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7) (왕하:16:5~9)

2022. 7. 24.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아하스 왕은 열왕기 기록 중에서 가장 못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열왕기에 나오는 가장 악한 왕을 아합 왕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아합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고 북왕국의 왕이었다.

그러나 아하스는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너와 네 자손에 대해서는 사울 같이 대접하지 않고 잘못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지언정 끊어내지는 않는 영원한 약속의 가문이 되게 하리라, 라고 하셨던 그 후손이었다.

(2) 아하스의 기록들은 우리를 여러 면에서 놀라게 한다. 그는 놀랍게도 자식을 몰록이라는 우상에게 불에 태워 바치는 제물로 바치고, 아람 왕이 쳐들어오자 방법이 없어서 아람의 배후에 있는 더 큰 세력인 앗수르의 디글랏 발레셀 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성전과 왕궁에 있던 보화들, 심지어는 기둥에 입힌 금까지도 벗겨서 보낸다.

앗수르가 아람을 친 뒤 아하스는 디글랏 발레셀을 만나러 아람에 갔는데, 거기서 그는 앗수르가 섬기던 우상을 베껴왔다. 이 신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신이며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는 신들이다, 라고 하면서 제사 제도와 제단을 바꾼 어리석고도 악한 왕이었다.

나. 본론

(1) 유다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을 유언들은 하나님만 섬겨라, 우상을 섬기지 마라, 였다. 성경은 우상을 거듭해서 경계했다. 아하스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가 심증에 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아하스는 어째서 이 일에 실패했을까?

우리가 그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당시의 국제정세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대단히 불안했다.

(왕하15:32~38) 아하스의 할아버지는 웃시야 왕이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아샤랴 라고도 소개되어 있어 혼란의 여지가 있다. 웃시야는 여호와를 섬겨서 정직히 행하고 나라가 부강해지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위대한 왕이었다.

그러나 웃시야는 승리에 도취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문둥병자가 된다. 그리고 별궁에 격리되어 죽는 날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된다. 요담은 겁이 나서 성전에는 안 들어간다. 아버지를 따라서 정직하게는 했으나 여전히 산당은 남겨 놓았다.

산당은 성전을 짓기 전에 지방에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편리하게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던 제단이다. 원래 의도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 타락해서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과 혼합 종교가 되어 지역에서 원하는 신을 신으로 삼아 많은 배교 행위가 자행되었다.

성전이 지어진 이후에도 산당은 계속 남는데, 특별히 북왕국은 성전이 남왕국인 예루살렘에 있어, 가기 어려워 더욱 많은 산당이 있었고 우상이 성하게 된다.

아하스 때에는 북왕국과 아람의 동맹군이 늘 침입해 왔기 때문에 늘 정세가 불안했다. 위치상 남왕국 유다 위에 북왕국 이스라엘, 그 위에 아람, 그 위에 앗수르가 있었다. 본래는 아람이 강국이었으나 신흥제국인 앗수르가 강성해지자 아람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후 유다에게도 동맹을 요구했다.

오늘날도 유사하다.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으면 미국이 주도해서 인도, 호주, 일본, 한국이 함께 대항하는 것과 같다.

매우 어렵다. 우리는 중국은 가깝고 미국은 먼데, 동맹은 미국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하스도 인간의 재주로는 어쩔 수 없는 아슬아슬한 형국에 놓였다. 그러나 뜻밖에 아하스는 아람의 동맹 요구를 거절한다. 그러자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이 유다를 치러 왔고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왕을 세워 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때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앗수르는 동맹군의 뒤를 공격하여 아람은 망하게 된다. 그 대가로 지불한 것이 성전의 보물이다. 우리는 아하스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은 왜 아하스를 그런 상황에 내버려 두셨을까?

