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시평>

  이제는 문화예술정책의 민주화를 이룰 때다!

송진범 PhD. 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부회장

  박근혜정부가 2월 25일 취임식을 시작으로 정식 출범할 태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자 제3대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18대 대통령으로 부녀가 함께 대통령이 된 아주 특별한 케이스이다. 정치 선진국들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한 대한민국의 여성대통령 탄생에 대해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외신이다. 국민들은 그들대로 여성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버지 박대통령의 뚜렷한 신념이 혼란스러운 현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안정과 경제적 부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사실 박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 하에서 국민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불편과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고 그 후과는 우리 정치사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친 점 도 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사건이후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광주 5.18민주화 사태, 노태우정부의 민주항쟁 등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를 모두 잊어버리고 막연하게 추억으로만 남아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점이 또한 박근혜정부의 올무가 될 수도 있음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는 기대감 또한 아주 큰 법이고 그 기대감이란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 줄 것이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사랑해서 결혼을 하지만 신혼초기에 부부싸움을 제대로 안 해 본 위인은 없을 듯하다. 원인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요즘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에 ‘예술의 민주화’란 말이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함께 포괄적인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얼마 전에는 ‘경제 민주화’라더니 이제는 ‘예술의 민주화’란다.” 고 말한다. 너무 억지스런 용어의 선택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그 의미를 알고 보면 새삼스러운 어휘도 개념도 아니다. 개인 간에도 너무 일방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이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증폭되듯이 기업 간에도 경영의 양극화가 심화되면 노동자들의 분신과 쟁의가 일 년 내내 지상을 장식한다.  급기야 정부가 동반성장위원회라는 반자본주의적 기관까지 만들어 이를 극복해 보려고 하고 있다. 그런 정도로 경제민주화니 예술의 민주화니 하는 말이 현대 한국사회의 아젠다가 된 셈이다.
  
  그러면 예술의 민주화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우리는 흔히 학식과 견문 그리고 펙트의 전문성 등으로 한 인간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에 상응하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 능력과 전문성 그리고 그 성과에 따라 지급되는 보수의 차이가 엄청난 것도 보통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도를 넘거나 일방적이라면 이는 언젠가 사회적 갈등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그들이 요구하고 당연시하는 보수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일까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논리를 반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런 지식과 학력이 없어도 인간이라면 알 수 있는 상식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무척 크고 아름다운 것은 보통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거의 모두 이를 기준으로 살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자. 극히 한정되고 운이 좋은 몇 몇 사람들만이 음악예술의 커다란 과실을 따먹고 산다. 대부분의 상식적인 음악인들, 아니 상식이란 음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몇몇 분들의 과실 얘기는 머나먼 달나라의 얘기이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다가갈 수없는 세상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면 이러한 상식적인 음악인들이 만족하고 수긍할 수 있는 예술계는 어때야 하는가. 바로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세상이다. 누구는 연봉이 수십억인데 어느 음악 강사는 연봉이 5백만 원 이라면 이는 분명히 공평한 사회가 아니다. 그럼 그 대학 강사와 몇몇 운 좋은 음악가의 능력이 400배의 차이가 난다는 것인가. 모 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 연봉이 수십억이라는 것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한 문화평론가가 이의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결국 새로 계약하는 연봉책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상식적인 음악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또한 이해가 안가기는 매 한가지다. 조금 깎았다고 하는 금액이 더 염장 지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억울하면 너도 그렇게 받아라, 하고 타박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무식하게 떠들지 말고  당신도 그런 음악가가 되세요, 라고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 그게 맞는 얘기다. 그래서 가만히 엎드려 살기로 한 것인데, 왜 요즘 들어 경제 민주화니, 예술의 민주화니 떠들어서 언 가슴에 불을 지피느냐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민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월급은 없다. 단원들도 무슨 일만 있으면 모여서 연습하고 수당을 30만 원쯤 받는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모이라면 다들 모인다. 그들에게 맘 편히 연습할 공간을 갖는 것은 꿈같은 일이고 정기연주회를 열어보는 것도 행운에 속한다. 그래도 중소기업들은 삼성이나 현대처럼 대기업들의 하청이라도 받아먹고 살지, 음악계는 하청은커녕 승자독식(勝者獨食)이 당연한 것처럼 상대방 아이디어와 영역까지 빼앗아 먹기 일쑤다.

  이제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자본주의 운운하며 몇몇 유명음악가들만 호의호식하는 행태가 문화예술선진국의 세련되고 우아한 관습이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촌티나는 동네 아저씨네 강아지 풀 뜯는 소리쯤으로 몰고 가는 태도는 사라져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음악계의 대기업이라 할 서울시향이나, KBS향이 힘없고 돈 없는 민간 교향악단에게 과실을 나누어 주고 함께 사는 경영체제를 생각할 때다. 옛말에 견득사의(見得思義)란 말이 있다. 누구든지 이득을 보면 옳은 일이었나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다. 참으로 예술의 민주화와 더불어 생각하게 하는 좋은 구절이다.  

  외국의 베를린 필이 한국에 들어와 두 번 공연하고 21억 원을 가져가고 그 입장권금액이 무려 40만 원 대를 호가하는 대한민국음악시장에서 아직도 만 원짜리 입장권 백장을 소화하지 못하는 민간교향악단이 있다. 그 안에 소속된 상식적인 음악가들도 대부분 음악예술계의 진실을 상식으로 알고 산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식이라는 생각을 아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아니다. 다만 어느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들처럼 힘을 합쳐 데모를 할 능력이 없고, 전봇대에 올라가 일주일이 넘도록 금식하며 시위할 용기도 없는, 그저 마음이 착해서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면 이런 점을 잘 헤아려 중소기업인, 대기업 노동자들, 전통시장 할머니들 뿐 아니라  1년에 한번이라도 마음 놓고 정기공연을 열고, 1년에 한번이라도 월급을 만져보고, 1년에 한번이라도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는 민간 오케스트라단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을 펴주기 바란다. 한마디 말도 못하고 사는 음대 강사들, 음악학원 강사들, 음악교습소 운영자들에게도 햇볕을 비춰주는 그런 따뜻한 정부가 탄생하길 진정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