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 브라더스

와이키키 브라더스!
저는 이즈음 어떤 위기감에 놓여 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고 초조합니다.
하루 종일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메우고 있습니다.
돌아서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잡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영화에서 당신들을 만났습니다.

‘한국 우수 영화 살리기’란 슬로건 아래 재 상영된 영화입니다.
하마터면 이 영화를 놓칠 뻔했습니다.
몇몇의 영화 관계자들이 자비를 털어 극장을 빌리고
홍보를 하여 다시 한 번 선보이지 않았다면
흥행 실패로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을 테니까요.

진주는 진흙 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고
저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의  한 부분을 깨우치지 못한 채
어제와 별반 다름없는 오늘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당신들은 밤무대의 4인조 밴드지요.
고교 시절부터 이미 음악적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한국의 비틀즈를 꿈꾸었습니다.
패기나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때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리라 자신했었지요.
아직은 젊음과 야망이 뜨거웠으니까요.

마음이 통하고 음악적 취향이 닮은 친구 네 명이 모여 밴드를 조직했습니다.
밥은 굶어도 음악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음악은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이었으며
가장 순수한 영혼을 추구하는 예술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길은 없습니다.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당신들이 무대에 서는 날은
여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환호성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때 동경의 눈빛을 보내며 열광하던 관중의 함성이
평생 이 길을 걷게 만들었던가요.

어느 한 사람의 심금을 울려도 가슴 벅찬 일인데,
무대가 떠나갈 듯 한 대중의 박수소리에 인생을 걸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아직은 미래의 삶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때까지가 행복의 정점이었을까요.

행복이란, 꿈이란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현실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와 길을 막아섭니다.

와이키키!
꿈과 낭만이 펼쳐지는 해변의 백사장,
하루 종일 파도가 넘실대고
야자수 그늘이 시원한 와이키키!
만인의 가슴을 쓸어 주고 보듬어 안아 줄
음악적 하모니를 추구하려는 고심 끝에 얻어진 이름입니다.

흐르는 것이 세월인가요.
세월이 흐르는 것인가요.
당신들도 지방의 나이트클럽까지 흘러왔습니다.
세월은 또한 꿈까지도 앗아갔습니다. 캄캄한 무대 뒤편,
삼류 악단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지요.

전설 속의 인물 비틀즈,
언제 들어도 신비롭고 감미로운 연주와
노래를 수없이 남긴 비틀즈의 꿈은 아직도 유효한 것입니까.
<In my life> <Girl> <Yesterday> <Let it be>를 열창하며
그들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꿈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사는 것이 너무 팍팍하고
힘에 겨워 잠시 접어 두었을 뿐,
지금은 눈앞의 현실을 위해 트로트와 뽕짝을 부릅니다.
거나하게 마셔서 헝클어지고
풀어진 취객들을 위해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밤무대라는 곳이 신선한 곳은 못 되지요.
도덕이나 질서가 흐트러져 방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질탕한 술과 안주,
자욱한 담배 연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주정꾼들,
끌어안고 당기고 흥청대는 군상들은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만취한 손님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차마 온전한 정신으로는 듣기조차 민망한 욕지거리를
순한 양처럼 받아들입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한 줄기 가느다란 소망과
음악을 지독히 사랑하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이 길도 급속한 세월의 변화에 밀려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최첨단 전자 시스템 악기들은
손가락 하나만 누르면 여러 사람의 몫을 톡톡히 해냅니다.
특별히 음악적 깊이가 없어도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젊고 참신한 세대에 밀리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그날 영화 속에서 당신들이 부르던 트로트
<내게도 사랑이> <골목길> <잊히지 않아요.>와
같은 가요들은 내게 전율을 느끼게 했습니다.

별 의미 없이 흔하게 들어왔던 대중가요가 온통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꿈과 사랑과 추억을
단숨에 내가 서 있는 자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무대에 선 당신들의 모습은 촌스럽고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반짝이는 블라우스,
짧은 바짓단,
어중 띤 머리 스타일.
그날 나는 당신들을 낯선 타인쯤으로 금을 그어놓고 살았던
마음 한구석을 들켜 버린 듯 하였습니다.

나와 비슷하지 않다고
외면해 왔던 당신들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정겨운 모습들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 한 편에 뚜렷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름 없고
초라하며
세월의 무게에 서서히 가라앉는 내가
바로 지금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친근하기 이를 데 없는 당신들이 부르는 유행가 가사는
절절히 가슴속을 파고듭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행복할 거야/
그리운 바람처럼 사라질까 봐/
이날을 언제나 기다려 왔어요.

얼음같이 차가운 구들장이 사람의
운김 덕을 보려는 기나긴 밤을 지나본 사람이
타인의 힘든 처지를 이해합니다.
어느 한 날 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막막한 절망의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은
또 그 입장의 형편을 압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구구절절한 하소연을 들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을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은
이겨내기 어려운 현실이 아니지요.
젊은 시절의 꿈이 삶의 무게에 눌려
스러져 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위로와 사랑과 추억까지 안겨줍니다.
인생의 덧없음과 쓸쓸함을 몸으로 겪어 낸 사람은
그 감정이 노래에 실려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이는 세상에 그리 흔치 않습니다.
오늘도 사회자가 당신들을 소개합니다.
“야간업계의 비틀즈,
한강 이남에서 가장 실력 있는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
장내가 떠나갈 듯   한 박수 세례를 받으며 당신들이 등장합니다.

무대로 오르는 당신들의 뛰는 가슴을 무엇에 비교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신선한 감격과
가슴 떨리는 순간은 평생에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힘내십시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들이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힘겨운 오늘은 좀 더 나은 내일과
서로 엇바뀌기도 하고 반동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하나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내가 겪고 있던 위기란
염려가 쌓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어진 오늘을 성실히 살았다면
내일은 그만큼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반면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고요.

세상사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와이키키 브라더스,
영화 속 당신들에게서 선사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그대들은 영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