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시편 37편 11절.

시편 37편은 뒤집으면 73편이 되죠.73편과 37편은 묘하게도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괴로워 하면서도 슬퍼하는 의인의 마음을 잔잔하게 담아내면서 그것을 어떻게 주님의 은혜로
이기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혹시 그런 동일한 마음의 슬픔과 고통이 있으신 분들은 시편 37편과 73편을 묵상하시면 은혜가
될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11절인데, 많이 들은 내용이죠.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한다. 마태복음 산상수훈
소위 8복에 보면 복이 8개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8개의 복에 대한것이 아니고 성도들 에게
주어진 하나의, 하늘의 복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하늘의 복은 하나의 복의 최고로서의
그 복을 하나의 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천국의 복, 그 한 복에 8가지 특징을 말하죠.

사과의 여러가지 맛이 어우러져 상큼한 맛을 내듯이 8개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의 8가지 특징을
말씀하고 있는것이 마태복음 서두의 말씀입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8복대신 특별한 표현을 만들어 냈으면 좋겠는데, 여하튼 하늘의
복에 관한 8개 특징을 말씀하는것 중에서 5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것이요, 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시편 37편 11절을 어느정도 연결
하셔서 그 말씀을 하신거라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온유한 자들에 대한 땅과 연결시키면서 여기에 하나 더 화평, 평화 이미지와
다시 엮었다는 것이죠. 하늘의 복 8가지 특징에도 화평에 관한 것이 나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화평의 열매로서 그 삶 속에서 특징이 일어
나야 한다는 얘기죠. 11절은 두가지 특징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로서의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이미지와 화평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것입니다.

온유함과 땅과 평화에 여기서는 맥락을 이루어서 연결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화평의 이미지가
땅과 연결되는 또 본문의 내용이 있죠. 에스겔서 37장 25~26절에 보면 내가 내종 야곱에게 준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
할것이요, 내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되리라. 26절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루게
하리니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신다 하면서 화평의 언약을 세웁니다.

평화의 이미지하고 땅하고 연결이 됩니다. 요즘 땅 많이 차지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땅을 얻으려면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돈으로 땅을 사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화평으로 평화의 열매로 땅을 얻을수 있다라는
것이죠.

아무리 이세상에서 땅투자를 하더라도 참으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화평의 열매를 삶속에서 우리 신앙의 인격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뼘의 땅도 갖지못한 가난뱅이로 서 있게 된다 라는 중대한 암시입니다.

그러나 이땅에서 한평의 땅도 등기부상에 소유권행사를 못한다 하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처한 삶과
사회적 현실속에서 평화를 일구어 내는 것이 있다면 그 효력의 영향력만큼 여러분들에게 무한히
확장 될수 있을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의 신앙적 특징이 바로 땅을 얻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평화의 특징을 열매맺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성품의 열매 맺게 한다는 것인데, 이 온유함 이라는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세상에서 제일 온유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12장에 보면 모세에 대해서
나오는데,모세는 세상 어떤 사람보다 그 온유함이 승하다.

모세가 그렇게 부드러운 사람이던가요? 모세는 대단히 과격한 사람입니다. 성질난다고 한 주먹에
사람을 때려 죽이는 혈기 방자하고 다혈질인 사람이죠. 격하고 공격적인 기질을 인간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가 사람 때려 죽이고 나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면서 부드러워졌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때 하나님께 성질 부리는 사람이죠. 계속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장면이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데, 모세는 결코 광야에 들어가서 80세가 되는 40년 동안 하나도 안 변했습니다.
단, 하나 온유한 자로서 특징지어지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승복할줄아는 그러한 영적인 융통성이 영적이 분명한 유연성이 갖춰졌다는
것이죠.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도저히 할수없는 도저히 하기싫은 도저히 공감할수없고 끝까지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밝혀지면 무조건 순종하는 중요한 영적인 기질
이 훈련되어서 갖춰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모세가 40년 후에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름받아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서 부름받는
과정이고, 그 이후에는 모세는 단 한번도 하나님의 뜻이 밝혀지는 순간 단, 한 순간도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대로 순종했고 모든 백성이 다 반대를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허락된 밝혀진
뜻이 분명하면 그는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아까 에스겔서에 보면 야곱, 다윗의 후손이 나옵니다.이들이 바로 온유한 사람의 대표적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제시가 되어있는 것이고 화평과 땅에 관한 이미지나 맥락으로 본다면 야곱과 다윗
도 그 나름대로 삶의 정황과 평생 살아간 삶의 굴곡들이 다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특징으로 수렴
이 됩니다. 모세나 야곱이나 다윗이나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뜻 앞에 그대로 순종할수 있는것 ,
바로 그것이 화평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에 우리에게 기업으로 허락된 그 땅의 범위를 넓힐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중에도 온유함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그런 온유함의 대한 강조를
하죠. 물론 우리 말 성경에도 온유함이란 표현이 성격적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결정적 부분에서 하나님 관계속에서 말씀앞에서 서있는 신자의 특징을 얘기 할때는
그건 어떤 성격적 부드러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에 절대적 복종의 변화된 성품들을 얘기 하는 것이죠. 그것이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정황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이 훈련된 온유함의 거룩한 성품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될수있는 우리의 경험이 우리 삶에 환경에 어떤 조건으로 생각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하시면서 마지막 부분에 가서 요청하신 부분이 있죠.
“원수를 사랑하라” 바로 그부분을 바울 사도도 로마서 12장에서 다시 반복을 합니다.

원수는 사랑할수가 없죠.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그러나 사랑하라니까 하는거죠. 늘 하는
말씀입니다. 원수는 내가 그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은 만큼의 증오가 타오르는 바로 그때,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 저 원수를 사랑할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요. 저 원수를 정말
좋아할수 있는 마음, 내 미워하는 마음이 다 사라지게 해 주십시요. 그 기도가 응답이 되면 문제는
원수 사랑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는데 사랑스러운 존재가 어떻게 원수가 될수 있어요? 원수는 원수로 존재할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가 주릴때 먹을것을 주고 밉지만, 정말 죽여 버리고 싶지만 헐벗었을때 입을것
을 주고 추울때 덮을것을 줄수있는 ,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내가 원해서
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것 그것이 온유함의
특징이요, 그런 온유함이 있을때 우리는 원수도 사랑할수 있습니다.

가장 극적이고도 절정을 이루는 열매의 표현은 “원수 사랑”이죠. 원수를 사랑할수있는 그런 철저한
순종의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디 가든지 평화의 사도 peace maker역할을 할것입니다

평화의 열매를 넓혀가는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서의 땅을 확장시켜 나갈수 있을것입니다.
실제로 이땅에서 등기부등재상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그 평화로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얻고 또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서 그 사람의 삶과 인생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의 역사들이
넓혀지면서 그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을 그 사람의 땅으로 인정되는 것이죠.

바라기는 세상에서는 땅 부자가 아닐지라도 주님의 안목에서 주님의 나라에서 부자된 땅의 많은 거부
들이 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