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3) (왕하23:24~27)

2022. 10. 16.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므낫세의 아들인 요시야는 놀랍도록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의 열심과 진심을 바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므낫세가 했던 모든 잘못된 것들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다 시정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율법과 제사 제도를 회복했다.

본문은 26절에서 이것을 극찬했는데 27절에는 갑자기 ‘그러나’가 나온다. 진노를 거두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므낫세가 너무 큰 잘못을 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신데 사랑과 믿음으로, 은혜로, 요시야의 잘한 면을 보시고 용서하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결과는 못 한 사람 때문에 심판을 받고 역사를 묻어 버리게 되었다.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우리의 기대는 항상 비껴간다. 그리고 이것은 간과된다. 오늘은 이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나. 본문

(1)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 제도를 부활하고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성의를 다하여 모든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런 정성은 신앙적인 행위이고 신앙적인 정성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런 정도는 기독교가 아니고도 있다.

도덕성과 치성은 어느 종교에나 있다. 도덕성과 치성이 없는 종교는 종교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에 불과 하다면 문제가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부활의 주인이다. 심판자이다. 구원을 위해 그 아들을 주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덕을 지키고 착하게 살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신이 와서 십자가에 죽은 것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

도덕에 대해서는 옛날 시골의 훈장도 할 수 있고, 누구나 언급할 수 있는 문제이다.

“저 사람은 예수 믿지 않아도 천당 갈 사람이야.”

흔히 이런 말을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천당에 갈 사람은 없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서는 천국에 갈 수 없고 예수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주셨는가?

(2) (롬3:23~26) 여기에 나오는 ‘믿음으로’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치성과는 다른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의 믿음이 좋다 할 때, 그것을 쉽게 치열함으로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를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주시는 구원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신 것처럼, 구원받을 사람은 그냥 구원받도록 운명으로 정해 놓으셨다는 것도 증명하셨다.

그래서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모든 죄가 씻기어지고 구원을 얻었다, 고 한다면 이것은 도덕법이다.

물론 도덕을 지키기 위해 신의 피로 씻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을 풀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리를 지키셨다는 것이다.

왜 조폭들은 법이나, 도덕으로 뭉치지 않고 의리로 뭉치는가? 그들은 다 악당이라 법이나 도덕으로는 관계가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관계에 관한 한 법보다 윤리보다 큰 것이다. 예를 들면 가족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리로 묶이는 것이다. 법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못난 자식을 둘 수 있고 부모 같지 않은 부모를 둘 수 있지만, 그 관계를 깰 수는 없다.

하나님이 하려는 얘기는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에서 나는 너희를 지은 창조주로서 책임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는 것이다.

그 책임은 하나님이 우리를 형벌에서 구해내는 것만 아니라, 믿음의 관계를 형성하시겠다는 것이다. 믿음의 관계에서는 더 큰 믿음을 가진 자가 적은 믿음을 가진 자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관계가 성립하면 적은 믿음 가진 자의 배신, 모자람, 짐이 되는 것도 감당을 해야, 믿음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찾게 된다.

쓸모 있으면 믿기로 하고 쓸모없으면 내버린다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에게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키고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셔야 합니다, 라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이 구약 내내 반복이 되었다.

악한 왕이 율법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외면한 것이나 선한 왕이 지킨다고 지킨 것이나 핵심을 놓쳤다는 지적을 받는다.

(호6:6)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너희가 나를 아는 것을 원하노라.

너희의 대상은 “나”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공식을 사용하듯 나에게 예배드리고 그 후에는 보상을 달라고 한다. 그럼 내가 누구란 말이냐?

너희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게 나는 너희에게 목적이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를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을 수 있다. 구약에서는 이 부분이 내내 오해되었고 그런 역사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법을 지킨다. 하나님은 답답해하신다. 너희와 나의 관계가 법적인 관계이냐? 피도 눈물도 없단 말이냐? 법으로 맺어야 온전한 관계가 되느냐?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인격으로 만나야 그 관계가 온전할 수 있다. 그러나 법으로 합시다, 라고 말하는 순간 관계는 무정해진다.

신앙을 이렇게 몰고 가면 안된다.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안된다. 사실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욥이다.

(3) 욥기의 주제는 느닷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욥기에서 욥은 완전한 자이고 의인이라고 설정이 되어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탄을 꾸짖으셨다. 너는 무엇이 못마땅해서 밤낮 시비만 걸고 돌아다니느냐? 욥을 봐라.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주셔서 그렇죠. 어려움을 줘 보세요. 그래도 하나님을 믿을까요?

