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시편 23편

시편 말씀은 언제 읽어도 언제 묵상을 해도 늘 우리 마음에 풍성한 위로와 잔잔한 기쁨을
주는 놀라운 시편 말씀입니다.

전 이 시편을 최근에 보면서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가지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시편을 통한
답이 주어지겠다 라는것을 보게 됩니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인간으로 이땅에서 태어나 존재하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는 가운데
서 이제 젊은날, 바쁜 시절에는 생각없이 이러 저러한 좀더 근본적인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
을 구하는 그런 상황에 대한 어떤 여지가 없이 바쁘게 내몰리는 상황에서 자주 잊고 살지만
문득 인간으로서 또한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던져지는 자신에게나 자신에 속한 공동체나 또
인간 전체를 향해서 들려지는 질문이 누구에게나 선뜩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선명한 어떤 명제로 늘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과 어떤 내용을 다룰지라도 상황과
여건 속에서 여러 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동일한 본질적인 뒷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죠.

요약한다면 나는 누구인가 좀더 확정한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
을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산다는게 무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말하는 거죠.
세 번째는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생의 참된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근본적인 철학적 명제이기 때문에 사실은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어떤
철학, 도덕 법률 이모든 것을 융합해서 포괄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
을 줄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된다고 보여지는데,
명제적으로는 철학에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끊임없이 부지런히 탐구하는 주제 이지만
철학만으로는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우리의 경험입니다.

불교만큼 또한 인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와 고민이 많은 그런 분야는 없는 것
같습니다.여기서 특히 분야 라고 하는 이유는 사실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휴먼 철학에
가깝죠.종교로서의 갖춰야될 본질적인 요건들을 사실은 불교 자체로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단지 인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아주 깊은 끝없는 탐구와 어떤 연구 이런 것이 불교의 특색
이기 때문에 어떤 사상보다도 어떤 철학보다도 아주 심오하고 깊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결국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불교와 비교해볼 때 어떤 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는 굉장히 얕아보이고
깊지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결국 신앙을 통해서 우리 성경적인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근본적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을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시각적인 사고의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라는 점에서 우리는 특별히 특권을 누리고 있는 존재들
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성경적인 면에서 세가지 질문에 다한 답을 본문을 통해서 보게되면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고 선언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죠.

나는 누군가 라고 할때 나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양이다. 이것은 좀더 내용을, 깊이를 좀더 확장
한다면 나는 피조물이다,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계시다 라는 점, 그분이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시요,
나의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아버지시요, 나는 그의 자녀이고 아들이고 그의 종으로 신하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존재다 라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선언해주는 표현
입니다.

이목자와 양의 관계가 얼마나 목가적이고 푸근한 이미지를 전해 주는지는 문학적 상상력, 문학적 수양
이 풍부한 분들은 얼마든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것입니다.

저는 그런 재주가 없어서 멋있게 이야기를 못해서 아쉽지만 여하튼 양을 끝까지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선한 목자와 인도와 보호 속에서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누려가는 한 마리양, 2절에 보면 그양의
상태가 어떤것인줄을 아주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인간으로서는 너는 누구냐 사람은 누구냐 인간은 무엇이냐고 할때에 그 정체성
을 규정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결코 능동적으로 자가 발전적으로는 규정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언제나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규정이 됩니다.

