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2) (왕하 14:23∼29)

2022. 5. 15.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울왕부터 처음 왕정이 시작되며 그 뒤를 다윗과 솔로몬이 이었다. 솔로몬은 우리가 아는대로 가장 영광된 지위와 부를 누렸지만, 그의 통치는 백성들의 불만을 샀고 나라는 둘로 쪼개진다.

북왕국 10지파가 솔로몬을 떠나 왕국을 만들고 왕을 세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으시면서 경고하신다. 내 말을 듣고 내게 순종하라. 그러면 네 날이 길고 네 가문이 복을 받으리라, 라고 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잘못한다.

열두지파 중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왕국으로 남고 북왕국은 더 큰 국민과 영토를 가지게 되었지만 자신의 권력에 정치적 혈연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금송아지 둘을 세운다.

하나는 가장 북쪽 경계에 두고 하나는 남쪽 경계에 두어서 백성들이 남왕국 유다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을 금지한다.

열왕기에 나오는 왕들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아주 특별한 업적들을 나열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 업적을 평할 때 여로보암의 길을 갔다, 다윗의 길을 갔다, 라고 둘로 나뉜다.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는 것은 잘못했다는 것이고 다윗의 길로 갔다는 것은 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왕조에서는 한 번도 다윗의 길을 가는 왕이 나오지 못하고 남왕국에서는 몇몇 소수의 왕이 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의 대단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정도이다.

나머지 왕들은 북 왕국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을 간다. 그 결과 두 나라는 다 망한다.

나. 본론

(1)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왜 그리 큰 잘못이었나?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초기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모세가 늦게 오자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공포 속에서 안심을 찾으려고 만든 것이 금송아지였다. 그리고 그때 금송아지에게 붙인 이름이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이니라, 였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의 이름도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 로 붙였다.

애굽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여호와 신앙에서 떠난 것 같지는 않지만,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의 안심을 도모했다는 것은 큰 잘못으로 지적된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해 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을 무슨 의미가 있기에 성경은 그토록 엄한 심판을 하시는 것일까?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권력과 지위와 통치에 대하여 열심을 내고 확보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왕이 먼저 한 일이 주변 국가들을 물리친 것이었고 주적이었던 팔레스타인(블레셋)을 물리치는 전쟁의 공을 많이 세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사울이 삐끗하게 된다. 사울은 아말렉의 왕도 살리고 많은 전리품을 남겨 온다.

전승기념 제사를 드리려고 백성들이 모였는데, 사울도 자랑을 하고 싶은 그 자리에 사무엘이 늦게 도착했다.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지낸다. 사무엘이 꾸짖었다.

왜 나 없이 제사를 지냈습니까?
당신은 늦고 백성들은 불안해해서 그랬습니다.
사무엘이 다시 묻는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왕인 아각도 살리고 이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왔습니까?

이것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남겨 온 가장 좋은 양 떼와 소 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한 것은 순종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먼저 받쳐야 합니다. 불순종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성도들에게 순종이란 추상명사가 아니다. 불순종이란 자신이 스스로 우상에게 순종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우상 숭배란 우상 숭배자가, 자기가 만든 신에게, 즉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순종이다. 다른 말로는 욕심이다.

우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소원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종교심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안심한다.

사울은 사무엘이 퍼부은 심각한 저주를 깨닫지 못하고, 그래도 밖에 나가서 나를 왕으로 높여 주시오, 라고 요구한다. 사무엘은 거절한다. 나는 백성들 앞에 가서 당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아 사무엘의 옷이 찢어질 만큼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고 결국은 사무엘이 사울을 인정하는 종교적 의식을 치루어 준다.

여기에 극적인 불순종과 우상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셈이다. 우상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다. 다른 신을 만든 것이다. 이 다른 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욕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늘 하나님께서 조롱하시듯이, 눈이 있으면 보기를 하냐, 입이 있으면 말을 하냐, 너희들이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가서 엎드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 아니냐? 그게 얼마나 창피하고 어리석은 것이냐?

이 야단을 반복적으로 맞고 있는데도 우상에 대한 잘못은 반복적으로 저질러진다.

그러니까 우상은 그까짓 점쟁이를 믿어? 라는 비난을 넘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는 큰 죄가 먼저인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기만과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보상을 믿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으로 하셨나?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만드시나? 그렇게 채워진 내용들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다.

(2) (엡1:3~12) 여기 매 절 마다 예수가 등장하고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로 되어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조의 목적과 그 아들을 보내어 구원하시는 과정들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 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만 한번 마음에 회개를 한다든가, 결심을 한다든가, 각오를 한다든가, 하는 단어들이 아니다. 구원자가 육신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를 그가 친히 몸으로 겪어, 몸으로 죄짐을 지심으로 수치와 죽음을 당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낸 승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임을 안다. 구원은 애굽을 나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죄에서 나와야 영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시작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을 창조부터 준비하셨고, 이 영광은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은 단순히 죽지 않게 되었다, 가 아니다. 생명과 존재의 가치와 운명에 있어서 하나님이 목적하신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길다. 예수님이 33년을 사셔야 했던 과정이고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중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40년이다.

그리고 사사기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위하여 주시고자 했던 꼭 필요한 것, 자유를 연습시키셨다. 우리는 자유의 권리는 쓰고 자유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다.

