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1) (왕하20:12~19)

2022. 9. 18.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열왕기의 유명한 왕 히스기야는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는 끊임 없이 율법을 잣대로 삼고 있다. 신약으로 오면 예수, 믿음이 잣대가 된다.

율법이 잣대가 된다는 것은, 신약을 위한 어떤 준비, 어떤 전제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이 난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예레미아가 했던 예언처럼, 새 언약에 의해, 우리 밖에 있는 규칙과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심성이 되고 존재의 본질이 되는 인격으로서 결론을 맺는다.

(2) 구약에는 물론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명령을 가지고 있다.

열왕기를 보면 이 명령에 어떤 왕은 순종을 어떤 왕은 불순종을 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약 내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우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에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을 왕으로 집약한다. 그들은 가나안에 살면서 이웃 부족과 국가들에게 군사력에 의한 끝없는 침략을 받는다. 그러니 힘이 필요했다.

열두지파가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중앙집권이 되는 강력한 나라를 원했으며 거기에 책임을 지는 왕을 필요로 했다. 왕을 주십시오.

열왕기에서는 군사력과 정치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왕이 있게 되자 선조들이 요구했던 바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말하자면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을 전반적으로 기록한 것이 구약이다.

나. 본문

(1) 우상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신약시대이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가 쉬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사기와 열왕기는 오늘 신약 성도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남 왕국 유다의 왕이었다면 이것 보다 잘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대답한다. 잘할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가서 묻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게 히스기야 왕이다.

앗수르가 침략했을 때 대책이 없었지만 기도하여 적군 18만5,000명은 하루아침에 죽고 그는 대승을 거둔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통곡하자 하나님이 그의 병을 낫게 하셨다.

얼마나 쉬운가?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에서 사자들이 온다. 이 당시 최고 공포의 대상은 앗수르였고 이 앗수르를 한 나라의 국력으로는 대항할 수가 없어서 아직 국력이 약했던 바벨론은 유다와 우호적인 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히스기야와 약속을 할 만한가? 그 나라에 그런 국력이 있는가?

그래서 히스기야는 국력을 보인 것이며, 왕궁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약속을 지킬 만큼 건강하다는 것도 보였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셨다.

너 미친 짓 했다. 네 후손들은 포로가 될 것이고 네가 보여준 보물들은 다 빼앗길 것이다. 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편히 놔두고 네가 죽은 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히스기야의 뜻밖의 답이 나온다.

내가 사는 동안만 평안하면 저는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우리는 질문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을 받고 평안을 누렸으면 후손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이것이 신앙인가?

하나님과 우리가 규칙과 보상의 원리 속에 있지, 하나님 앞에서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찾고, 고급 함을 찾고, 하는 것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은 것처럼 우리는 살아야 해. 이런 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왜 나라가 이 모양이 될 때까지 있었어? 그래서 쓴 것이 열왕기이다. 후손들은 구체적인 평가는 피해갔다. 하나님을 순종했다,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다, 라고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독자들에게 맡겼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기도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예수를 믿어, 나는 천국에 가. 마치 보험에 든 것 같이 생각한다. 어떤 공식에 의해 이것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다움, 나는 뭐야?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성경도 여기에 동의한다.

(고후5:16~19)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화목했다는 것이다. 화목은 기쁘고 반갑고 감사하고 가장 명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반대하고 혼자서 사망의 길을 걸었다. 스스로 체념하고 혼자서 사망의 길을 걸었다. 스스로 체념하고 절망하고 원망 속에서 무가치하게 살았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들을 보내어 우리와 복되고 영광스러운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다.

왜 예수를 보내셨는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 즉 이렇게까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쓰셨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배신과 무지 속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거기를 뚫고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화목을 이루셨다.

그러니 너희도 화목을 시키는 자로 살아라. 이것이 너희 인생의 목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해야 한다.

너희는 순종하고 그래서 복 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갖추어라. 상대방이 한 것만큼 하는 데서 더 나아가라. 그리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해봐라.

(3) 어떤 율법사가 물었다. 율법의 제일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하나님을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율법사가 다시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예를 드셨다. 그리고 율법사에게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누가 이웃이나?

율법사가 대답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인생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은 제자로 살아야 한다.

내 현실은 왜 이런가? 사회는? 역사는? 정치는? 경제는? 이 생각을 먼저 하는가?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예수는 억울한 정치와 사회 속에 보내진다. 로마의 치하에서 제대로 된 종교적 지식은 없이 율법과 제사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던 시대에 오셨다.

그러니 예수는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은 그게 아니다, 라고 직언을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는 빌라도였다가, 제사장이었다가, 가룟 유다인 셈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자고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죽으셨다.

이런 기도는 안 된다.

코로나 빨리 해소시켜 주십시오
하나님 믿는 정치인이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성경이 하려는 말과 다르다.
예수님께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장 사소한 일이다.

너는 전 우주, 역사, 문화에는 관심이 없다. 너는 그러면 안 된다. 너는 이웃에게로 가라. 너만이 그를 사람대접할 수 있다. 그들이 너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그 보상에 붙잡히지 말아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온 인류와 세상과 화해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이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불러올리시고 제자들과 후손들에게 맡기셨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구성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원하는 형통과 평안이 너희에게 필요한 전부냐? 그걸 위해서 노력하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생이야? 난 너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자신의 생애만이 전부이다. 히스기야가 그랬다. 욕을 먹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분노하신다. 네가 내 사랑의 대상이냐? 네가 인간이란 말이냐?

이러한 태도는 신자들에게 만연되어 있고 신자들은 하나님께 깊이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하는가?

다. 결어

(1) 구약 내내 왜 그렇게 우상이 많이 등장하는가? 보험을 많이 들어 놓는 것이다. 이 신도, 저 신도 붙잡아둔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십계명중 일 계명부터 사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나타낸 부분이다. 무슨 뜻인가? 나 하나로 너희에게는 충분하다. 우리가 소원하는 충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충분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정황에 대하여, 시험과 도전에 대하여, 믿음의 안목과 기준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히스기야가 되는 것이다.

나의 반발, 분노, 저주, 폭력을 하나님은 받아들이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다.

성찬식을 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 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울어서 넘기려 하지 말라.

오늘 부닥치는 경우와 사건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반응을 생각해라. 사람을 항복시키려고 들지 마라. 네가 맡은 만큼 네가 아는만큼, 실력만큼 하루씩 충성해라. 그리고 울어라, 그리고 다시 일어나라. 그리고 감사하는 자리까지 와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을 우리도 포기하고 절망하고 체념했는데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무덤에서 꺼내며 절망에서 꺼내며 더러움에서 꺼내며 명예와 존귀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이 위대한 생애를 사는 우리의 현실, 존재,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