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남성성가대원 여러분,
날씨가 매우 추워졌습니다. 오늘 아침 수은주가 영하 11도 까지 내려갔군요. 이럴때 일수록 적당한 운동과 신앙생활로 마음의 평안과 활기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이 코너에 올려왔던 <재미로 읽는 서양음악사>가  제가 연재하고 있는 잡지<음악춘추>의 내용과 비슷하게 진행되므로 이제부터는 음악춘추에 개재된 내용을 이곳에 옮겨서 똑 같이 진행하려합니다. 그래서 이번 내용부터는 잡지에 실린 내용과 동일함을 알려드립니다.
사실 그동안 비슷한 내용인데도 두 번씩 따로 써야하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해있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저의 이러한 시도가 순수하게 여러 집사님들의 음악적 소양을 높이는데 기여할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우리의 정성과 마음의 일환임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18세기 고전주의 음악과 사회

우리는 가끔 “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음악 감상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어떤 음악을 좋아 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재차 받게 됩니다. 그때 여러 사람이 흔히 듣는 대답은 “클래식음악입니다.” 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음악을 공부했거나 아니면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혹은 베토벤 같은 음악가들의 작품을 즐겨듣고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클래식음악”이라는 개념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음악사에서 말하는 ‘클래식’의 시대적 구분은 매우 협소하고  한정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전주의라고 말하는 시대는 역사적으로 보통 1750년부터 1802년까지를 말합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바흐가 서거한 해가 1750년 이고 헨델이 서거한 시점이 1759년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분의 타계로 말미암아 바로크의 음악적 사조는 종말을 고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어서 등장한 비엔나의 두 새로운 음악가들은 고전주의라는 사조를 낳게 됩니다. 이 두 분은 물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요셉 하이든입니다.

모차르트는 잘 아시다 시피 1756년에  태어나서 이미 만 4세경부터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그의 나이 19세가 되는 1775년 비엔나로 가출을 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비엔나의 음악계에서 널리 알려진 하이든을 운명적으로 만나 같은 음악 사조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하이든은 1732년 생으로 모차르트보다는 훨씬 선배이지만 그의 활동이 주로 1761년경부터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결국 이 두 거인의 활동은 1750년경부터 1802년까지로 제한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1800년이 아니고 1802년까지를 고전주의라고 할까요. 그것은 베토벤이 그의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를 비엔나에서 초연했던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음악으로부터 고전주의는 막을 내리고 낭만주의의 음악으로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에 결국 고전주의는 1750년경부터 1802년까지를 말하게 됩니다.

1.고전주의 시대의 사상과 음악

18세기 들어 계몽주의 사조는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전 유럽의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특히 영국의 존 로크 와 흄, 프랑스의 소설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등이 이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들 사상가들이 그들의 저작과 소설 등을 통해 주장했던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종교생활에 대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인간의 삶을 지배해왔고 이는 절대적 가치로 인식되어 누구도 그 신앙적 가치관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일방적 논리는 인간이성의 가치를 존중하게 된 이후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가치와 필요는 인정하지만 그 존엄과 믿음 자체에 대한 일방적 수용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리의 논리적 해석과 신앙적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가해졌습니다.  

두 번째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논리를 거부하고 생사 문제와 같은 불명료한 세계에 대헤서는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실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집착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상식이 중요시 되고 경험이 우선되는 사회, 논리와 이성이 생의 최고 안내자라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자유평등 사상입니다. 그동안 누려왔던 귀족과 왕족들에 의한 정치 체제 즉 봉건주의 사상이 평민들의 반란으로 크게 위축되거나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1789년 파리에서 일어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입니다. 정치범 수용소였던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 시민들이 해방해야할  표적이 되었고 이의 맨 앞에 나폴레옹이 앞장섰던 것이지요. 이 봉건주의 사상의 타파를 극적으로 잘 표현해 낸 것이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이지요. 이 오페라는 18세기 말 나폴레옹에 의한 혁명에 이어 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수구세력간의 암투입니다.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리려던 당시 젊은 엘리트 ⌜안젤로티⌟와 그를 구하려는 친구 ⌜카바라도시⌟ 그의 애인 ⌜토스카⌟, 그녀를 이용해 이 두 사람을 잡으려는 왕정의 심복 ⌜스카르피아⌟와 쫓고 쫓기는 드라마입니다. 이런 오페라가 당시 시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봉건체제의 몰락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유와 평등사상은 특히 베토벤과 같은 자유롭고 의지가 강한 음악가에게는 무엇보다 가치 있는 사회체제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권위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반감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던 시대가 바로 18세기였습니다.

