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5) (왕하15:8∼22)

2022. 6. 26.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우리가 지난번에 열왕기에서 증명했던 역사는 선한 왕들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삶을 산 왕들이 있었고, 여로보암 2세 같이 악한 왕이었음에도 그때 그 나라가 부흥되고 잘 살았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역설을 통해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를 볼 수 있었다.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 간단한 도덕적 이분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성도들 중에도 나는 진실하고 열심히 사는데 왜 어려운가? 라는 분들이 있다.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권능이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는 오늘부터 진정한 맛을 보아갈 예정이다.

(2) 여로보암 2세는 악한 왕이었지만 나라 살림은 풍요했고 백성들은 풍족했다. 그가 죽자 그 아들을 심복들이 죽이고 정권을 빼앗았다. 이후 이런 일들이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고 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피비린내 나는 정권교체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앗시리아의 포로가 되고 북왕국은 멸망한다.
나. 본론

(1) (암5:21~27) 아모스는 여러보암 2세 시대의 선지자였다. 이 시대에는 많은 우상을 섬기던 시대였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을 배반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간단한 즉결재판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회와 시간을 그리고 인내를 감수하신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과 순종하지 않는 것은, 제사와 율법의 문제를 넘어가는 정의와 공의의 문제라고 아모스 본문은 얘기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꾸짖을 때 이 아모스 5장 24절을 자주 사용한다.

정의를 시행하라. 공의를 행하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크다, 라고 하면서 도전하고 각성을 추구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일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여로보암 시대의 평화와 부요가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하면, 모두에게, 궁극적인 승리는 권력을 잡는 데 있다, 가 된 것이다.

아모스서의 꾸지람은, 권력을 잡으면 승자가 되고 성공을 하고 부요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라는 꾸중이다. 권력이 아니라 정의여야 된다.

세상에서의 정의는 우리가 경험해온 것같이, 절대적인 공평의 기준이 없다. 언제나 공평의 기준은 권력자의 횡포였다. 권력자의 명분이나 핑계에 그쳤다.

세상은 공평과 정의의 기준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잘해야 도덕적일 뿐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공의와 정의를 조금은 무섭게 받아들이는 것은, 여기에는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무섭게 인용한다. 한국교회가 이래서 되는가? 라는 비판을 할 때 이 말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 교훈을 남긴 것은, 여러보암 2세 시대 때에, 사람들이 권력 쟁취를 부흥과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2) 기독교의 정의는 아래에서 설명된다. 정의란 바를 정자와 오를 의자를 쓰는데 영어는 justice라고 쓴다. 우리가 그냥 justice를 정의라고 외운 것이지 특별한 감각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롬3:23~27)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여서 자기의 의를 나타낸 것이고, 우리는 남의 목숨을 뺏어서 우리의 의를 나타내려고 한다.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대조이다.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주어서 자신의 의를 나타낸다. 이렇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이유는 상대방을 의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내는 곳에는 감사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교류하는 사랑과 신뢰의 대상으로 만드신 후, 이것을 정의의 실현이었다, 라고 하신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자, 라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래서 죄 안 짓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믿음을 얘기할 때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폭력성이 숨어 있다.

하나님은 죄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었지만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인간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정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를 말할 때 거칠게 말하면 안 된다. 정의를 말하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접해야 한다. 상대방이 세상적인 법과 규칙에서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는 심판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차별하거나 자랑하지 않아야 한다.

나도 은혜로 이 지위를 얻었어. 저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죽으셨어. 하나님은 창조세계 전체를 회복하기를 원하셔.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 된 것을 꾸짖을 자격이 없어.

예수를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자책이다. 예수를 믿는데 왜 이 꼴이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불만과 약점을 끌어안고 계신다.

(롬4:18~25) 아브라함과 사라는 애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훨씬 넘겼다. 그런데도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아브라함은 능력과 자격이 없어서 속수무책이었다, 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몸이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태평 속에서 편안히 지냈다, 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자기 스스로에게는 그것이 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결실할 수 없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간절하면 받는다고 하는데, 사실 그 간절함은 우리의 초조함 아닌가?

