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20) (왕하 9:1∼10)

2022. 4. 17.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부활절에는 맞지 않는 본문인데 결론에 가면 부활절의 의미와 이어질 것이다. 열왕기에서 가장 악한 왕은 아합인데, 아합은 악의 화신인 것이 아니라 뿌리가 없고, 은혜와 생명이 없는 자는 바람에 날리는 대로 굴러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시편 1편이 생각나게 한다.

복 있는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 같고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는 말씀처럼, 그때그때 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합은 가장 악한 왕이 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약속했던 대로 하사엘이 벤하닷을 이어서 왕이 되고,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아합이 죽고 아들 요람이 왕이 되었다. 요람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고 예후가 정권을 빼앗았다.

(2) 열왕기에는 특별히 북 왕조에서 대를 이어 역모와 반란이 일어난다. 이런 왕조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성경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 험한 역사를 남겼는가?
(신28:36~46) 여기는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있을 때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살아라,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요, 불순종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그 벌 속에는 약속의 땅에서 뽑혀서 외국으로 잡혀가고 거기서 처참한 생활을 할 것이다, 라는 예언이 먼저 나온다.

우리의 기대대로 하자면, 그 상황까지는 가지 않게, 도중에 가벼운 징계로 돌이키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비극적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본론

(1)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이 미리 작성하신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순종을 하면 복을 받지만, 벌을 받으면 여기까지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다만 벌과 징계를 위한 것이라면, 말씀이 너무 구체적이고 너무 계획적인 것 아닌가?

(사 61:1~6) 이 약속은 포로된 자리에서 주신 약속이다. 모든 이방보다 뛰어나고 너희를 압제한 자에게서 노획물과 보상을 받을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신명기에서 아직 죄를 짓기도 전에 나라가 멸망하는 벌을 약속하신 것 같이 여기서는 거꾸로 회개하지 않고 불순종하여 잡혀 온 포로된 자리, 즉 절망과 비명만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하나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말씀하시고, 홀로 꿈을 꾸듯, 노래하듯, 약속을 내리신다.

우리가 이 둘을 비교해 볼 때, 그들이 벌을 받기 전에 하신 경고와 그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소원할 능력도 없는데 주어진 미래에 대한 약속은, 이 둘 사이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한다.

잘못해서 벌 받았다, 돌이켜서 복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논리가 여기에는 없다. 저주와 경고가 극심할 수는 있으나, 그 벌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 벌을 면제해 주거나, 혹은 회개를 해서 회복이 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하나님의 꿈이 약속된다는 것은, 포로인 이스라엘 백성은 꿈꿀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잘못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라는 얘기인지, 너희는 벌을 받아야 영광의 자리에 간다, 라는 얘기인지 잘 모르겠고 우리에게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경고한 대로 그들은 불순종해서 멸망했다, 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전혀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꿈이 약속된다면, 즉 너희는 나의 영광, 나의 복된 백성, 만민 위에 뛰어날 것이다, 라고 하신다면 얘기는 다르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후자라면 이스라엘이 포로가 된 것은 단순히 잘못해서 벌 받은 것을 지나서 포로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어려운 경우는 우리가 어떤 사안을 인과율과 도덕과 법으로만 이해하려고 할 때이다. 잘하면 복 받고, 못하면 벌 받고, 만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나 잘못한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잘못해서 벌 받고, 잘해서 복 받는 경우도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해서 벌 받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2) (롬7:23~25) 23절의 “나”는 내 속에서 늘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늘 이기는 것은 죄의 법이다. 그래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이 사람은 24절에서 답을 얻은 것처럼 보이고 그 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렇다면 25절은 당연히 나는 이제 예수님 덕분에 죄 안 짓고 살 것이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죄의 법을 섬긴다는 비명을 반복한다. 갈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 열왕기 본문은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배반하고 불순종하면 너희 나라까지도 망한다. 그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뽑혀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뽑혀서 포로로 간 그곳에서는 뜻밖에 내가 너희를 회복할 것이며 너희의 황폐한 집을 다시 수축할 것이고 모든 나라에 대하여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섰기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고 아직도 그들은 정신 못 차리고 비탄에 빠져 있을 때 하신 것이다.

앞에 하신 말씀은 우리의 논리나 이해력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뒷부분은 난해하다.

우리가 알기 쉽게 이해하려면 이래야 한다.

하나님은 경고하셨고 우리는 정신 차리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우상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영광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뿌리 채 뽑아 이방의 포로로 삼으셨는데 그렇게 비참한 우리에게 오셔서 갑자기 너희는 내 영광이요 내 제사장 나라이다, 라고 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만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이름도 모욕을 당하는 자리에까지 오게 하신 후에 어떻게 이런 약속을 하시는가?

로마서 7장 답을 한다. 나는 선한 의지가 있지만, 그 의지는 항상 지고 나는 죄를 진다. 그래서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다. 감사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에 지고 있다.

해결은 로마서 8장 1절부터 시작이 된다.

(롬8:1~2)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그러니 죄를 지어도 죽지는 않는다. 여기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다.