2.비엔나 악파의 출현

18세기를 즈음해서 독일에서 일어난 음악사조는 북쪽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독일 악파, 만하임과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한 만하임 악파, 그리고 제일 남쪽에 위치한 비엔나 악파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17세기 오페라나 성악음악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이탈리아음악은 바흐나 헨델과 같은 독일의 양대 작곡가에 의해서 스펀지처럼 흡수됩니다. 특히 바흐는 이태리의 최고 음악가였던 비발디, 북스테후데, 코렐리, 토렐리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음악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후 그는 독일적 음악 즉 독일 민요나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등의 음악을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로 편입시켜 음악의 국제적 왕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아들인 C.P.E.바흐와 J.C.바흐, 그리고 요한 고트립 그라운, F.J. 고섹과 같은 음악가들에 의해 점차 단순하고 화성적인 음악 즉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스타일인 갤런트 스타일(Galante Style)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바흐 이후의 작곡가들에 의해 음악은 기악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많은 철학자들 특히 바움가르텐(Baumgarten), 한슬릭(Hanslick) 같은 철학자는 음악의 가치를 기악음악의 비언어적 가치에서 찾게 됩니다. 이는 지난 호에서 이미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기악음악이 갖는 무한한 상상의 힘을 철학자들은 가장 높이 산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인정하시겠지요. 음악의 힘이 어떤 논리도, 정치적 신념도, 사랑도, 가난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독일의 제일 남쪽 지역에 자리한 비엔나는 원래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예부터 정치 경제 예술의 중심지로서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했던 곳이지요.

요즘은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비엔나까지 직항노선을 개설해놓았기 때문에 10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과 소련상공을 경유할 수 없어서 먼저 동쪽으로 가다가 미국 땅 앵커리지에서 기착한 후 다음은 북극항로를 따라 벨기에의 암스테르담에 기착하고 다시 비엔나 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때문에 보통 26시간이나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비엔나는 지금도 어느 곳이든 2시간 정도면 유럽 전역을 날아 갈 수 있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역적 이점을 가진 비엔나 악파는 당시 18세기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화로운 생활을 뒷받침하기위해 음악적으로 왈츠나 이탈리아 오페라가 매우 유행했습니다. 비엔나음악의 특징은 기교적으로 단순하고 품위있는 음악을 원했고, 억지스러운 표현보다는 자유롭고 편안한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왕가의 기호에 맞게 세련미와 품위가 절대로 요구되는 음악이었죠. 이러한 왕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음악이 ⌜겔런트 스타일⌟(Galanter Stil(독),galante style(영))이라는 형식을 낳게 됩니다.

3.18세기의 사회적 양상

이시기의 변화무쌍한 사회문화적 추세를 일컬어 당시 레싱(Lessing)과 헤르더(Herder)같은 독일 문학가들은 ⌜질풍노도(Sturm und Drang)⌟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이 시대는 태풍 같은 바람과 성난 파도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즉 모든 예술이나 철학과 과학, 그리고 문학이 일반 대중의 머리를 깨우치게 하고 이들의 지식을 통해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되는 시대인 것이죠.

두 번째로 예술의 가치는 대중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이러한 작품은 예술에 있어 감상주의(Sentimentalism)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의 표현 대상은 자연이나 인간 삶에 있으며 이는 모든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예술 활동의 중심으로 다가서게 했습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식은 민족을 뛰어넘어 인류의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음악이 베토벤의 9번 ⌜합창⌟입니다. 또, 게반트하우스 음악회와 같은 음악동호회가 결성되어서 음악이교회나 일부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일반 시민들이 즐기고 공유하는 시대로 변화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음악에 있어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전제군주들과 귀족들의 절대적 후원활동이 이 시대를 인본주의 시대로 규정하게 했습니다. 이젠 군주들도 아카데미와 같은 예술단체를 구성하여 음악가들이 왕의 보호아래 창작에 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왕실에서 활동했던 헨델이나, 에스테르하지 대공의 예술단체에서 활동했던 하이든, 비엔나 왕실에서 활동했던 살리에리 등이 있습니다. 물론 베토벤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활동했던 사람도 있지요. 그런 음악가는 귀족들의 후원금이 생활의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18세기의 음악가들은 왕실의 아카데미, 교회의 전속음악가, 혹은 귀족의 후원을 받는 등의 방법으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물론 이런 보호 장치에서 벗어나 있는 이름 없는 음악가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18세기의 음악환경은 흔히 이런 방법으로 구축되었고 이는 음악가들의 창작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