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대선주자들은 음악인들의 생활대책을 공약으로 제시하라!

송진범Ph.D(한국음악교육협회 부회장)

이제 대선이 2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여야 후보들마다 국민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것 같이 안달이다. 국민 된 입장에서는 5년에 한 번 있는 이런 상종가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언제 서민들이 그들로부터 고개 숙여 따뜻하고 힘 있는 악수를 받아볼 것인가. 언제 그 같은 지체 높은 양반들의 겸손한 얼굴을 지근거리에서 대해볼 것인가. 무엇보다 이때만큼 우리사회 각계각층의 필요와 이익을 적절하게 정치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요즘 이런 선거철의 특성을 이용해 많은 사회단체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몇 달 동안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열성과 집념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주장은 “내몰리고 쫓겨난 이들의 공동 거점 투쟁” 과 “이 땅에서 쫓겨나고 내몰린 사람들의 연대의 장,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이들의 공동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힘없고 돈 없는 서민들의 입장을 절절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주목하고 있는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이들”이란 누구인가. 누가 과연 그들의 범주에 속하는가.

가난한 음악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범주에 음악인이 제외된 것을 알고 나면 너무나 막막하고 억울한 생각이 든다. 왜일까. 왜 억울한 생각이 들까. 음악인들이란 이 사회에서 못살고 빼앗긴 부류라는 것이 틀리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유 있고 돈이 많으며 늘 고상한 예술세계 안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는 부류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심약하고 줏대도 없어서 자기 밥그릇을 지켜낼 만한 위인들이 못되기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부모가 벌어놓은 돈은 많은데 막상 자신은 벌지 못하는 ‘캥거루족’으로 분류되는 것이 억울하기 때문일까. 불행하게도 우리사회의 음악인들은 이 네 가지 범주에 모두 속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음악인들을 볼 때는 이중에서 눈에 잘 띠는 두 번째나 네 번째 부류만 보이는 것 같다. 그들은 TV에서 또 신문이나 잡지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세련되고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급스런 악기를 연주하고, 젊고 아름다운 관객들을 대상으로 고즈넉한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음악인들만 있다.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지난 1972년 필자가 서울음대에 재학할 때이다.  당시 서울대 학보 ⌜대학신문⌟에서는 ⌜대학가 만보(大學街 漫步)⌟ 라는 탐방기사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매주 발행되는 이 신문이 월요일 아침 캠퍼스에 뿌려지면 학생들은 제일 먼저 이 난을 찾아 읽었다. 이 코너는 각 단과대학을 기자가 순회하면서 그 대학의 학문적 특성과 분위기, 그리고 학생들의 열성과 학습태도 등을 매우 정교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당연히 각 단과대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대학이나 전공에 대한 평판에 대해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자기전공 이기주의랄까.

어느 누구도 자기대학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항상 기사가 실린 후에는 이전 호에 소개된 대학의 학생들이 기자의 잘못된 시각을 지적하는 반박문이 함께 실리곤 했다. 이 오래된 기억을 굳이 떠올리는 이유는 이 당시 음대 편에 대한 만보자(漫步者)의 지적이 위에서 언급한 필자의 지적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대충 기억을 더듬으면 ‘음대학생들은 화려한 의상과 무대를 동경하고, 값비싼 악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회정의나 서민들의 애환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는 것이다. ‘음악대학은 고관과 부자들의 자녀만 다니는 학교이며 따라서 현실을 잘 모르는 부류라는 것’ 이다. 참으로 분통터질 이야기였다. 당장 필자는 그 다음호에 이러한 기자의 단견과 무지에 대해 반박문을 실었는데 많은 학우들로부터 “잘했다!” “속이 시원하다!”는 칭찬을 받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기자의 지적이 얼마나 정확하고 일리 있는 말인가, 스스로의 변명이 얼마나 가증스런 자기기만(自己欺瞞)이었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 동안 괴로움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기자의 지적이 대체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 음악인들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40년 전의 음악계보다는 말할 수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사회는 아직도 기초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수많은 음악인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교양과 인성교육의 중심이던 음악학원들은 부모들의 실용교과 중심사고로 점차 외면당하고 컴퓨터나 영어, 수학 학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나마 조금 남은 학생들은 아이돌그룹이나 뮤지컬과 같은 인기 있고 돈 잘 버는 분야로 일찌감치 뛰어들고 있다. 전에는 중학교 1~2학년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요즘 음악학원 원장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피아노 교육이 초등학교 2~4학년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정서교육이나 창의성교육은 이론으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음악공부를 수십 년 하고 음대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는 학생들이 전공을 버리고 일반회사나 음악과 상관없는 직종으로 내몰리고 있다. 조금 한다하는 학생들은 대학원으로 몰리고, 졸업 후 유학까지 가서 수 천 만원을 쓰고 난 후에 시간당 3만 원짜리 시간강사에 매달린다.  이게 정상적인 사회인가. 교육이 이념과 계층 간의 갈등을 조장해온 정치가들의 소유물이 되고 음악교육은 본래의 가치관에서 변질된 채 정치인들은 그 문제 자체도 모르는 ‘잊혀진  교육’이 된지 오래다.
  
전통적으로 인성 교육이나 문화적 취미 같은 상대적 욕구를 대상으로 하는 음악인이란 직업이 타 분야의 절대적 욕구, 이를테면 식품, 의류, 주거 같은 업종을 상대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고로 예술과 문화가 꽃피워진 민족이 역사상 존경과 사랑을 받지 않은 나라가 없고, 그런 일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을 존중하고 사랑한 나라치고 사람이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다는 나라 아닌 나라가 없다. 이제라도 대선주자들은 예술의 주체인 음악인들에 대한 생존권 문제를 집권 후 펼쳐나갈 주요정책의 하나로 제시해 주기 바란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말이다.

몇 해 전 타계하신 전 한국음악교육협회 회장 조상현(바리톤) 선생은 정치권력이 음악인들의 권익향상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일찌감치 아시고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현옥 씨를 설득하여 현 사당동 일대를 예술인 촌으로 지정 받아 집 없는 음악가들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분은 또한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해 음악인들의 기초생활권 보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음악인들의 생활보장을 위해 힘쓰는 정치가가 누구인가. 연봉 7~8천을 넘는 현대자동차들의 노동자들 보다 음악인들이 부족한 것이 무언가. 그들은 사회단체나 매스컴의 이슈가 되고 해마다 연봉협상에서 당당하게 자기 몫을 찾는데, 음악인들은 왜 못하는가. 왜 음악인들은 사회적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 하는가.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왜곡된 사회에서 예술적 가치가 창출될 수는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선을 맞아 음악인들의 사회적 관심과 그들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주는 치열한 싸움이 정치판에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진정으로 음악인들의 실상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지도자의 선출을 위한 음악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단합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