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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독서모임에서 나누었던 <용기 있는 기독교> 독후감을 올립니다

                용기있는 기독교  -데이빗 웰스-

우리는 읽을 책을 선택할 때 우선적으로 제목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어떤 책인가 하는 전체적인 내용이나 방향을 짐작하기도 하지요.
이 책을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은 제목이 매우 애매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The courage to be protestant”
1장 맨 첫머리에서 바로 의문이 풀렸습니다.
개신교인이 되는데 필요한 용기가 아니라 개신교의 진리에 따라 사는데 필요한 용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웰스가 먼저 저술했던 4권의 책 신학실종, 거룩하신 하나님, 윤리실종, 위대하신 그리스도- 그 책들을 총망라한 책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포스트모던(후기현대)의 문화혁명시대에 놓여진 오늘날의 기독교를 바로 지켜내려는 저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저도 공감하면서 읽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난해에 읽었던 4권의 책들이 우리가 바라보는 산에 심어진 주요한 나무들이라면 이번의 책은 그 산 전체를 바라보는 느낌!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에게
나자신-남포교인- 한국의 기독교-나아가서 세계적인 기독교전체- 그 기독교의 흐름, 그리고 앞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어떻게 함께하며 나아갈 것인가? 하는 전체를 감히 바라보고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저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을 읽어가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포스트모던…>이었는데 처음에는 그 뉘앙스가 마음에 와 닫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다들 그러하지 않았을까 해서 그 의미를 먼저 나누어볼까 합니다.
AD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천년이라는 세월동안 중세가 이어집니다. 교회가 엄청나게 확장되지만 결국은 부패로 이어졌습니다. 15세기문화혁명인 르네상스가 그 시대정신에 새 옷을 입혔다면,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은 영혼에 새 옷을 입게 해 주었습니다. 근대를 여는 시작이었으며 그 이후 계몽주의사조가 이어집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현대라고하면 18-19세기를 지배해오던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습니다. 합리주의적세계관, 자연주의, 사실주의. 흑백논리로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주의사상은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개인이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20세기 들어서자 도전을 받기 시작하여 계몽주의가 상징했던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리는 새로운 문화사조가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름 하여 모더니즘인데 전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사상, 예를 들면 미술세계의 추상파, 전위예술,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시공을 초월하는 독백 등…  그러나 지나친 개인중심사상은 개인의 깊이는 있으나 소통과 공감을 형성 하는 데는 실패를 하게 되어 일부계층이 누리는 문화로 전락하게 됩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그에 대한 거부감으로 개성, 자율성,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대중성, 다양성의 실험을 중시하는 문화사조가 대두 됩니다 말하자면 많은 부분 모더니즘과 근간을 같이합니다. 부언설명을 하자면, 모더니즘(현대문화사조)에다 과거계몽주의의 대중성을 지향한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현대 또는 후기현대문화사조)인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던 신앙의 성격 – 주관적이며, 도덕과 무관한 깨달음을 강조, 고도의 자아 중심적, 심리적, 치료 중심적 그리하여 완전한 상대주의 진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믿음의 내용보다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가꾸는 문제로 생각합니다. 밖에 계시는(절대적 진리의)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거룩함보다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지금은 모든 가치의 원천이 되는 일이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보편적 의미에서는 등을 돌리고 사적이고 주관적인 의미를 향해 방향을 틀었습니다.
절대적 도덕규범은 사적인 규범으로 변화되고 직관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감정에 더 많은 무게를 두는 쪽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아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초월적인 지점이 내면으로 자리를 옮기는 심각한 상태로 변해감으로 인하여, 불변의 절대적 진리인 기독교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음을 저자는 개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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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복음주의의 3진영은 고전적복음주의, 마케팅교회그룹, 이머징(신흥세력)교회그룹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시사하면서 복음주의신앙의 시작과 끝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첫째진영인 고전적복음주의가 시작될 무렵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문화적으로는 모더니즘이 배경이 되어 있었는데 두드러진 특징은 교리에 대한 진지한 태도였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인 세상, 하나님, 우리자신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문화사조에 의해 조금씩 잠식당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기독교는 갈수록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치료적인 경험으로 축소되어갔으며 교리적 형식은 점점 위축되어갔습니다.
  결국 문화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몸담고 있는 교회들은 마케팅주의자들의  출현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기업의 마케팅전략이 교회에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학과 성경지식을 과소평가하고, 헌신은 간데없고, 무지하게 되고, 불편하고 어려운 교리보다는 치료받고 위로받는 교회를 원하게 됩니다. 자신이 거듭났다고 말하면서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비율은 점점 떨어져갔습니다. 더불어 성경지식의 감소는 기독교도덕의 붕괴현상을 가져온 커다란 요인임을 지적합니다. 교회마케팅과 복음전도를 결코 동일선상에 둘 수 없음에도 마케팅주의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사고파는 상품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우리의 욕구를 채우려고 사는 상품으로 축소시켜버리는 형국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에 따른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편승하는 잘못된 마케팅전략에 대해 일침을 가합니다.  그러나 현재 침체된 상태의 기독교신앙을 끌어올리려는 마음과, 포스트모던 문화에 적절히 관계하려는 자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얘기 하기도합니다.
  이머전트 그룹-마케팅복음주의에서 파생된 신흥세력으로, 복음주의 이전의 후기 보수주의와 후기 토대주의 성격을 띠며, 성경의 권위와 기능에 대해 다른 이해를 표방하며 더 느슨하고 덜 확정적인교리를 적용하는 그룹입니다. 즉 교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최소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구원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기보다 공동체적으로 체험하는 일에, 영원한 세계보다 보다 현재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약한 세력이긴 하나, 기독교를 대중문화에 맞추어 각색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복음주의사조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수명을 다했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미래가 불투명한 기독교의 현주소를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까에 대한 용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까지 비판적으로 글을 써나가야 했는지를 나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비판적인 진단만 있을 뿐 처방은 없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진리, 하나님, 자아,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자아>에 대한 장을 저는 조금 언급해 보고자합니다.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결국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에 새로운 세계관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자아가 모든 가치의 원천이 되어 자아를 추구하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기존의 개인주의가 내향적으로 돌아섰습니다. 자신의 내적잠재력을 발견하는 것, 자신을 존중하는 것, 자아발견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윤리적 규율을 개발하는 것이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향전환을 과감하게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마치 나자신을 두고 하는 표현 같았습니다. 내가 가장 회개해야할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 덕목-가치로의 변화
  . 성품-성격으로의 변화
  . 본성(하나님의 형상)-자아(생각, 직관, 정서, 의향, 역량, 적성 등으로 이 루                        어진 내면세계)로의변화
  . 죄책감(도덕적세계의취향)- 수취심으로의 변화(심리적세계에속함)
  이렇게 잘못 변형되어 가고 있다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기 위해서 우리자신을 과감히 버려야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놓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높이와 깊이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그러나-아직!–즉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죄인임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단지 거듭난 자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부름 받은 자들로서 이처럼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반문화적인 삶을 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용기가 있는가? 혹시 성공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지는 않은가? 진리가 무엇인지 입도 벙긋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 자신, 평소에 너무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나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용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