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의 두 얼굴/ 박 양 목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약에 존재하였던 주님의 모형이며 그림자들을 모두 제거하셨다고 믿었는데,


그러면 십일조는 구약의 요구입니까? 신약의 요구입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요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라는데 목사님들은 용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무지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고하여 보고


과연 이 말씀이 오늘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하는 말씀인가?


본인은 박식한 성경학자는 아니나 이 한 성경에서만 보아도 십일조라는 의미가


얼마나 거짓이고 가증되며 추악한 것들로 드러내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대화에는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는 흑백의 논리처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마 23장 전체의 내용을 보면 시종일관하여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을 꾸짖으며 하시는 말씀으로 일곱 구절의 말씀은 서두에서부터


“화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전제로 하셨고 또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는 그들의 결과론을 필설 하셨다.




더욱이 마 23장의 말씀에서 깨달아야할 것이 있다면


이 말씀들이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


오늘의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데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23장 서두인 2절에 이미 교황 같은 목사들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으로,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라고 하셨다.


어쩌면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오늘날 목회자들에 적중하는 말씀으로 탄복을 할 지경이다.




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함은 율법의 자리에 앉았음을 일컫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자리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기 위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오늘의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 성도들의 혈세인 십일조를 착취하지 않았는가?


아니라면 어디서 도적질을 한 것인가?


연보며 감사헌금이며 십일조는 가난한자와 고아와 과부에게 사용하라고 한 물질이 아닌가?


수 천만원, 억대가 넘는 자가용들은 성도들의 피를 태우며 달리고 있지 않는가?




로마 천주교의 바티칸 궁전을 바라보고 손가락질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십일조라는 면죄부로 궁궐 같은 가짜성전들을 짓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너희들은 스스로 교황들이 되어 가난한 백성들의 혈세로 부를 누리고 있지 않는가?




멜기세덱은 드리는 자가 아니요 받는 자로


그 멜기세덱이신 예수는 자신을 드리시므로


속죄의 제물을 종결하셨고


그래서 제사는 예배로


모든 절기가 주일로


제물은 우리의 헌신으로,


십일조는 연보가 되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율법이요 강제적이라면 연보는 은혜로 즐겨드리는 것이요


또한 연보는 자신을 드려 이루신 십일조의 완성으로


전부를 드리는 것의 표(과부의 두렙돈)가 아닌가?


율법아래 있는 자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할 것이나


율법의 완성아래 있는 자는 모든 것이 주의 것으로 여기는 산 제사의 표본이 아닌가?


또 성전을 허물어 버리시고 우리를 성전을 삼으심이 아니신가?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이제는 실체로 나타나셨는데


왜 십일조는 그대로 존재해야 하는가?


말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나 연보는 전부의 드림이 아닌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으니


다 나누었으니 핍절한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율법적이요 계산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전부를 드렸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바울서신들이나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의 모든 성경을 훑어보아도


십일조를 하라든가 주일성수를 하라는 가르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연보와 십일조를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하는가?


아니면 구태여 신약에 와서 본질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십일조를


다시 율법화하여 성도들을 꽁꽁 묶어놓으려는가?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없었다는 사실은 바울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만일에 그 당시에도 십일조가 있었다면 바울이 구태여 천막을 지으며,(직업을 가지며)


또는 루디아를 비롯 많은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 또한 그러했으며 특히 일곱집사들을 세운 것은


십일조의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닌 성도들의 연보를 관리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율법과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수차에 걸쳐서 다른 말들로 이해시키려 하지만


한국교회성도들은 바리새인들 같은 목사들때문에


십일조라는 율법에 완전히 묶여버리고 말았다.




구약의 율법은 쉽게 말해서 약속어음과 같은 것이라고


“윌리엄 헨드릭슨”의 갈라디아 저서에서 밝히면서


약속어음은 현찰과 교환되고 나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버려진 휴지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약속이라도 지키는 듯 목에 힘을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다른 얼굴을 벗어버리고


은혜의 얼굴 곧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분 자신을 드려 우리를 사신 것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그분을 사야 한다.


나는 언제나 바울의 고백을 즐겨 듣고 본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스도를 향하여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십일조라는 제도자체는 오히려 가증스런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수양이나 물질의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우리의 제사는 죽은 제사가 아닌


산제사(롬 12:1)임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의 어떤 의식적인 날이나 제물이나 절기나 규례나


나타나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제사로서의 삶속에서 열매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으로 완성이 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절기와 제사는 폐하여지고 안식 후 첫날인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아직까지도 성전이요 율법이요 절기며 제사와 십일조를 말하는 자들은 구약이나 율법을 이렇게 해석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율법을 완성하셨지 율법을 폐하신 것은 아니다. 그


러므로 어떤 율법은 존재를 하여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런 말씀을 채택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율법의 완성을 아래와 같이 답을 하고 본질적인 것을 논하고자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우선 근본적인 논리로 율법은 종이며 백성의 신분에서 지켜야 하는 법이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하는 자들의 법으로


곧 하나님의 근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서신들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의 초등학문을 버리고 담대히 그리스도 앞에 서라고 요구하심을 보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레위지파와 과부와 고아와 객을 위해 지정된 것이다.


레위지파는 다른 어떤 분깃도 없다.


그러면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도 레위인이 존재하는가? 결코 아니다.


카돌릭을 비롯한 구교와 신교에 구약의 레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만인 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오늘 목사들은 자기를 레위인처럼 제사장들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줄곧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성전이 어떻고 제단이 어떻고 제사가 십일조가 어떻고 절기를 찾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욕되게 하며 성도들을 기만하고 있다.





은혜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가!


은혜 아래,믿음아래 있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종처럼 굴어야 하겠는가?


생명의 피이신 곧 예수의 이름을 영접한 참 믿음생활을 하는 참 성도라면


그 영혼과 당신의 생활에서는 속박을 벗어난 새들처럼 자유로움과


다정함의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날 것이다.




고로 기독교란 예수 믿고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다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덕군자의 피를 주신 것이 아니다.


당신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격으로)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명하기를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피조물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었기에


인간은 율법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보니 율법에 사로잡힌 바 되어 율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지니, 율법의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완전한 권세를,


예수님의 피를, 자유의 생명을,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게 된 까닭에


인간들도 마침내 피조물만을 억압 할 수 있는 율법의 세력을 뛰어넘어서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라고 하는 성도들이며 제사장을 가장한 목사들이여!


아직도 제2의 이스라엘을 꿈꾸고 있다는 말인가?


율법의 노예들이었던 저들의 누추함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가 말이다.




진정으로 교회들이 십일조에 목숨을 걸 만치 중요한 사안이라면


왜 바울이나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또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


그리고 그 결과적인 답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묻지를 않으셨는가? ”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눅 22:35)”




제자들이 복음 전도에 나섰을 때


사도적인 권위나 제사장적인 위엄을 가지고 않고


주님처럼 형제요 친구처럼 찾아갔던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습은 형제요 식구요 친구처럼 모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적인 성전 세나 열한 지파에게 내는 십일조의 세는


더 이상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글쓴이 |2004/06/01|나눔의 장|십일조에 관한 다음의 글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에 댓글 닫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