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4) (왕하14:23∼29)

2022. 6. 12.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이름은 여로보암이다. 본래 여로보암은 솔로몬 말년에 솔로몬의 압제, 즉 성전을 짓고 왕궁을 짓고 하는 노역에 지친 백성들을 대신하여 왕에게 저항했던 사람이다.

아마도 노동관계의 책임자로 보인다. 솔로몬의 폭력을 피해서 애굽으로 도망갔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를 그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북왕국을 여호와 신앙에서 이탈시키는 대표적인 왕이었다.

열왕기의 말미에 가면 각 왕의 공로와 치적을 평가할 때,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 또는 다윗의 길로 갔다, 고 나눈다. 여로보암이 악한 왕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이다.

본문의 여로보암 왕이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어떤 혈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을 받은 것만 보아도 정치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별로 집중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 그는 하나님을 외면했기에 악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북 왕국은 대단한 부흥을 이루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요아스와 아마샤가 하나님께 정직했으나 비참한 최후를 당했던 것을 살펴보았다.

여호와 앞에 정직했으나 그들의 생애는 심복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마감되었으니 비참하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반복적으로 얘기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도덕법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이해했다.

다시 확인해 보자. 욥기에서 욥은 의인이었고 친구들은 욥이 잘 못 했다고 공격한다. 네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 아니냐?

그러나 욥은 버틴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

친구들은 반격한다. 네가 말을 그렇게 하는 것만 보아도 네가 잘못한 것이다.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하나님이 틀렸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등장하시고 욥을 꾸짖으신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등장하신다. 너는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처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욥기 13장에서 욥은 탄원한다. 하나님 계급장 떼고 한번 얘기해 봅시다. 이렇게 대들었던 욥에게 하나님은 이제 꾸중하신다.
네가 나에게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도전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무엇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이 틀렸으면 틀렸지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했느냐?

욥이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도덕법 이상의 창조의 세계를 보이신다. 그것은 규칙이나 조건이나 논리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와 부활의 질서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를 당신의 목적 아래에 두고 간섭하고 계신다.

나. 본론

(1) 선한 왕들이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가? 성경은 답한다. 기독교에 대해, 기독교의 핵심은 격상된 도덕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진실하고, 지극한 최상위의 도덕법으로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창조와 부활의 질서 속에서 인도하시는 대상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역사는 왜 이 못난 짓을 반복하는가? 일관성도 없고 정의도 없다, 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역사에서 하나님을 빼놓으면 세상 역사는 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기독교인들만이 하나님이 왜 이런 역사를 허락하시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선한 왕들이 도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오늘 여로보암이 받은 보상을 보자.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 가운데 두신 것은,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상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주시는 단순한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기도 하시고 위로하기도 하시고 용서하기도 하신다.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다. 그들이 출애굽하고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거절한다.

하나님은 노하셨다. 출애굽의 목적은 너희를 약속의 땅에 보내기 위함이었다. 내가 너희를 내 자녀로 삼은 것도 내 자녀다운 수준까지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한다면 너희는 이 광야에서 죽어야만 한다. 강력한 역사의 경고이다.

40년 생활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명기 8장에서 그 의미를 설명하신다. 너희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맬 때도 너희는 굶주리지 않았고 너희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너희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그러면 왜 헤맸냐?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게 하려고 그랬다. 나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하는 것 같이 40년간 너희를 징계했다. 너희는 여호와 말씀에 순종해라.

(2) 우상숭배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즉 하나님이 핵심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자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그러니까 고생이 되더라도 이 길로 와라. 우리가 다시 기도한다. 그거 말구요. 제 뜻은 다 버렸으니 행복과 평안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순종에는 하나님이 빠져있는 것이다. 순종에는 자기 욕심이 빠져야 하는 데 우리는 말만 그렇게 해서 순종이 허당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자고 하시는가?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시고자 하는가?

하나님은 너희의 생존을 위해 있지 않다.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알려 주신다. 나는 내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고 너희를 구원했다. 그것은 너희를 영광된 자리로 불러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도덕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나님은 그것을 전복하는 역사로 우리에게 도전하신다. 구약에서 가장 하나님을 대표하는 칭호는 이것이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이 세 명은 생애는 중요하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하시려는지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설명된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이고, 1장은 창조이고 3장에서 벌써 인간은 결단이 났다. 아담과 하와는 추방된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죽은 존재였다. 하나님도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다. 노아 홍수로 모든 것을 심판하셨다.

노아 가족 8명만 살리셔서 새로운 인류를 시작했는데 그 인류도 심판 전 인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도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자. 하나님과 대등하게 되자.

하나님이 내려오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흩어 버리기만 하셨다.

이런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11장까지의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 설명 없이 12장에서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사망을 피해갈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하나님은 느닷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로 복을 삼겠다. 너로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 는 내가 저주하겠다, 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는다. 이삭은 낳을 수 없을 때 낳았고, 죽이라고 하셔서 죽이려고 했던 아들이었다. 이삭에게는 창조와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또 통치의 방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아들인 이삭에게만 전해지는 유산이 되었고 이 유산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된 것이다.

야곱은 창세기 28장에서 벧엘 사건을 겪었으며 나중에 창세기 32장에서 얍복나루 사건을 겪는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적 조건과 자격을 갖기 위해 장자가 되려고 태 속에서부터 다투었던 사람이다.

