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로마서 6장 10~14절 말씀.

11절에 보면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쉽지않은 문맥인데요. 여기서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말고 ,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너희 죽을 몸에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 말 그대로 우리 존재, 현실로서 주어진 보이는 어떤 실체로서의
우리 몸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만, 이것은 곧 전 인격적인 우리의 성품을 담아내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로마서에서 쓰이는 표현중에 이 몸이라는 표현과 육체라는 표현들이 얽혀서 나오는데
특히 육신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전인격적으로 부패한 존재로서의 영적상태를 염두한
점이죠. 그래서 하나님앞에 범죄한 인간, 범죄한 영혼 그런 면에서 육신 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래서 이 몸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상태에 있는 실제적 우리의 현실적인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존재이지만 타락했다는 것이 우리의 고기덩어리인 육체 자체 또 이와 더불어서
우리의 인격적인 성품 자체가 다 쓸데없이 모조리 다 썩어 문드러져서 하나님앞에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부패는 영적 차원에서 우리가 정의될 문제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갖고있는 몸과 성품 이라는것은 우리 존재 안에서 죄성의 영향을 계속 받고있는 한계에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고 새로 구원 받은
자로서는 얼마든지 하나님앞에 긍정적 차원에서 쓰임을 받을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내용이죠.

그래서 통상 교회 역사속에서 많은 이단 중에 쉽게 스쳤던 이단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보이는 어떤 육체적인 우리 몸이나 우리 의식이나 사고를 철저하게 말하자면 부정하고 그것을
부패한 죄성 자체로 여겨서 자기 학대를 하고 어떤 고상한 새로운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같은
신학적 추구를 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영지주의를 대표로 해서 오늘도 우리가 자칫하면 왜 예수를 믿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의심하고 불안해 하는가 결국에 내 의식이 지금 여전히 부패한 상태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버리고 팔도 자르라 했는데, 그런 일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강력한 충동을 받게 되는데 진정한 신앙을 갖고 있는 신실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라면 그런
유혹앞에 한번쯤 서있게 되죠.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신 이몸과 우리가 갖고있는 생각, 감정 이 모든것들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 이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죄성, 인간의 타락이후에 우리에게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 하고 있는 그 죄에 대한 권세에 눌리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 뿐이지,
이제 새로운 변화된 거룩한 생명을 가진 자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도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우리들은 우리 몸과 우리 생각 우리 인격 감정 의지를 하나님앞에 얼마든지 선용할수 있는 그런 선택
과 결단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에 현실적 삶의 과정이기도 하죠. 결국 진정한 성경적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몸이나
우리 생각 자체가 믿기전과 완전히 다른 어떤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 영적
무균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죄성의 영향을 받아서 왜곡된 경향, 습관 , 불완전한 성품은 그대로 남아있죠.
이렇게 비유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운동을 할때, 기본기를 잘 익혀야 되는데, 처음에 무시하고 제 멋대로
운동하면 잘못된 습관 잘못된 기술들이 경기를 할때 행사해야될 좋은 습관을 다 갖추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왜곡된 비뚤어진 기술이나 습관을 갖게 되면 나중에 코치한테 지도를 받을때 훨씬 어려워지죠.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으면 훨씬 쉬운데 이미 오랫동안 비틀리고, 왜곡된 몸짓이나 기술들이 있을때는
그것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런것처럼 우리 몸과 우리 성품 우리의 인격, 우리
감정과 의지와 여러가지 속성들은 이미 부패한 존재로서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던 죄의 강력한 구속에
의해서 굉장히 비뚤어져 있고 잘못되어 있죠.

그러다 보니까 계속해서 우리가 주님의 나라 갈때까지 그 왜곡되고 불완전한 모습이 완벽하게 치유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보는거죠. 그렇다고 포기할수 없는것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라 갈때까지 그때
완전한 부활체로 우리가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완전한 성품으로 덧입혀질때까지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통치와 그 권세에 끊임없이 순복하는 그 결단과 실천적 순종을 통해서 그
왜곡된 부분들을 계속 거스려서 하나하나 성경이 성령께서 주시는 바른 영적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고통스런 과정들을 수용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성령충만을 우리에게 강하게 요구하고있는 성경의 분명한 권면이 될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고 비유를 들자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많이와 있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국적 변경이 가능하죠.
특히 한국사람하고 결혼하게 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데 국적을 취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격과 본질
자체가 변하나요? 외모나 성격이나 갖고 있는 마음의 감정이나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습니다.
단지 소속만 변했죠.

