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30) (왕하19:1~7)

2022. 9. 4.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구약 역사의 여러 왕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은, 다윗의 후손 중에 히스기야와 그다음에 나오는 요시아 등 두 명이 가장 뛰어나다.

우상숭배로 혼탁해진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고 우상들을 다 찍어버리고 산당들을 제거했다. 제사 법도를 다시 세우고 율법을 제대로 가르치는 전 국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될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목숨이 경각에 붙어 있었을 때라, 히스기야가 왕이 된 지 4년 만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북왕국을 멸망시킨 나라는 앗수르이다. 남왕국의 주적은 이스라엘 위에 있던 아람이었으나, 아람 위에 있던 앗수르가 점점 커져 아람도 멸하고 북왕국도 멸하고, 히스기야 14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성 중 백성들이 굶주리고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같이 된다.

(2) 히스기야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낸다. 걱정하지 마라, 이들을 내가 하루 저녁에 다 해치우겠다.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군을 보내어 십팔만 오천 명을 도륙했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으며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앗수르의 신전에 제사 지내려 들어 갔다가 칼에 찔려 죽는다.

사실은 앗수르가 침략했을 때 산헤립의 군대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섬기는 신이 너희가 섬기는 신보다 강하다. 그러니 우리가 북왕국을 멸망시킨 것 아닌가?

나. 본론

(1)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역사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전 역사와 신약 2,000년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도 유다의 멸망도 안다. 그리고 그들은 회복되었으나 예전 같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들을 외면한 400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이 등장하시고 구원을 이루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그 후 2,000년 동안 은혜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가졌고 그 신앙이 국가나 사회적으로 힘을 쓰는 유산이 있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우리가 중세라고 일컫는 1,000년 동안의 세월에는 지상의 왕들보다 성직자들이 큰 세력을 가져서 교황이 모든 왕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왕이 통치한다 해도 실제적인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는 보통 주교이거나 추기경들이었다. 영화를 보면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성직자이며 공직자인 배역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히스기야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국란을 이겨냈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교훈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리면 전쟁도 이기게 해준다는 공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사무엘 상 4장에서 아직 왕을 세우기 전에 이스라엘은 블레셋 침공을 받아 싸우다가 패했다. 패전 후 반성을 하는 데,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서 싸우지 않아 우리가 졌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실로에 안치되어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전투에 임했는데 그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법궤까지 빼앗긴다.

승전한 블레셋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당인 다곤 신당에 가져다 두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블레셋의 신 다곤이 목이 잘리고 손발이 잘리고 무릎도 잘려 법궤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할 수도 없고 누가 감히 도전할 수 있는 분도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간절한 기도에도 결과는 처참한 패배로 끝이 났다.

우상은 간절히 구하면 뭐든지 다돼, 라고 인식되고 성경은 그것을 자꾸 교정하려고 한다. 무속신앙은 신이 누구여도 상관이 없다. 나의 정성에 답을 해주십시오.

우상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신을 내가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와 간구에 응답하지 않고, 적군이 방자하게 나오자 이를 응징하신다.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는 하셨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승리가 없었다.

히스기야는 승리가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었겠지만 이런 유다도 얼마 안 가서 멸망한다. 바벨론도 앗수르와 같은 생각을 한다. 우리가 믿는 신이 너희가 믿는 신보다 커서 우리가 너희를 이겼다. 이 조롱을 하나님이 견디신다. 그러니까 종교성이나 지극함이 신앙의 내용이어서는 안된다.

이게 신앙의 내용이 되면,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대상이거나 답을 받는 방식에 치중하게 되고 도덕성과 자기희생과 간절함을 신앙의 핵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신도 간절하면 통한다, 라는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안 통한다.

(2) 이스라엘이 터 잡은 곳은 가나안이고 가나안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꺼내어 정착시키신 곳이다.

하나님은 본인의 선택권이 없는 종을 해방시켜서, 너희의 올바른 가치, 운명에 대하여 생각을 하고 답을 찾으라고 하신 것이다.

가나안은 비옥한 땅이었고 평안과 안녕이 전부가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부패한다. 그리고 세상의 질서는 공포이며 폭력이다. 폭력으로 제압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법도 윤리도 모두 폭력이다. 틀리면 살 수 없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살만해지자 자신들의 정체성과 운명을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남아 있는 이웃 족속을 들어 이스라엘을 종종 치신다.
인간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 앞에 서면 드디어 이런 질문을 한다. 사는 게 뭐야? 난 뭐야? 난 왜 이문제가 해결이 안 돼? 해결이 된다고 한들 반복되면 어떻게 해?

사실은 하나님이 물으신다. 너희 다시 생각해라. 생각 없이 살면 안 된다. 방탕하게 살면 안 된다. 이 도전을 계속하신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한다. 생산은 풍부한데 국방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왕을 요구한다. 이때는 각 부족이 지방자치처럼 독립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를 원했다.

왕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 사울 왕은 살진 가축을 남겼다. 왜 남겼습니까?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남겼습니다.

나는 너희가 폭력을 써서 너희 필요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시키지 않는다. 내 질서는 다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물리쳐라. 이웃을 강탈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내려준 대강령도,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이다.

사울은 전리품을 남겨 오고 사울은 폐위된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희 신은 이런 신이 아니다. 그러니 너희 신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지 말라.

