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4) (왕하25:1~7)

2022. 11. 13.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시드기야는 남 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바벨론에 붙잡혀 가고 거기서 죽는다. 이 비극적인 유다의 종말은 사전에 여러 번에 걸쳐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고 특별히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의 선지서 내내 남 왕국 유다의 멸망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그때의 백성들은 왜 다윗 같지 않았는가? 히스기야 같지 않았는가? 왜 요시야 같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은 우리가 성경을 도덕법으로 밖에 보지 못해 생겨나는 오해이다. 도덕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선한 왕 착한 왕 잘한 왕이 있고, 악한 왕 잘못한 왕 신앙을 저버린 왕이 있다고 둘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읽어 보면 악한 왕들이 왜 그랬냐를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다 왕국의 말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악한 왕들이 있다.

아하스, 므낫세, 시드기야 등이고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선한 왕도 있었다.
(2) 아하스는 그 아들도 우상에게 바쳤다. 또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도, 이사야가 하는 권면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믿어지지 않거든 징조를 구해라.

나는 그런 것 구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인가? 나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 아들 히스기야는 모든 일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울고 해서 응답도 받았다.

히스기야 6년에 북왕국이 멸망하고 아람도 멸망하며 앗수르가 새로운 강자로 나타난다.

앗수르는 이전 북 왕국이나 아람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대한 제국으로 일어섰다. 이런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했을 때 히스기야는 대책이 없었고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그들을 쳐서 없애 버리셨다.

히스기야는 병이 들었지만, 그것도 기도해서 나았다.

그러나 그 아들 므낫세는 유다 왕국 역사상 최악의 왕이었다. 므낫세의 악한 짓을 보면 그가 제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 본론

(1) 므낫세는 무언가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그것을 참지 못하여 발광하듯이 나쁜 왕이 된다. 아버지였던 히스기야에 대항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아들이 왜 반발했을까?

요시야의 아들은 여호아하스인데,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가 죽고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가는 바람에 3개월밖에는 왕좌에 있지 못했다.

그다음 왕은 여호야김이다. 여호야김도 기를 쓰고 하나님을 반대했다.

예레미아서의 증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에레미야를 통해 멸망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할 때에, 여호야김은 예레미야가 하는 말을 적어 오라고 시켰다.

그는 서기관이 그것을 읽을 때 읽은 분량만큼 칼로 베어서 화로에 던졌다.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배짱 좋게 저항한다.

이런 일들은 자연스러운 행동과 결론이 아니다. 시드기야에게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렘38:17~18)

너 바벨론에 항복해라. 그러면 편안히 살 수 있다. 저항하면 네가 보는 앞에서 네 자식들이 죽고 너의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간다.

시드기야는 이 말을 들었지만 거절한다. 여기에는 다분히 어떤 분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웠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럴 필요가 있는가? 유다 왕국의 마지막에 이런 일들이 급하고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 끼여서 왔다 갔다 하다가 망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일어나는 바벨론의 말을 들었다가 또 배반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자식들은 왜 반대하며 분노하며 고집을 부렸을까?

악한 왕이라서 우상을 섬겼다, 라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더라, 라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남북왕조 공히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랬다. 잘살기를 바랬다. 그러나 끝없이 이웃 나라들이 못살게 굴었다. 열왕기 내내 아람 앗수르 바벨론에게 시달렸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는 희랍 로마 등에게 희생되었다.

악한 왕들은 하나님께 빌어봐야 소용이 없다, 라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겼다고 다른 민족을 보내서 혼을 내신다.

조상이 하나님을 섬겼어도 하나님은 그 자손에게 신앙이 전달되도록 하시지 않고 어디선가 막아 버리신다.

히스기야는 병이 나은 후 바벨론에서 온 사자들에게 국고를 보여준다. 우리가 동맹을 맺을 만한 국력이 있는 나라, 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나님은 여기서 마음이 닫히신다. 이 보물들은 모두 적국이 뺏어가고 네 자식은 그 나라에 잡혀가 환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왕 노릇을 잘했으므로 너의 생전에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

히스기야가 답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 비극이 생기지 않는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놀라운 어리석음이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을 했던 신앙과 지금의 이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요시야도 그렇다. 요시야는 더 꼼꼼하게 종교개혁을 했다. 나중에 바로 느고와 므깃도 전투에서 만났는데 바로 느고가 말했다.

나는 저 위의 앗수르와 바벨론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 전쟁을 하는 것이며 너희와는 무관하니 나하고 싸우지 말자. 이것은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전쟁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덤볐고 죽는다.

요시야의 만용은 어디서 나왔을까?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세세히 진행했고 그래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내용은 아니었다.

우리가 열왕기를 대할 때 사용하는 잣대는 율법이다. 그래서 우상을 제거한다. 그러면 우상은 제거되는데 하나님이 다시 우상이 되는 우를 범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상이 되는가?

