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2) (왕하21:1~9)

2022. 10. 2.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므낫세는 열왕기에 등장하는 모든 남북왕조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므낫세 때문에 더 이상 참지 않고 유다도 바벨론 포로를 만들겠다, 라고 선언하신다.

므낫세가 잘못해서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했으면, 잘했던 왕들, 예를 들어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왕들 때문에 살려 주겠다, 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므낫세의 잘못을 굳이 이유로 삼아 남 왕국마저 멸망시키는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2) 열왕기에는 하나님께 순종한 왕과 그렇지 않은 악한 왕이 번갈아 등장한다. 특히 북 왕국의 멸망을 보고 난 후에도 악한 왕과 선한 왕이 계속 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특이하다.

아하스는 웃시야의 손자이다. 그때는 이사야가 선지자 노릇을 하던 때이고 웃시야는 정직한 왕이었고 그 아들 요담도 선한 왕이었다. 그런데 아하스는 느닷없이 악한 왕이 되고 심지어 아람과 북 왕국의 연합 공격 앞에 놓인 위기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셨는데, 위로와 회복을 약속하셨음에도 아하스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징조를 구하라, 해도 그는 듣지 않았다.

나. 본론

(1)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켰던 신앙을 그는 왜 돌연히 외면하고 심한 반발을 보였는가?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선한 왕이었다. 앗수르의 공격도 막아내고 병도 나았다 그는 믿음의 보상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아들 므낫세가 할아버지 아하스를 따라서 악한 왕이 되어 지독한 악평을 받게 된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이년만에 죽어서 평가를 할 수 없고 손자인 요시야는 히스기야에 버금가는 선한 왕이었고 그 후손인 손자 시드기야 때에 마지막으로 멸망을 한다.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났어? 왜 이렇게 어리석었어, 라고 쉽게 판정한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 잘하면 되잖아? 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겼어?

이스라엘 민족은 왜 하나님을 배반했는가?

그들은 사사기 시절부터 복잡한 대외사정 속에 있었다.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괴롭혔다. 사사기 내내 오랫동안 미디안 족속이나 블레셋 족속에게 또 암몬 족속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고통의 끝에 가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사사를 세우시고 회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섰다. 사사기의 결론은 우리에게는 왕이 있어야겠다, 로 끝이 난다.

부족으로 나뉘어 있으면 국력을 집중하지 못하니까 외적의 침략에 피해를 본다. 왕을 세워서 국가의 힘을 집중하여 외적을 상대하자.

외적만 물리치면 우리는 생산이나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

왕을 세우지만, 하나님께서는 국력을 집중해도 당할 수 없는 외적을 보내셨다. 아람이라는 강국이 있었고 북 왕국은 아람과 연합하여 자주 유다를 쳤다. 아람과 북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훨씬 더 강하고 흉포했다. 그러니 늘 공포 속에 있었다.

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겨서 야단을 맞는가?

하나님은 답을 안 해 주신단 말이야.

하나님은, 저 원수들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라는 간구에 답을 안 하신다. 그러니 우상에게라도 빌었다. 이런 뜻이다.

하나님이 답을 하지 않으신 이유다.

사사기부터 그들은 풍요롭게 살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방탕하게 지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은 외적을 들어 그들의 평안을 깨신다. 위기와 절망이 오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정체성과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난 뭐야? 내 운명은 뭐야? 내 가치는 뭐야? 인간 고유의 질문이다.

이것은 자존심과 경쟁으로 나타난다. 자기의 존재가 별 볼 일 없다는 것에 참지를 못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싸움이었다.

(2) 아하스는 아람과 북 왕국이 함께 유다를 치러 오자 아람의 뒤에 있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드려 이들을 물리친다. 그 후 아하스는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간다. 거기서 아하스는 아람이 섬겼던 우상과 제단을 보고 우리도 이런 강력한 신으로 모시자, 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우상 신전과 제단을 만든다.

열왕기에 나오는 왕들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하나님을 섬겼으면 될 것 아닌가?, 라고 끝낼 수는 없다. 하나님께 구했을 때 응답이 되었다면 안 섬길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으로 안되니까 우상을 찾아간 것이다.

여호와를 믿는 유다보다 우상을 믿는 이웃이 더 센 것이다. 앗수르는 유다를 침공해 왔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치라고 했다. 우리 신이 너희가 믿는 신보다 크기 때문에 우리가 정복자가 된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를 믿기에 이길 수 있다는 헛소리를 믿지 마라.

우리가 신앙 현실에서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체념이다. 예수를 안 믿을 수도 없고 믿어봤자 쓸데가 없다. 도움이 되는 것은 없고 안 믿으면 켕긴다. 우리 모두에게 닥치는 신앙의 시험이다.