열왕기에서도 이 잘못은 계속된다. 약한 국력으로 이웃 나라들을 상대하려다 보니 힘이 필요했다. 그러자 왕들은 이 힘을 우상에게 빌거나 하나님께도 이 힘을 요구했다. 하나님이 다른 잡신들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하나님이 분노하신다.
우상은 너희가 원하는 것을 위해 세웠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너희에게 요구하는 신이다. 내가 목적하는 대로 너희를 만들려고 하는 신이다.

우리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려면 모든 것을 오냐 오냐 할 수는 없다. 자식들의 불만은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부모가 안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공부를 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하스가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 공격을 물리친 것을 안다. 그런데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하니까 유다는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신도 없어진 셈이다. 이제 남은 신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히스기야는 과격하고 완벽한 종교 개혁을 이루지만 히스기야의 자식은 최악의 왕이 된다. 그러니 히스기야 종교 개혁으로 진정한 신앙회복이 되었다고 볼 수 없다.

(3) 신앙에서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으려면 규칙을 지키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호세아 11장 등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매우 안타까워하신다. 속에 불이 붙는 것 같다고도 하신다.

그러나 호세아 6장에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그냥 둘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찾고 인애를 가지기를 원한다.

인애, 사랑, 긍휼 등이 하나님의 성품이요, 우리에게 원하는 덕목들이다. 그러나 북 왕국도 남 왕국도 하나님을 다른 신보다 더 강한 신으로만 인식했다.

그러니까 내가 필요할 때만 찾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자고 하시는가에 대한 깨우침은 없는 셈이다. 구약은 남북왕조가 포로가 되어 끝이 난다. 예수님 오시기까지 400년이 걸렸지만, 예전과 같은 국력도 없었고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 같은 기간을 보냈다.

출애굽과 가나안의 입성은 다른 것이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 등으로 꺼내 주신 것이지만 가나안 입성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애는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 부모가 나오게 한다. 그러나 애가 학교를 가면 스스로 배워야 한다. 더 좋은 학교를 가면 더 고달파진다.

학교가 좋다는 것은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좋다는 것이지 학교가 처음에는 구리였다가, 은이었다가. 금이 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약 내내 하나님은 무엇을 가지고 씨름하신 것인가? 우리의 소원을 얻기 위해, 도덕성과 종교성을 발휘하면 하나님이 보상을 해주신다, 라는 등식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은 보상을 해주려고 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크기를 원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그 길을 안 간다. 이번에 1등 하면, 그다음에는 학교에 안 가도 되지? 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이건 뭐지? 라는 질문을 할 때 이 질문은 인생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답을 하라고 한다.

로마서 12장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살아있는 생활로 드리라. (롬12:1)

너희는 너희가 결정하지 않은 시대, 사회, 환경, 이웃에 던져지듯이 왔다. 여기는 하나님이 너희를 훈련 시키는 학교이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 여기서 통용되는 습관, 질서, 방식 속에서 너는 아슬아슬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너를 만든다.

우리가 형통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는 해서는 안 되는 기도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고통스럽습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울부짖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왔습니다.

이게 바로 시편이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견딜힘이 없으니 하감하여 주시고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견디는 거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아니다. 그날 하루 자폭을 면하고, 도망가지 않고 견디는 거다.

기능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에게 물었다. 시간이 부족 했을 텐데 어떻게 작품을 완료했습니까?

제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제일 잘한다. 내가 이렇게 시간이 부족하면 다른 선수들은 더 할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

다. 결 어

(1) 우리는 왜 견디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이 열매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은 형통과 안전을 구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공포와 위협과 시험이 들어왔다. 이때 성경은 가르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다운 삶이냐?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라. (롬12:15)

나는 한화의 팬이다.
늘 지는데?
나는 그래서 좋아.
늘 지는 걸 왜 좋아해?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어디가 좋으니?
일단 유니폼이 좋잖아.
너는 눈도 밝다.

좋은 말 해라. 왜 목숨을 걸고 싸우는가?

너 왜 우니?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천국에 가셨을 테니까 괜찮아.

이러지 말라. 이렇게 하라.

야, 참 슬프겠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니?
내가 오늘 밤 같이 있을게.

여러분이 당하는 도전과 시험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겪음으로써 내가 큰다. 시간은 헛되이 흐르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방식이다.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을 지키면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를 능멸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신이 죽음을, 비난을, 조롱을, 고통을, 맛보았다. 구원이란 그렇게 해야 얻어지는 큰 것이다. 온 인류의 역사와 온 인류의 목숨보다도 더 큰 것이다.

(2) 초보 단계에서는 쉬운 길을 갈 수 있다. 커야 한다. 누구를 비난하고 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선수가 아니고 해설가인 것이다.

상대가 너무나 세. 상대가 더 훌륭해. 그러나 나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 도전은 계속된다. 거기서 배우는 경험과 지혜가 우리를 키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만들려고 하는 인간은 너무 놀라워서, 상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과 숙제를 늘 예수님께 미루고 있습니다. 주께서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길을 따라 영광과 명예와 찬송을 열매 맺게 하옵소서. 도망갈 수도 없고 대안도 없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모아 자신의 삶을 주님께 붙들어 매게 하옵소서. 승리의 인생을 열매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