내가 소원하는 것 해 주십시오. 내가 제사를 드릴 테니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내가 율법을 지켰으니 내 뜻을 들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계속 거부하신다. 좋은 왕의 후손들이 볼 때는 하나님께는 기도해도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우상을 섬기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열심히 했던 일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그만 들먹여라. 아무 소용이 없더라. 그래도 다른 우상은 어느 날 이사 가면 좋다, 라는 정도는 말해주는 것 아니냐?

하나님은 맨날 나를 왜 제대로 섬기지 않느냐, 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지 응답을 안 하신다.

요시야가 죽고 애굽이 유다에 들어와 그 아들 여호아하스를 잡아가는 바람에 그는 3개월밖에는 왕을 못 한다. 그 동생인 여호야김이 이어서 왕이 된다.

국제정세는 대단히 혼란했다. 여호야김도 대책 없이 혼란을 겪고 있는데 에레미야의 경고는 계속되었다. 여호야김은 그것을 적어 오라고 했다. 그리고 듣는 대로 칼로 베어 태웠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내 말대로 바벨론에 항복하면 내가 너희를 거기서 잘 살다가 돌아오게 하겠다. 그러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는 다 잡혀가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힐 것이다. 자식 죽는 꼴을 보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갈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응답하셨다고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항복하라고 하시는가?
항복은 왕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다. 싸우다 죽는 쪽을 택하겠다. 아니다. 너희는 벌을 받아야 하니 치욕을 당해라. 그러자 왕들은 하나님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한다.

하나님과 이 왕들 사이에는 무슨 싸움이 있었던 것일까? 왕들은 왜 운명을 걸고 하나님과 대치했을까?

(2) 우리는 신약에서 이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소인인 대제사장들의 말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군중에게 물었다.

명절에는 죄수 중에 사면을 해 주는 제도가 있으니 그를 놓아주자.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 사면해 주려면 바라바를 놓아 주십시오.

바로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두가 두 손 들고 종려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했다.

군중 속의 어떤 입바른 사람이 이 찬송은 하나님만이 받으실 찬송이니 말리십시오, 라고 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이 사람들이 입을 닫으면 돌들이 소리할 것이다. 예수님이 찬송을 받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찬송을 받으신 예수님이 마무리를 십자가로 하시는 것을 보고, 기대에 찼던 군중은 배신감을 느꼈다. 죽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라고. 그런 소리 하지도 마.
죽이십시오.

이 두 구절이 정확하게 똑같은 내용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엇을 죽이셨을까? 군중들의 소원을 죽이셨다. 그 소원은 하나님이 권력을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안녕과 행복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셨고, 파도도 잠잠하게 했고, 눈도 뜨게 했는데, 그런 신이 우리의 이 핍절한 현실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죽어 버린다고?

그들은 너무나 분노하고 황당하고 절망했다.

누가 죽는가? 그들이 바라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이가 죽음으로써, 너희가 바라는 것은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르쳤다.

너희들이 바라는 행복, 안심, 정의, 인생, 운명 등은 하나님이 하시자는 것과 너무도 다른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심판자로서 우리를 만드시고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죽으시는가? 우리가 바라는 신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희를 그 정도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려는 것을 위해 나는 역사를 열어 놓고 너희와 씨름하고 있으며 지금 여기까지 왔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라.

다. 결어

(1) 예수 믿는 일에서 가장 큰 시험은 체념이다. 안 믿을 수는 없고, 믿는다고 기대할 것도 없고 대강 살다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는 꼭 가겠다, 고 생각한다.

살아생전에 신앙의 위대함이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예수를 믿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큰소리치는 것도 아니요,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요, 사회를 정화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달라지는 것이다. 너희 인생은 내가 함께 하는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성을 함께 훈련해 가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자 하는 목표이다.

이일은 어디까지가 없다. 자기가 하는 것만큼이 자기의 명예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이 영광이다. 하루하루가 위협과 시험과 도전 속에 있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이겨 나가기를 원하신다. 오늘 하루 실패했는가? 걱정말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 되지 않는다. 너에게 유익이 된다.

(히5:8) 그거 하나만 해결되면 돼요, 라는 것으로 쫄아 들지 말라. 나는 너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이야. 너희는 내 자식이야.
저는 하루 세끼 먹으면 돼요. 제 자존심 좀 세워주세요. 나와라. 거기에 있지 마라.

새로운 경지에 들어가라. 우는 기도하지 마라. 존재와 신분과 현실에서 위대해져라. 주께서 울며 부르신다. 이것을 기억하는 여러분의 귀한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 인간의 인간 됨,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사랑, 믿음, 감사, 찬송, 영광에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루하루를 쌓아서 찬송이 넘치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