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8) (왕하:16:10~18)

2022. 8. 7.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아하스는 열왕기에 나오는 최악의 왕, 네 명 중 하나이다. 네 명은 여로보암, 아합, 아하스, 므낫세 등이다. 각각의 최악의 내용이 다르지만, 아하스에게 있어서 최악은 매우 복잡하고 깊은 내용이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아하스의 당면 문제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쳐들어오는 것이며 국가의 존폐가 걸려있다.

우리는 쉽게 성경을 읽는다. 아하스는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나쁜 왕이다. 히스기야처럼 잘하지.

그러나 성경은 아하스의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나중에 후손들이 이것을 읽어보고 교훈으로 삼기를 바라고 있다.

(2) 그는 잘했다, 또는 그는 못했다, 고 얘기하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것이다. 판정은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책임은 아무것도 없는 판정이 되어서 마치 자신은 옳은 것 같고, 자기 책임을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 여기를 파헤쳐야 한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나. 본론

(1) 왜 예수가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기독교를 증명하고, 기독교의 근거로 삼는가를 천천히 따라와야 한다.

그래서 이 질문에 답을 얻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데 왜 고달픈가? 왜 내 생각과 다른가?

열왕기 내내 북왕국 이스라엘의 주적은 아람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북한에 해당되고 아람은 중국이고 앗수르는 러시아로 볼 수 있다.

아람은 혼자서는 앗수르를 대적할 수 없어 북왕국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고 유다까지도 연합이 되도록 요구를 했다. 그러나 뜻밖에 유다의 아하스 왕은 이 제안에 불응한다.

그러자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은 함께 유다를 공격하여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왕을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 아하스에게는 국가의 존폐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폐를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하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래 주적이어야 하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가 아람의 뒤를 공격하게 한다.

아하스는 성전의 보물들과 궁전의 보물들을 다 앗수르에 보내서앗수르는 아람을 공격했고 결국은 아람의 수도 다메섹까지 진격한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을 만나러 다메섹에 가게 되고 제단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성전의 제단을 그 모습으로 바꾸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하스는 우상을 섬기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여호와의 성전이 너무 질박하고 부족해 보여서 화려하게 고쳤던 것이다.

반면에 역대하 28장에서는 아하스가 아주 나쁘게 묘사되고 있다. 아하스는 가나안의 신들도 불러오고 여호와가 가나안의 우상들과 격이 같아지는 단계까지 갔다. 혼합종교가 된 것이다.

아하스는 자기 자식을 몰록이라는 가나안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짓까지 했다.

아하스의 할아버지는 웃시야였고 아버지는 요담이었는데 두 사람 다 정직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뿐만아니라 아하스의 자식 히스기야도 선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하스는 이런 가운데 왜 못난 왕이 되었을까?

왕하 15장 37절을 보면, 그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로 되어 있다.

할아버지 웃시야도 아버지 요람도 좋은 왕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하스를 치도록 하셨을까?

이 상황에서 아하스는 이방신을 따라갔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께서 아하스가 닥친 상황을 해결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하스는 간절히 종교적 도움을 요구했으며, 초월적인 힘을 필요로 해서 아들까지도 잡아 제사를 지냈다.

(2) 우리가 신앙 현실에서 가장 해결이 안 되는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덕을 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자들끼리 서로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고 있다.

결국, 아하스는 여러 신을 섬기게 된다. 우리의 옛날 무속신앙과 같다. 누구든지 좋으니 동천지 감귀신 하사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주옵소서. 겨울에 흰 소복 입고 우물가에 나가 냉수로 몸을 적시면서 빌었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왜 우리의 지성에 대하여 감천하시지 않는가? 우리의 간절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왜 답하시지 않는가? 이게 아하스의 질문이었다. 아하스는 혼자서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현실적으로는 필요가 없다.

(사7:1~4, 10~14)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라는 이사야의 말을 듣고도 반발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대를 접었습니다. 나는 관심 없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이사야 7장 14절의 약속을 모두 안다.

동정녀 탄생은 구약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초월적 기적이다. 그런데 이 약속이 히스기야 같이 충성하고 순종한 왕에게 준 보상물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희망을 접었습니다, 라고 한 악 왕 아하스에게 하필 이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아하스가 자기 자식을 죽였다는 것은 아하스에게는 소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 인생은 그저 살아 있을 때 고생하는 것이 끝이다. 살아생전에 나를 형통하게 하는 신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아들을 버린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다윗이 성전을 세우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냐? 내가 주는 자다. 내가 너와 네 집안을 영원하게 하겠다.

사울이 잘못했을 때 집안을 끊었지만, 네 자식들에 대해서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야단칠망정 끊지는 않겠다.

이 약속을 아하스는 끊었고 하나님은 이으셨다. 굉장하지 않은가?

우리는 질문한다.
처음부터 잘 가게 하시면 되지 않나요?
왜 망가지게 두시나요?
왜 자식을 잡는 상황까지 가게 하시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꼭 인간이 되어야 하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져야 하나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한 우리들은 늘 대강 넘어가고 있다. 어쩌란 말입니까?

하나님은 물으신다.

너는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지면 내가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네가 사리사욕을 다 버렸으니 이제는 형통하게 해 달라는 것 아니냐?

내 뜻은 내 아들을 십자가에 잡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질문에 머물러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다윗도 아니고 히스기야도 아니고 우리는 아하스이다.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 증거가 있는가?

우리는 진정한 현실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한다. 왜 이런가요? 이게 무언가요?

편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잊고 산다. 어려워지면 원망한다. 그리고 회개한다. 해결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바라신다. 이 길은 죽음을 넘어서 가야 한다. 고난은 기본적인 과정이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고난만이 우리의 최선을 망가뜨린다. 우리의 최선이란? 도덕성과 종교심이다. 옳고 성실하고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이 자체가 본문이 아니다.
무엇에 대해 진실한가?
무엇이 옳은가?
잘못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가?
의와 진리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십자가로 증명하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인생 내내 볶으신다. 더 가자, 더 가자.

(3)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을 오해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그 결과가 십자가였다. 그 결과가 바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오해는 늘 십자가를 면하게 하옵소서, 에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한다. 우리는 왕에게 보상을 받는 신하나 백성이 아니다. 우리는 자식이다. 그의 기업을 이으며 그의 이름을 잇게 된다. 우리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수님이 우리 중 맏이가 되신다.

기독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며, 신과 연합하여 사랑과 믿음이라는 관계를 누리는 존재로 부름받는 것이다.

우리는 대답한다. 그건 딴 사람 시키시고 저는 고생 안 하고 살다가 죽게 해주세요, 죽은 다음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게 해주세요.

나는 그 꼴은 못 본다. 이게 십자가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길이다. 예수는 우리의 무지와 반발과 포학 속에 자신을 맡기시고 자신을 찢어서 여셨다.

우리는 반발한다. 우리는 외면한다. 그러나 이 현장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여기서 일하신다.

여러분은 도덕적으로 든든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찬송이 나온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이것이다.

우리의 어떠한 절망이나 곡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와 분리되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나를 만든다.

다. 결어

(1) 세상의 모든 종교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한다. 다 도덕성이다. 착하게 살자. 착한 것으로 대접받자.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사망을 극복하는 종교이다. 우리의 자랑과 최선으로 만든 것이 사망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임으로 영생을, 영광을 얻는다.

(2) 우리는 이 현장에서 산다. 시련과 곡절은 나를 만든다. 그렇게 더 큰 목표로 나아가는 위대한 삶을 살자.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밤낮 행복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전부인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십니다. 그 위대함과 영광과 명예와 기적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부활과 승리를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