아브라함이 황당하고 절망 속에 있었다는 것이 간절하다는 것의 맞는 표현이다. 간절함이란 의심과 불안을 넘어서 있는 평안함이나 자신감은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자격과 조건이 없었다.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도 자격과 조건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믿음의 길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조가 된 것이고 이 유전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허락되었다.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에 오셔서 우리를 증명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죽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세상을 선포하셨다.

정의 사회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인 예수가 왕 노릇 하실 때에 정의 사회가 세워진다. 인간의 회개가 먼저 있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 죽으셔서 이 정의 사회가 구현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이해할 수 있다. 구원 전에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나는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조건으로 내세울 수가 없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의와 믿음은 항상 자격이 되고 조건이 된다. 여러분이 현실에서 흔들릴 때,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자격이나 조건을 묻지 않는가?

나는 벌 받는 게 맞아. 지난번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이 기다리셨다가 오늘 치시는 거야.

하나님은 매 사건에서 우리에게 권력과 자격을 묻고 계시지 않는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정의이다. 이 정의는 세상에서는 권력이고 공평이고 자기변명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만들어 낸 우리의 지위와 정체성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의도이다.

(3) (사43:1~7)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다. 이 얘기와, 하나님이 유다까지도 바벨론의 포로로 삼으신 얘기는 모순 아닌가?

가끔 하나님은 두렵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다. 엄격함이다. 부모의 엄격함은 자식 사랑이다. 부모가 애를 때려도 울고 나면, 밥 먹어라, 라고 한다. 안 먹어.

이 대답은 배타적인 권력투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안 먹는다는 게 엄마 맘을 찢어 놓는다는 것을 아는 배짱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생애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어렸을 때 매를 들지 나중에는 매를 안 든다. 그러니 부모는 계속 기다려준다. 고집을 부려도 참아준다. 그러나 어떤 길에서 벗어나면 꾸짖는다. 이 모든 것이 다 복이다. 현실에서 성도들은 여기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부족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 애굽은 철저한 조연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신자 한 명을 위해 이 세상 전부와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조연으로 쓰고 계신다.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먼 사람들 내가 이웃하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를 키우시기 위한 배려이다. 하나님의 권능이고 지혜이다. 심지어는 그 아들까지 내어놓으셨다. (롬8:32)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혈연관계와 같다. 오늘 열왕기의 피비린내 나는 왕권찬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키우시기 위한 개입이요, 우리의 유익을 도모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것보다 낮은 법, 공평, 같은 기준을 가지게 되면, 우리도 폭력이 된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는 정권이 보낸 조화를 점잖게 돌려보냈다. 폭력적 정권의 조화는 받을 수 없다, 라는 정치적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화 아닌가? 악당이 보낸 조화를 받으면 악당과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나 악당이나, 내 편 이거나 아니거나, 공평히 대접하신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에 선을 그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이것을 보여주신다.

다. 결어
(1)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은 나를 기억이나 하고 계시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야 당연하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기대에 직접적으로 보상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생각 없이 이 예배당에 앉아 있는 거, 다른 곳으로 못 가고 이 한 시간 예배를 드려야 마음이 편한 것, 이 모두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한다.

(2) 리차드 보쿰의 “십자가에서”라는 책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각자의 경우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백부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백부장이 말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이 조종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소서. 다 이루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호소는 조금 격이 떨어져 보인다.

백부장은 달랐던 것이다. 작가는 평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자만이 그 분리를 이렇게 괴로워 할 수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헤어지면, 세상에 널려 있는 게 여자야, 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백부장은 순간 깨달았다. 인간이 가진 사랑으로는 분리된 사실을 저렇게까지 아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자와 성부의 사랑.

물론 백부장은 이 사랑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의 고통이 신과의 분리 때문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3) 하나님과 우리가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만큼 이 사랑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놓지 않노라. 내가 온 세상과 바꾸어서라도 너를 지키겠노라.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기억하는 오늘의 말씀이 되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직도 잘 모르는 초보입니다. 감사와 기쁨은 적고 불평과 불만은 많습니다. 심지어 공포와 불안과 의심이 우리의 신앙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가 자식을 키울 때를 생각해 보면 저희는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면 우리도 우리 부모님 덕에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이 큽니다.

이것보다 더 큰 우리의 존재, 정체, 명예, 건강, 운명, 등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이것을 사랑으로 이루셨습니다. 날마다 한 걸음씩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입술에 더 많은 찬송과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