다투다가 지니까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라도 나올 정도로 싸웠다. 결국은 차남이 되었다. 그는 장자권도 사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도 받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형에게 미움을 사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거기서 많은 노력을 해서 거부가 되지만 얍복 나루에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야곱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었고 기대는 없어졌다.

야곱은 홀로 남아 쓸쓸하게 넋이 빠진 채로 남게 되었다. 하나님이 등장하시고 씨름하시고 야곱이 항복하지 않자,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다. 나는 가겠다. 나는 너와 상관없다.

야곱은 축복하시지 않으신다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버틴다. 이 돌연한 요구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역사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이 물으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그래 너는 네 필요를 네 힘으로 강탈해 가던 사람 아니냐? 그런데 왜 복을 달라고 남에게 애원을 하는 것이냐? 그러나 야곱은 애원을 계속한다. 제게 복을 주십시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라. 네 이름을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니라.

너는 고아란 말이지? 너는 보호자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네가 필요한 것은 네가 뺐을 수밖에 없었단 말이지?

내가 네 부모다. 내가 네 아버지다. 다시는 너를 고아라고 하지 말라. 너는 내 자식이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를 보았느냐?

굉장한 일이다. 20년 전 벧엘에서 야곱은 도망을 치는 자였다. 도와줄 사람은 없고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했다. 돌베개를 베고 광야에서 잘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내가 너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 씨가 티끌같이 많아져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20년이 걸린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는데 왜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3)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법 하나를 지켜서 되는 일이 아니다. 정직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큰 존재가 되어야 한다.

큰 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성의 성숙이다. 우리는 도덕법으로, 또는 종교적 열심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려 한다. 이렇게 되면 남을 비난하게 된다. 도덕성을 갖추고 종교성을 갖추어도 보상이 없기 때문에, 남을 비난을 해야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된다.

성가대를 하려면 옷도 좀 잘 입고 머리도 단정히 하고 오지, 아니잖아.

남을 비난하는 것이 자기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은혜가 있어야 한다. 반가움이 있어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우리 애들이 잘못할 때 우리는 판정을 내려 버리지 않고,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혀를 찬다. 철은 언제 드는가? 나이가 들어야 든다. 학교공부처럼 주입이 되지 않는다.

유년기, 소년기,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를 다 지나서 나이별로 그 때 수준으로 배워서, 앞으로 나아간다. 무엇이 남는가? 후회만 남는다. 잘했을 리가 없다. 커보면 그때 잘했다고 한 것이 잘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선생님 쟤 졸았대요. 이렇게 지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친구를 가려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성숙도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기다려 주는 것, 용서하는 것, 위로하는 것, 편이 되는 것. 예수께서도 죄인 된 우리 편이 되어 우리가 죽을 자리에 대신 가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키우시기 위해 여러 경우들을 만나게 하신다. 원망의 자리, 우기는 자리, 등을 만나게 한다. 만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커나가겠는가? 교과서에는 없는 얘기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는 이해가 간다.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 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망을 면하라고 하시지 않고 생명을 키우라고 하신다. 생명이란 번성하고 찬란하고 무성하고 충만한 것이다. 아름다움이 끝없이 펼쳐지고 자라나는 것이다. 무엇이 아닌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좋은 말 하기는 참 힘들다. 상대방의 하소연에 우리가 정답을 말할 필요는 없다.

속상하지? 얼마나 안타까워? 잘 참고 있구나.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할게.
그러나 우리는 흔히 반대로 한다.

네가 교회 안 나올 때부터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빨리 회개해라.

부모가 자식을 다루듯 해야 한다. 자식의 유익을 위해야 한다. 자식의 못난 말은 이렇다.

왜 나를 낳았어요? 결국, 돈 많이 벌어오라는 거 아니에요?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이 철들었네, 라고 하시겠는가?

기독교는 다른 것이다. 역사가 왜 이 모양인가? 역사를 통해 배우라고 하시는 것이다. 거기서 네가 크는 거야.

어느 학교가 명문이라고 할 때 그 학교 건물의 층이 해마다 하나씩 높아지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 학교의 졸업생 중에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다. 결어

(1)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 믿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세상에서는 갈등과 한계를 느끼지만, 교회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교회에 오면 공연을 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봉사를 맡으라. 우리가 무대를 봤다고 할 때 물리적인 무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무대 위의 공연을 보았다는 것이다.

연예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잘 된 공연을 볼 때, 무대를 찢었어, 라고 한다. 무대를 찢었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과 만족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법이나 논리가 너무 단단해서 무대가 찢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연은 무대를 찢어야 한다.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역사와 현실과 인생으로 매일 도전하신다. 찾아오신다. 그러나 우리는 대강 산다.

(2) 우리는 나이가 들면 후회와 회한이 든다. 그러나 그 회한 때문에 우리가 젊었을 때 가지지 못했던 온유함과 따뜻함과 기다림을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보낸 세월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적지로 데려오기 위한 통로였다. 나이 먹는 것을 겁내지 말라. 우리의 후회와 절망은 우리를 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을 접어버리는 시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승리하는 기적의 삶을 살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을 허락하사 우리로 고민하며 걱정하며 울며 주 앞에서도 반발하는 생애를 살게 하십니다. 우리보고 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한계와 현실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간섭하십니다. 그러니 순종하게 하옵소서. 실력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과거가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절망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와 권능을 허락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