왕정 시대가 오고 왕권까지 주었지만, 왕들은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폭력으로 썼다. 위대한 일을 만들지 못했다. 이것이 구약의 기록이며 증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고난으로 불려간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로 영광에 가는 것은 아직 되지 않고, 현실에서는 불안과 갈등 속에서 산다. 그래서 우상을 만든다. 우상은 체념이기도 하고, 변명이기도 하고 비명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점쟁이에게 가면 그 말을 다 믿는가? 여러분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여러 점쟁이를 찾아다니다가 원하는 답을 얻으면 안심을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현실이 등장한다.

우리는 그 뜻을 알지 못한다. 알면 해결을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은 얻었으나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자 후렴 같이 불평을 했다. 돌아가자. 여기는 먹을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는 하나님께서 자유를 위해 시험하시는 길이었다.

광야 40년 동안 나는 너희를 시험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다. 너희는 떡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떡으로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거 더이상 필요 없고 어려운 일 없고 고생할 일 없는 것이다.

예수 믿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제가 큰 거 바라지 않습니다. 제발 하나님 앞에서 울 일 없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어려울 때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와서 울 수 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간증이 되고 있다.

하나님 어쩌란 말이십니까? 저 보고 어떻게 하라구요? 이렇게 시작하지만, 하나님 성실한 결론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지를 못한다.

(히6:4~6) 히브리서는 출애굽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배교의 위험 속에 있었다. 순교의 두려움 속에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늘 흔들렸다. 이런 성도들에게 보내졌던 편지이다.

너희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라. 저들은 광야에서 실패했다. 애굽을 나온 것이 전부가 아니고 애굽을 나왔으면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데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실패했다. 너희는 그러지 마라.

한번 비췸을 받고 영생을 맛보고, 그리고 타락하면 구원할 방법이 없다.

이 말은 구원이 취소된다는 뜻이 아니다.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 너희가 여기서 타협하면 너희는 예수의 십자가를 현저히 모욕하는 것이다. 그렇게 야단치고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에서 꺼냈다. 지위와 신분과 운명이 다르다.
무엇을 주려고 했는가? 자유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께 나를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다. 바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3) (요17:20~26)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는 것처럼 나도 저희를 보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어 다 우리 안에 있게 하사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이다. 거의 유언같은 기도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어 나가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베푸셨고 실제로 능력을 행하셨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임을 아셨고 또 그것을 순종했다.

우리는 산을 옮겨 주십시오, 바다를 갈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는 더 큰 방법이 있단다. 내가 그런 방법으로 할 수 있음을 너는 순종해라. 나를 믿어라. 네 상상과 욕심보다 큰 곳으로 내가 너를 부르고 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우리 사양한다. 하나님 거기까지는 꿈도 안 꿉니다. 그저 살아생전에 남한테 손가락질받지 않게 살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 외에는 할 줄 아는 기도도 신앙고백도 없다. 그러니 숨어 살 듯이 신앙생활을 한다. 내가 지금 어려운 것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다른 교우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해 버린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좀 더 고급한 단계에 우리가 들어갔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하나가 해결되어서 우리가 한 단계 높아지면, 하나님꼐서는 그만하면 됐다, 라고 하시지 않는다. 언제나 더 가자, 라고 하신다.

더 가자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영광이며 명예이며 생명이며 진리이며 넉넉함이며 부요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급급하다. 여기에 우상이 들어온다. 우리가 특별한 형상을 만들거나 특별히 매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그를 믿는다는 말에서 늘 물러선다. 타협한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여기를 꾸짖는 것이 여로보암이다.

(마16:1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나 나는 죽는 길을 가야 한다.
베드로가 말렸다.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그리고 제자도가 나온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고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이것은 금욕을 요구하거나 고통 속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 결어

(1) 하나님께 신앙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는 길을 가라는 것이다.

어떤 일은 견딜 수 있고 어떤 일은 견딜 수 없다.
이만한 게 다행이다. 나는 이건 못 참겠어.
모두에게는 안 그러시는데 왜 나한테 이러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하나님은 우리를 끌고 계시며 우리는 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는 무엇을 만드시자는 것인가? 무엇을 하시자는 것인가?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이 아신다. 여러분은 하나의 일이 지나고 보면 그 일을 당했을 때와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을 적어도 자기 인생을 통해 알게 된다.

좋은 학교 들어간 것은 복된 일이지만 나는 좋은 학교에 못 들어 가서 덕분에 철이 들었어.

잘못한 것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에다가 하나님이 잘한 것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신다.

내가 주를 위한 꿈과 소원이 큰 것에만 당신을 담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쩔쩔매고 어쩔줄 모르는 곳에도 하나님은 동일한 권능, 지혜를 담으실 수 있다, 고 믿는 것이 신앙인의 인생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존이며, 우리의 한계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려는 영광이다.

(2) 잉태하지 못 하는 자여 너는 노래하라. 애를 못 났는 것은 굉장한 큰 벌이었다. 소망이 없는 것이다. 잉태하지 못한 자여. 네 후손이 저 열 아들 가진 자보다 많을 것이다.

실감이 안 나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자식은 하나님이 준 자식 이삭이었다.

하나님이 이삭을 약속하셨을 때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이삭이다. 사라는 비웃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하셨고 우리는 역사의 실존에서 이것을 보고 있다.

내가 그 증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그 찬송을 부르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여로보암은 이 길을 가지 못해 비난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은 다윗의 길을 따르는 복된 신앙의 성숙이 있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렇듯 크고 세밀하시고 놀라운데 우리의 신앙은 잘 자라지 않습니다. 고통에 매여서 승부에 매여서 하나님의 기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완벽한 조건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만드시는 기적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을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 더욱 채찍질하여 위대함과 영광을 우리 스스로가 확인하는 복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