처음에는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길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줄 알았다. 지나 보니까 아니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한다.

사사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볶으신다. 우리는 다시 돌이킨다. 난 무엇인가? 그러나 돌아와도 현실은 영생 복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발이 감추어져 있다. 제일 큰 반발이 이것이다.

초신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비난한다.

그래봤자 헛수고야 몇 년 안 가.

구약은 여기를 들추고 있다.

(3) 므낫세의 반발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우상을 불러서 하나님을 섬기던 자리에 두었다. 므낫세는 끊임없이 외친 것이다.

하나님 왜 이러세요? 왜 안 돌아보세요? 이게 뭐예요?

이 반발로 그는 성전에 아세라 신상을 세웠다. 바알을 섬기고 모든 이방 신을 섬겼다. 하나님께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를 건너가야 한다. 50년 전 한국교회를 지탱했던 신앙 윤리는 성수 주일이었다. 그리고 십일조였다.

이걸 안 하면 당장 죽는 줄 알았고 이걸 지키면 만사형통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십일조를 내서 보상을 얻지 못하는데 누가 내려고 하겠는가?

므낫세의 반발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이 일속에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시는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나에게 보상을 주는 신을 내가 만든다는 것이다. 이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우상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신다.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철저하게 제사와 율법을 지키지만 그들의 신앙의 궁극적인 모습은 성경이 모범으로 치지 않는다.

히스기야는 내가 하나님께 모든 정성을 다 바쳤으므로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이런 국력을 준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를 얕보지 말고 동반자로 삼으라.

므낫세는 12살에 왕위에 오른다. 그의 나이로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낫게 되어서 그 후에 낳은 아들이다

이 아이는 어떻게 크고 무엇을 봤기에 최고의 보살핌을 받은 후 뒤집어 졌는가? 아마도 므낫세에게는 당시의 국제정세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므낫세는 반발했다.

자연의 종교성은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한 것만큼 받는다.

모든 종교는 도덕성을 갖는다. 그러나 메시야는 없다. 기독교만이 구원자가 있다. 구원은 우리가 내놓는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다. 여기에는 도덕성이 조건이 되지 않는다.

도덕성은 중요한 종교성 중에 하나이겠지만 기독교에서 도덕성은 가장 중요한 윤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도덕성을 윤리로 갖는다. 그래서 착하게 살면 보상을 받는다는 얘기를 자연 시 하고 도덕성을 강조하여 진정성을 얻는다.

므낫세의 경우 자기 아들을 우상에게 바쳐서라도 그는 진정성을 보이고자 했다. 자기 자신을 바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보상을 못 받으니까 자식을 받침으로써 자신을 받치는 것보다 더 큰 정성을 보이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점검할 때 최소한의 윤리로 확신을 가지며 최소한의 윤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일하심과는 연결하지 못하고 대강 무감각하게 외면하고 산다.

므낫세가 자기의 아들을 받쳤다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내놓는다. 우리가 빌어야 하는데 거꾸로 우리에게 자식을 내놓는다.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우리가 신을 달래서 정성을 바쳐서 보상을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줌으로써, 제발 너희는 시시하게 죄짓지 마라, 너희는 못나고 악한 인생을 살지 마라, 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너희는 내 피조물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다. 내 이름을 걸고 너희를 나의 후계자로 부른다. 제발 나를 따라와다오.

기독교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모른다. 오천 명이 먹었어.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장님이 눈을 떴어.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내놓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부탁을 하시고 있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너희는 내가 나의 영광에 불러낸 나의 창조와 사랑과 열심의 대상들이다. 쉽게 만족하지 말고 타협하지 마라. 포기하지도 마라.

다. 결어

(1) 고생 안 하고 죽어버리면 다냐? 너는 나를 무엇으로 아느냐?

(히6:4~6) 한번 빛을 받고 천국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시킬 수 없다.

이건 공갈이 아니다. 이게 왜 잘못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 자들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모욕하는 것이다.

아들이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한 인생을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고 계시다는 뜻이다.

이것을 오해하여 쉽게 살고, 윤리와 도덕으로, 이것이 기독교야 라고 자신을 속이지 마라.

(2) (엡1:3~14)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도덕과 윤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말들이다. 도덕과 윤리는 최선이 잘못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만 생명을 이야기하고 명예를 얘기하고 기쁨을 얘기하고 영광을 승리를 약속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간절하심이 우리를 지금 붙들고 있고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시험과 도전 앞에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권능을 믿게 하사 감당하게 하옵소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나를 만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자녀 된 영광을 기뻐 찬양하는 승리의 자리에 다 도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