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독후감은 미국에서 유혜숙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특별히 박영선 목사님의 인터넷설교를 경청하며 존경하는 분인데 외부인으로서 로그인이 어렵더라는군요. 함께 나누고자 대신하여 올립니다.
                
        고든 맥도날드/홍화옥 옮김

저자는 타고난 재능과 좋은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목회자로서 다른 동료에 비해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되지만 내면에서는 열심히 자신을 의도적으로 갈고 닦는 이들에 비해 인생 후반기가 용두사미의 인생을 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 깊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날 그는 그의 내면세계가 “마치 홍수로 완전히 침수된 지하실과 같은 상태”에 놓인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외적인 생활의 무게를 지탱할 내적인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고든 맥도날드는 그의 경험을 기초로 내면세계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내면세계의 질서를 유지함은 우선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결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삶의 무게가 너무 크게 엄습할 때, 그래서 더이상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절망하게 되는 순간이 자기 영혼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순간이다. 그 때가 우리가 그동안 그곳에 비축해놓은 것이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저자는 그곳을 내면세계의 조종실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마음의 평정을 잃은 제자들에게 “왜 너희 내면세계의 조정실을 질서정연하게 유지하지 못했느냐”고 하는 영적인 성장에 핵심이 되는 질문을 하셨다. (눅 8:25) –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리의 내면세계의 조정실을 잘 정돈하여 그곳을 고요한 장소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세상에서 세상의 의견을 좇아 사는 것은 쉽다.  홀로 살면서 스스로의 의견을 좇는 것도 쉽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군중의 한복판에서 고독 가운데 독자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자다.”  외적인 압박이 크게 느껴질 때마다 그 고요한 장소에 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내면을 고요한 장소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방해하는 요소를 과감히 제거하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러한 훈련은 우리의 선택으로 시작된다.  그 선택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추종자들중 무엇을 근거로 그의 제자들을 택하셨을까?  예수님은 그가 택하신 제자들의 내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무엇을 보셨을까?  그점에 대해 저자는 쫓겨다니는 (drivenness) 이들과  부름에 따르는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우선 우리의 내면세계를 점검하려면 우리가 쫒겨다니고 있는지 아니면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살고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성취중심의 삶을 살며 내적인 힘을 키우는데 등한하기 때문에 뜻하지않게 만나게 되는 고난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늘 내면의 영적인 영역을 가꾸는데 지성과 마음과 힘을 다한다. 이 내면의 영역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용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심을 여러군데에서 시사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 저자는 켈커타의 마더 테레사가 쓴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시끄럽고 불안정한 곳에서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자연, 즉 나무와 꽃과 풀들이 침묵가운데 어떻게 자라는지 보라. 해와 달과 별이 침묵속에서 어떻게 운행하는지 보라. ——  우리가 침묵의 기도 속에서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외적인 활동 영역에서 더 많이 베풀 수 있다.  사람들의 영혼을 만지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쉽게 수만종류의 음악을 접하고 미디어를 통한 정보가 넘쳐나고 늘 분주한 일정에 쫒기는 현대인에게는 침묵과 고독은 익숙해지기 결코 쉽지않은 과제이다.  나우웬이 인용한 토마스 머튼의 글이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 우리에게 매우 교훈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성이라는) 난파된 배를 타고 표류하는 한 다른 이들에게 어떤 유익도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견고한 땅에 발을 딛고 섰을 때 사정이 달라졌다.  그 때 그들은 온 세상을 끌어당겨 자기들을 좇아 안전에 이르도록 할 능력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감마저 느끼게 된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침묵과 고독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이기 위해서 일기를 쓸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저자는 연필을 잡고 쓸 준비를 하노라면 하나님이 독서와 사색을 통해 속삭이고자 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듣겠다는 기대감을 품게 되었으며 일기장을 열면 그의 마음의 귀도 열려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후에라도 들은 것을 내면화하는 노력을 해야 함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를 영적훈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적훈련의 첫 단계는 고독과침묵을 배우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성찰과 묵상을 통해서 들은 말씀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찰과 묵상이 담긴 구절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 문을 열라고 한다.  묵상은 우리의 영을 천국 주파수에 맞추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내면세계의 정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풍성하게 하는 넷째 방법은 예배와 중보기도이다. 토마스 켈리는 “내면의 기도가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 행동이 되고 잠에서 깰 때 처음 행동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머지않아 로렌스 형제와 같이 ‘성령의 폭풍을 지닌 사람은 자는 중에도 앞으로 전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매일의 기도훈련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중 하나다.  그 이유는 1) 예배와 중보기도 자체가 부자유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예배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나약함을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기도가 때때로 실제적인 결과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중보기도는 나 자신의 목적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구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분의 목적에 나를 맞추는 일이라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헨리 나우웬은 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정신활동에서 하나의 급진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과 근심거리, 집착과 자기 만족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다.

그렇다면 우리는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인가?  다음은 20세기초 구세군의 전도자였던 사무엘 로건 브랭글의 기도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주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둔감하고 어리석게 되지 않도록 저를 지키소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 곧 경주자의 정신적, 영적, 신체적 자질을 지닐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 제가 하는 일이 형통하게 하시되 교만하지는 않게 하소서. 성공과 번영에 따르기 쉬운 안일함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육체적인 무기력과 쇠약함으로 밀려올 때라도 나태와 자기 탐닉의 영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소서.

다섯번 째로 저자는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안식에 대해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쉼 (안식)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해석하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을 누구에게 올려드려야 마땅한지를 확실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 전통에 속한 쉼에 대해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안식일의 의미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동안 우리는 공간에 속한 일들의 횡포아래 살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시간속에서 거룩함에 주파수를 맞추려고 애쓴다.  그날은 시간속에서 영원한 것을 서로 나누고, 창조의 결과로부터 창조의 신비로, 창조된 세계로부터 세계의 창조로 시선을 돌리도록 부름받은 날이다.

        우리는 이와같은 쉼이 자신의 내면 세계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쉼이 있는 곳에서 마치 자연 풍파에 의해 느슨해진 집 벽의 못을 다시 박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세상과 교회는 참된 쉼을 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그저 일에서 손을 놓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정기적으로 새롭게 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닮아 그런 쉼을 가질 때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정말 얼마나 굳세고 탄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여운이 길게 마음에 남는 것을 느꼈다.  모든 면에서 어눌하다고  느끼는 약점을 갖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아주 다정하고도 겸손하게 초청장을 펼쳐보였다. 저자의 타고난 재능으로 빠른 출발점에 설수는 있겠지만 결국 남은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인내를 갖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을 위한 결정과 노력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이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