용적인 생활속의 음악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성가의 의미와 존재가 제도적으로 나타난것은 A.D. 2세기경 유태교회에서 연주된 여러가지 찬미가를 통해서 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지방에서는 갈리아식,스페인지방에서는모자라베식, 밀라노 지방에서는 암브로시우스식, 영국에서는 세럼식이라는 예배형식이 있었고 이것은 그 지방 특유의 선율과 가사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그 지방 특유의 관습과 언어, 그리고 민속 선율이 그 지방의 예배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은 상식적이다.  다만  A.D.4세기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를 지금의 터어키 수도 이스탄불까지 확대하면서 성가의 본격적인 정비를 시작하게 되고 성가는 점차 교회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게 된다.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모든 성가를 라틴어로 부르며 로마의 예배형식을 전 로마의 영토에서 따르도록 강제하였다. 본격적인 기독교 시대를 열게 되었고 성가의 엄숙함과 정중함이 중요시 되었던 것이다.

AD.6세기경 그레고리우스 교황1세(A.D.590-604년 재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직접 성가를 만든다.  기록에 의하면 어느날 흰 비둘기 한마리가 공중에서  교황의 어깨위로 날아와 “구-구-구-구-” 노래를 부른다. 이에 교황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게되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비서가  파피루스에 점을 찍어 음 높이를 기록하게된다.  이 노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전해주신 선율이라 믿었고 그후 교횝법으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선율(固定旋律:Cantus Firmus)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전통은 14세기 까지 지속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후 이 노래들에 직접 라틴어 가사를 붙여 미사음악에 사용하게 되었고 이를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에서 부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성가의 특징을 보면 몇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이는 중세가 끝나는 14세기경까지 매우 강력하게 교회법으로 지켜져 왔고 이러한  원칙들이 18세기 고전주의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은 고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의 규칙을 설명한 것이다.

첫째, 이 성가는 라틴어 가사로써 무반주 남성의 목소리로만 부르게 하였다. 여기서 특히 무반주로 부르게 한것은 인간이 제작한 악기가 아닌,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찬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것은 ‘왜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는 성가를 남성만 부르게 했느냐, 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여러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설이 자주 거론된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유혹이다. 성스러운 교회안에서 찬양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찬양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의 음성이 교회안에 울려퍼지는 것에 대한 성직자들의 걱정때문에 남성만이 부르게 했다는 설이 있고, 성경에 기록된 예배의 집행자로서의 권위와 당시의 남성 중심문화의 일단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아뭏든 ‘남성만이 찬양에 임할수 있다,는 이 원칙은 그후 700년동안 서구 유럽의 교회에서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원칙은 여러가지 교회의 비인간적 관례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남성 소프라노(Castrato)”제도이다. 어릴적에 남성의 상징을 거세하여 변성기에도 여성의 목소리를 유지하게하는 제도인데, 이 제도는 중세 말기 교회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이 아이는 어른이 되고 죽음에 이를때까지 교회에서 모든생활을 보장해주었고 보수도 넉넉하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비 종교적이라하여 16세기경 사라지게 된다.  

그럼 왜 남성 소프라노가 필요해 졌는가? A.D.11 세기경 교회성가는 단선율의 즉흥적 형태에서 그레고리성가를 바탕(Cantus Planus)으로 한 새로운 선율의 붙임형식이 유행한다. 즉, 기존의 그레고리오 성가(이 선율은 절대 바꿀수 없음)위에 빠르고 장식적인 선율을 덧붙여 화음감을 주게되는데 이 선율들은 자연히 기존 선율보다 높은 음역에서 움직이게 된다. 이 높은 음역을 노래할수있는 사람이 필요해 졌는데 여성이 할수는 없기때문에 변성이전의 소년들에게 훈련을 시켜 이 부분을 감당하게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 소년들 역시 이내 변성기에 접어들고 높은 음을 낼수없게 되자 ‘거세’를 생각하기에 이른것이다.

오늘날 ‘비인소년합창단’ ‘파리 나무소년합창단’과 같은 소년합창단은 이러한 남성합창단의 훈련과정에서 이들 남자 어린이들의 역할이 팔요해 졌기 때문이다. 1740년경의 비인소년합창단에는 우리가 잘아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이 노래했고,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도 1760년경 어릴적부터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소년 성가대원과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음은 이러한 전통이 18세기 까지 잘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50년경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전통적 성가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다루기로 한다.

2010.6.4.

남성성가대 지휘자 송진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