어느 나라의 법에 의해서 통제 되는가? 어느 나라의 통치 받는것만 달라져 있지 그 사람 존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요. 새로운 통치 구조 안에서 새로운 법 앞에 자신이 이전에 순복했던 법으로 부터 해방이
됐죠. 자유롭게 되고 새로운 법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그전에 법, 옛날 자기가 속했던 나라의 법에 의해서
습관화 되고 지금 법과 충돌하는 여러가지 생각이라든지 어떤 행동거지들은 결국은 시간을 두고라도 고쳐
나가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죄의 권세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다가 이제 생명의 법 거룩한 생명의 통치아래로 들어
가게 됩니다. 죄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과 성령의 권세 안으로 그 위치가 자리바꿈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자리는 바뀌었지만 그 전에 죄의 통치를 받던 왜곡된 성품과 인격과 우리 몸의 습관들은 여전히 있게 되고
그것은 결국 새로운 통치 하에서 부지런히 그런 모습들을 바로 잡아 가야되는 필요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필요를 말씀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예수믿고 나서 즉시 우리 생각이나 삶의 패턴
이나 또는 내가 추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들이 180도로 확 달라진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비춰주는 새로운 삶의 목적 새로운 인생의 방향 새로운 세상 역사를 바라
보는 시선 즉 가치관의 변화가 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는 말씀에 대한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결단과 선택들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몸을 우리의 지체, 성품, 감정과 의지를 옛날에 죄성에 의해서 죄의 세력에 의해서 그냥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던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에 들어 왔지만 그게 훨씬 불편합니다. 옛날에 죄에 머물렀던 죄의 통치 아래서 생각
하던 방식이나 살아가던 선택들이 훨씬 편하고 익숙한데 그렇지만 잘못 되었다는것을 알았기때문에 힘이 들어도
성령의 통치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렇게 우리가 모습을 유지해야 되고 이렇게 재생이 되어야 한다 라는
교훈과 명령과 권면이 주어지는대로 그 일을 위해서 비틀면서라도 바르게 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배소서 5장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성령
의 충만을 대조합니다 .

여기서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완전히 마취된 상태를 말합니다 거의 사물을 판단할수 없는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알콜 중독 상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통제할수 없는, 술이 만취 했거나 알콜중독이 됐다고 해서 그 사람의 본질
이 변했나요? 술이 깨어 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알콜치료가 되면 그 원래상태가 있잖습니까.
그 성품,생각 의지 감정이 있습니다. 다만 술의 지배 통치를 받으면 다른 형식으로 작동함으로서 삶의 결과가
다르게 된다는 겁니다. 여전히 속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술의 통제를 받다 보니까 삶의 내용이라든지 결과들이 전혀
딴판이 될수 있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거룩한 차원으로 돌려보면 성령의 충만은 거룩한 술에 취한것이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완벽하게 통치
하시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죄성에 익숙한 죄의 영향에 아주 편안해하는 그런 일들이 통제되고 다스려지면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방향에 새로운 삶의 열매들이 드러 낸다는 거죠.

똑같이 성품을 갖고 있지만 불완전하고 왜곡된 성품들이 있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순종하는 그일로 대표되는
성령의 내주와 통치와 인도에 우리가 온전하게 순복될수 있다면 완전하게 통제속에 들어 갈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우리의 존재론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별로 달라진게 없지만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그 분의
거룩한 열매들을 이루어 내신다,성령충만 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라는 그것이죠. 우리 자신이
외모가 밉던 얼굴이 예뻐지고 이런 것들은 없지만 인격적인 차원에서 감정이나 의지나 어떤 추구하는 생각들이
본질적으로 바뀐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 강한 다스림속에서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어여뿐
모습의 열매를 결과들을 얻어내는 길로 인도 받을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 자신안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바꿔놔야 할까 이것 보다는 영적인 술취함으로 인도받는 성령의 술 취함
으로 인도 받는 그일에 마음을 모아야 되고 그일에 교훈하시는 성령의 음성 특히 성령의 가르침에 더 집중
해야 한다라는 것이죠. 성령의 통치의 온전한 순복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를 완벽하게 받기 위해선
결국 말씀으로 계시되는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가 소기의 목적을 이룰수 있다 라고 기억 해야 될것입니다.

바라기는, 도서관 식구들 만큼은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의 하루하루의 삶이 계속될수록 훨씬 더 진일보 하는
변화들을 더욱 깊게 풍성하게 누리는 복을 남다르게 누리시길 바라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는 그와
같은 영적인 모범적인 삶의 신앙들을 통해서 우리가 섬기고 교회안에서 교제하고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된 신자의 삶의 내용들을 함께 나누시면서 주님의 위로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으로 일관하시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