그래, 그럼 해 보자.

욥은 극도의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봐라. 믿음을 지키고 있지 않느냐?

욥의 몸을 치셔야 합니다. 그러면 배신할 것입니다.

좋다. 해 보자.

욥은 극도의 육신적인 고통을 겪는다. 그래도 하나님을 직접 비난하기는 어려우니 제3자에게 원망을 한다.

우리 어머니는 왜 나를 낳았는가? 달력에 내가 태어난 날자가 없었더라면.

친구들이 왔다. 빨리 회개해라. 네가 지금 고생은 하지만 회개하면 그 전보다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

욥기 13장에서 욥은 말한다. 하나님. 계급장 떼고 한번 얘기해 봅시다. 하나님이 만나 주신다.

네가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뭐냐?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억울합니다.

그럼 너는 지금 네가 잘못한 것이 없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네 자신감은 뭐냐? 네가 감히 내가 틀렸다고 보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나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종 주권자가 아니고 법이 심판자가 되어있다.

법과 권력이 심판자라면 여기에 어떻게 사랑과 믿음이라는 단어가 들어오겠는가?

하나님이 놀리신다. 잘못한 게 없다고?

내가 너를 이런 시련 속에 두는 것은 네 신분과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야. 너는 내 후사야, 너는 내 통치를 이어받을 자식이야. 그런데 법대로 하자고?

(4) 우리 모두에게 걸리는 말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반발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회복한 종교 정화를 뒤엎는다. 그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이상한 짓을 한다. 하나님께 화를 낸다.

하나님. 제 아버지가 이렇게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경배했는데 하나님은 해주신 게 하나도 없어요.

므낫세는 극도로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 있었다. 므낫세를 평할 때 살피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섬겼는가에 있지 않고, 그가 조목조목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그것을 하나하나 다 회개하는 것이었다. 회개만 한다. 우상을 치우고 제단을 쌓고 지웠던 절기를 회복했다.
잘못을 지우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부르심을 받은 명예와 존귀와 믿음과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 결어

(1) 자식이 말을 안 듣고 학교를 안 간다. 속이 터진다. 아침에 가방을 들고 나가서 없어진다. 선생님이 오신다. 선생님께 빌고 자식을 혼을 낸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서 자식이 정신을 차렸다.

이제부터 잘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알았어. 그러니 교과서를 펴. 공부하자.

기독교가 우리를 어디로 떠밀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하자, 를 거부한다.

여러분의 교과서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인생이다.

욥은 어땠는가? 그는 그 처참한 현실에서 대처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욥을 훈련 시키시고 후사로 삼으셨다.

종교 행위를 할 때만 종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반복되는 현실에서 믿음을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 지를 모르고 있다.

여러분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겪어야 한다. 거기서 봐야 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무너지는가? 어떤 시험을 받고 어떤 타협을 하는가?

나는 모르겠다.
(2) 하나님은 이 모르겠다는 속에서 일을 하신다. 나이가 들면 실력이 생기고 철이 들고 분별이 생기고 겪을 수 있게 된다. 어떤 해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원망을 하거나 분노를 해서 풀려고 하지 않고 지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 한계가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이가 들면 믿음이 크고 지혜로워지고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견디는 속에는 부끄러운 일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게 한다. 용서할 수 있게 웃을 수 있게 교제할 수 있게 만든다.

유능할 때에는 아무하고도 교제를 하지 않는다. 혼자서 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간단하게 결과를 주시지 않는다. 겪게 하신다. 하나님은 의리를 선포하신다. (요3:16)

이때 세상은 모두 죄인이었다. 그때 먼저 사랑하신 것이고 하나님으로서의 의리를 다하셨다.

믿음은 비난을 해서 자신을 확인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이 천국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더 나아져야 한다. 능력에서가 아니다. 인간성에서 나야 한다. 아량과 용서가 있어야 한다. 매일 부딪치는 시험이다.

나의 한계와 연약함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이 꼴임에도 누군가에게는 신뢰와 사랑과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자리를 매일 지켜내야 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볼 때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는 위해서다.

여러분이 있는 곳은 따뜻하고 용서가 있고 희망이 있고 위로가 있어야 한다. 눈빛에서 표정에서 넘쳐야 한다. 남들이 알게 된다. 이 사람은 다르구나. 이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다.

이 일을 하나님이 시키신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자. 책을 펴라.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분과 특권을 기억하게 하사 우리의 생애가 우리 스스로의 성장과 자랑과 영광일 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 앞에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와 위로와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