죄를 지어도 안 죽게 할 거면 죄는 왜 짓게 하는가? 인간은 이런 철없는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답하신다. 너는 죄를 짓는다. 그러나 그 죄로 너는 죽지는 않는다. 나와의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죄는 너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해 나가는 또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은혜를 베푸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이 함께 일을 한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경험하는 현실이다. 여러분의 신앙이 좋으면 좋을수록 죄가 크게 느껴진다. 우리가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어지간히 큰 죄를 짓지 않는 한 자신은 평균이라고 생각한다.

열심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죄의 짐이, 죄의 상처가, 죄의 후회가, 죄가 가지는 위협이, 우리 마음에 더 큰 짐이 된다.

이걸 제거해 주십시오. 이것을 모든 신자가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 그게 일을 하기 때문이다.

죄는 어떻게 일을 하는가? 모든 고난은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우리가 고난으로 죽어버리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최악의 재난이 되지만 우리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를 훌륭하게 만든다.

(3) 요즘 최고로 인기있는 작품이 빠찡꼬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사람들이 악질로 구는 바람에 우리가 훌륭하다는 것이 현실로 입증되었다.

우리는 서양인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생겼다. 우선 눈이 그렇다. 요즘은 눈이 많이 변형되었지만, 우리 민족 고유의 눈은 작아서 웃으면 안 보이는 정도였다.

지금 우리는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 주목을 받는다. 지금까지는 유대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졌는데 알고 보니 한민족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용기를 낼 때, 내가 용기를 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환영받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듯이 발만 올려놓으면 올라갈 수 있다면 용기는 쓰일 데가 없다.

용기란 불이 붙어 있는 곳을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생기는 덕목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무엇을 만드시려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다.

죄를 안 짓는다, 죄를 없앤다, 하는 차원을 지나서 죄를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신으로서 십자가를 없앨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계를 지닌 인간이 되어 십자가를 졌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이것이 십자가다.

우리가 순수해서 훌륭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반대와 혼란 속에서 명예와 위대함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롬12:14~21)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악인들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경우, 우리 마음에는 보복심리가 있다. 너는 나쁜 놈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선한 길을 선택한다.

네가 하는 행동은 잘못된 거야. 나는 이렇게 착한 사람이야.

악당이 악한 일을 할 때 그걸 뒤집어 나를 증명하지 말고, 보복도 하지 말고, 너는 너의 역할을 해라. 악당에게 잘난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 왜 그런지 알아?”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울 때 같이 울 수 있어야 하고 웃을 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마치 구름 위에 있어서 그들과는 다른 것 같은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네가 지고 있는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안다. 사실은 나도 내 짐이 무거워 그만두고 싶다. 그래도 나는 참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냥 위로를 해라.

악당들이 나중에 어떤 보응을 받는지 너는 알 필요가 없다. 너는 너의 길을 막고 방해하고, 미혹시키는 자들 속에서 울며불며, 이겼다가 넘어졌다가를 반복하며 너는 커나간다.

그들의 악행은 그들에게 사망을 선고하지만, 너 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사망이 선고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너는 가야 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넘어지면 내가 일으킨다. 네가 자폭하면 내가 너에게 물 한잔을 먹인 후 다시 일으킨다.

엘리야가 지쳐있을 때, 천사가 와서 물을 먹이고 떡을 먹였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너를 무엇을 만들고자 하시는가?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을 제거하고 순도 100%의 마음으로 서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갈등을 이기는 노력을, 온몸의 혈관이 터지는 듯한 그런 노력을, 실패 속에서도 반복해야만 그런 경지에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마음에 온전한 생각이 들어서 거룩한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평생 할 수 없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이겨내고 말을 해야 한다. 내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쌍욕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고 오 형제여, 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실력이다. 겪어보고 극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다. 결어

(1) 요즘 손흥민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수비보다 반 박자 빠르다. 그래서 골을 넣는다.

이와 대비되는 요즘의 TV프로가 있다. 뭉쳐야 찬다. 그 팀의 선수들은 다 국가대표 출신이어서 체력들이 다 좋다. 그러나 결정력이 없다. 반 박자 빠르지 못한 것이다.

수비가 없는 곳에서 골을 넣으라고 한다면 누가 못 넣겠는가? 수비를 뚫고 골을 넣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실력과 기술을 키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 인간의 인격과 정신은 달라진다.

모든 일류 선수들은 다만 기술력이 최고이지 않다. 그들은 다 정신력으로 다르며 높은 수준에 있다.

(2) 기독교 신자들이 누구를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의 짐을 지지 않고 있다. 부활절에 이렇게 핏대를 내도 되는가? 그렇다 예수님도 피흘려 죽으셨다.

웃으면서, 한숨 쉬면서, 절망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환상의 세계에서 어떤 꿈같은 길을 찾느라고 평생을 보내면 안 된다. 실체가 없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영광의 길을 결실하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을 허락하시고 책임을 지게 하시며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하시며 자랑하게 하시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눈물과 땀을 흘려 노력하고 반복하도록 이끌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도 약속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부활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