달의 존재는 달빛은 그 자체로 스스로 발산되는게 아니죠. 햇빛을 통해서 그 달빛이 발산되는거죠.
그처럼 인간은 창조주라는 하나님의 존재앞에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으로
자신을 지은 절대자, 지은 창조주를 전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창조주를 부인하면 결국 우리자신도 우리 존재를 규정할 근거를 잃습니다.
인간의 인간됨, 인간의 존엄함, 인간의 고귀한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 존재가 부인되면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서도 참다운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라는 것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전제하고 우리인간의 정체성은 확인이 됩니다.
누구도 인간스스로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좀더 쉽게 말하면 누구나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없이 태어난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우리는 부모를 전제하고 부모에 의해서 태어난 자들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 스스로의 존재를 만들어 내거나 스스로의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데에
단 눈꼽만큼의 기여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냥 존재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인간은 존재된 대상이죠.이것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게되면 인생의 의미나 목적이라는 것을 좀더 쉽게 분명해 질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라는 것이 무엇일까요.4절에 보게 되면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3절에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하나님의 함께하심, 하나님의 임마누엘 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사실에 진정한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하나님이 우두커니 내옆에 서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3절부터 5절의 내용은 이부분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무엇인지 그야말로 그냥 자연 상태에서는 스스로 범죄하여 영원히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분의 양으로 그분의 자녀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펼쳐
가신다. 우리를 통해서하신다, 그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우리를 그분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손길로 사용하신다, 라는 의미에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루어가는 그런 존재들로 쓰임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분의 자녀와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심받아 그분의 뜻을 펼치시는 일에 쓰임받는
존재가 아니라면 앞에서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한 그런 불신자들처럼 우리는 그야말로 이땅에 존재하는
다른 생물 동물 미생물과 아무런 가치적인 차이를 누릴수 없게 된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대상으로서 우리가 우리 인생을 자리매김할때에 우리는 사는 이유와 그 근거를 확인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점도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6절에 고백을 하죠.
내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이것도 임마누엘의 약속의 내용이죠. 우리를 통해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 라는 거죠.

내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표현은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을 압축해서
말씀한 내용,따라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내 평생에 나의 모든날 동안에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예수믿고 하늘 나라 갈때까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또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이후로부터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에서 영원한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그분과 동거동락하는 그 모든 영원한 영속하는 시간까지 포함
해서 내평생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모든 내가 하나님을 알고난 이후에 모든 남은 시간과 그 영원한 세월속에서 하나님이 늘 나를따르신다,
늘 나와 함께 하신다 늘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그손길에 내가 의지를 가지고 거룩한 의지를 통해서 물론
이것도 하나님주시는 은혜지만 그 뚯울 펼치시는 일에 내가 기꺼이 동참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역사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받아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내가 온전히 쓰임받도록 나의 삶을 맡기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그분의 선하신 뜻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그 뜻을 분별하고 살펴서 하나님
의 위대한 손길에 의해 내 인생이 아름답게 온전하게 쓰이는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내가 나서서 동참한다
라는 것이죠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만,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하나님이 동행이라는 뜻은 동전의 앞뒷면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합니까 그분이 동행해 주시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의지
로는 그분과 동행할 가능성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위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동행할 수 있는 여지, 동행할 수 있는 위대한 특권과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라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앞에 서있는 신자의 책임있는 문제가 아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책임은
부담이 아니고 이것은 특권이고 영광이고 우리가 자원해서 취할 수 있는 영원한 권리이죠.참으로 하나님
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당연한 백성된 아주 자연스럽고도 본질적인 그런 반응이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생명으로 존재하면 생명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내가 살아있는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죠. 그저 우리몸은 내 생리현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름받은 우리 하나님의 임마누엘 속에서
그 약속 속에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누릴수 있다
라는것이죠.

물론 우리안에 죄성은 이것을 자주 혼돈시키고 잊어먹게 하고 그것을 간과함으로서 우리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부분이 왜곡되도록 또 그것을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또 방해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계속 맞서고 신앙의 의지로 거룩한 의지로 싸워야 되는 중요한 신자로서의 믿음의 투쟁이 늘 남아있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참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재 확인하는 또 다른 과정일 뿐이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일울
위해서 그분과 동행 한다는 것은 더없이 기쁘고 즐겁고 늘 영광스러운 일이 될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경험으로 올수 있지만 고난과 시련 고통 아픔 절망 과 낙심이란 실제적
인 경험으로 오지만 실제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그 모든 정황과 여건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귀하게 그분의 선하신 인도를 받아 쓰임을 받는 사실속에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과의 동행을
멈추지않을 수 있는 늘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남는 인생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우리는 그분의 목자되신
그분의 양으로서 창조주되신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분의 선한 일군들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특별한 존재
들로서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시는 일에 우리가 기꺼이 자원하여
거룩한 의지로 동참해 나감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위대한 주님의 귀한 종들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속에서

저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좀더 주님의 은혜안에서 더욱더 새롭게 그 인생의 내용들이 채워지고 우리의 삶의
좀더 분명한 목적이 분명하게 다시 조정이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그 선하신 목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도 확인이 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말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