이사야 7장에 의하면 아람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쳐들어 왔을 때 전전긍긍하는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다. 왕이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두 나라가 쳐들어와 봤자, 하나님이 왕을 지키셔서 저 두 나라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불과합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징조를 구하십시오. 징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하스가 답한다. 나는 징조 따위는 구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르다. 징조라도 보면 좋지 않은가? 나중에 히스기야도 징조를 구한다. 해가 뒤로 물러나는 징조를 구하고 징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병이 나았다.

아하스는, 나는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한심하기 이전에 아하스는 전에 많이 구했는데 응답을 못 받았던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많이 구했는데 응답은 적었다. 그러니 우리가 충만하고 늠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은 우리도 관심이 적어진 것 같다.

교회 입구에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써 붙였더니 신천지 교인들이 들어오지 못했다. 코로나도 출입금지 그랬으면 우리가 괜찮았어야 했는데 그것은 안 들어 주시고 우리는 마스크하고 찬양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현실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아하스에 대해 이 바보야, 라고 해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우리도 속으로 불만이 있지만 나타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

왜 아하스는 여기까지 왔을까?

하나님이 아하스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아하스는 대안을 생각했고 그는 우상의 길로 갔다. 자식을 불태워야 했다. 얼마나 치사한 일인가? 보물을 다 갖다 바치고 적들의 신앙에 강제로 붙잡혀 있었던 역사는 참으로 비참했다. 그러니까 하나님,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 해 주셔야죠.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 제목이다.

(2) (고전11:23~27) 성찬 예식은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주님이 오실 때까지 늘 반복하여 기념하는 예식이다.

기독교 사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희생과 고난에 너무 집중이 되어서 엄숙하고 비장한 자리가 된다. 그러나 이 본문의 요구는 주의 죽으심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증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주의 죽으심을 연장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죽으심을 연장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갈때까지 갔는데 주께서 거기에 따라 오셔서 우리를 엎으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주께서 저 멀리 구름 위에서 은혜를 베푸시고 하늘에서 구원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옷 입히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못난 짓을 하고 저항하고 외면하고 고집을 부려서 끝에는 죽게 되었는데 우리 운명의 끝인 그 죽음에서 우리를 엎으신 것이다.

그러니 신앙은 명분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결국은 죽음으로 간다. 예수님은 죽어서 우리를 엎으셨다. 그러니 우리의 남은 생애는 주의 죽으심을 연장하는 것 같이 죽는 자리와 적대행위를 하는 자리까지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부름을 받았다.

그러니까 성찬식에서 감상에 젖어 울고 있으면 안 된다.

아직도 더 가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더 가라고 하시는 거죠?
그만하면 안 될까요?
더 가자.
여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찬양하는 자리이다. 예수님께서도 더 가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왔을 때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여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꼭 그것처럼 너희는 너희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이것이 부활의 문을 여는 유일한 길이다.

아하스는 최악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이 아하스가 원하는 답을 안 하셨기 때문이다. 아하스는 죽는 곳에는 못 간다고 버티었다. 자신이 못 죽으니까 아들을 잡았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원수에게 바쳤다.
세상은 해답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수치와 비참한 결과를 줄 뿐이다. 아하스는 역사적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내가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린, 그 길을 가라.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길이었는지를 보지 않았느냐? 내가 내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웠느니라.

다. 결어

(1) 이건 아니야. 이렇게 해야 돼. 이런 얘기는 필요없다. 여러분 각자의 지금 자리가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고 있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이다.

열왕기는 아하스를 통해 이 이야기를 반어법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세상이 하자는 방법은 결국 끝이 더 추악하다. 더 비참하다. 부끄럽다. 그것은 인생도 아니다. 그러니 아하스를 꾸짖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의 위대한 인생임을 각성해야 한다.

역사는 역사의 인물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것이다. 비난, 정리, 해설에서 벗어나자. 여러분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내는 기적과 믿음과 승리가 있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새삼스레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을 주안에서 확인합니다. 십자가의 길. 그 신비하고 그 놀랍고 경이롭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송과 영광과 권능의 길이 우리 인생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힘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자랑과 기쁨과 승리와 헌신과 충성과 순종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함께 하시고 기적의 인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