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8) (왕하 6:24∼7:2)

2022. 3. 20.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본문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쪽에 있는 아람이 쳐들어와서 성을 에워싸고, 성내는 굶주리게 된다.

심지어 자식을 잡아먹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왕은 여인 둘의 하소연을 듣고 통분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분노를 하나님께 돌린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팽개쳐서 이런 비극이 생겼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내가 저 엘리사를 죽이고 말겠다, 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고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한다.

(2)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손들이, 자신들이 왜 이 자리까지 이르렀는지 확인하려고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매우 참담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특히 오늘 본문과 같은 일을 보면, 저 왕은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어쩌면 저런 사람이 왕이 되어서 우리가 이 꼴을 당했을까, 하는 비난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나. 본론

(1)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루 저녁에 적군이 물러가고 그들이 너무 황급히 도망가는 바람에 버려둔 군량과 병기와 많은 군수품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굶주림과 어려움이 해결된다.

엘리사가 이렇게 예언을 하고 그때 함께 예언을 들었던 군의 총수이기도 하고 왕을 지키는 친위 대장이기도 했던, 군대 장관이 비웃기를,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리신다고 한들, 이 성내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양식을 낼 수 있겠느냐, 고 했다.

엘리사가 답했다. 네가 그 현실을 보기는 하리라. 그러나 먹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결과도 그 말대로 되었다.

당시 그 성에 있었던 네 명의 문둥병자는 성에 있다가 죽으나 성밖에 있는 적군에게 항복해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고 적군에게 항복하러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군이 모든 것을 남겨 놓은 채로 황급히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마음껏 뒤져 먹고 옷도 감추고 금은 패물도 챙긴다.

그리고 난 후에야 정신이 들어서 성안에 알린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정찰병을 보낸다. 정찰병이 사실임을 보고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성안의 백성들은 서로 밟힐 만큼 혼잡하게 뛰어나갔다. 군대 장관이 이 백성들의 발에 밟혀서 죽고 만다.

이 사건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후손들에게 분노를 촉발했을 것이다. 왕이 어떻게 정치를 해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왜 제대로 믿지 않았어? 왜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았어? 그런 꼴을 당하고도 왜 고치지 않았나? 모든 왕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 분냄은 굉장히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다윗의 길을 걷고 솔로몬 같은 지혜를 가지고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것 아닌가?

(2) 이 비슷한 상황이 욥기에 있다.

(욥8:1~7) 이 부분은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부분이다.

욥은 여기서 하나님께 제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하지 않는다.

욥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는 주장이고 친구들은 네가 잘못하지 않았다면 왜 이런 벌을 받고 있는가, 라는 주장을 한다.

욥은 여러 번 변명을 하다가 지쳐서 반어법으로 호소를 한다.

저 같은 하찮은 존재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께서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십니까?

저 같은 버러지 같은 인생이 잘하고 잘못한 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심과 크기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저는 죽어 버리겠습니다.

빌닷이 말한다. 네 자식들이 죄를 안 짓고 죽었겠느냐? 그리고 네가 잘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느냐?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냐? 이제라도 빨리 잘못했다고 회개해라.

7절은 유명한 구절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네가 만일 회개를 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사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복으로 채우실 것이다.

그러나 빌닷의 말은 욥에게는 안 맞는 말이다. 욥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욥기의 시작은 욥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니 욥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 않다.

왜 어려움을 당하는지는 욥 자신도 알 수 없고 친구들도 모르는데 친구들은 욥이 지은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 하고, 욥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어쩔 줄을 모르고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욥기의 빌닷의 얘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합의 아들인 요람 왕에게 적용하면 딱 맞는다.

네가 우상을 섬겨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필요할 때는 하나님 찾았다가 궁핍한 것이 없어지고 위기가 사라지고 나면 또 딴짓하고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된 것 아니냐? 너는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말이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요람 왕은 하나님을 원망한다. 적반하장인 셈이다.

성경은 이 질문을 받아야 하고 대답을 해야 할 당사자와 이 회개를 묶지 않고, 오히려 해당되지 않는 욥에게 묶었다.

왜 잘못이 없는 욥은 살기등등한 친구 셋에게 계속 시달림을 당하고, 회개해야 할 요람 왕은 거꾸로 내가 오늘 엘리사의 목을 자르는지 못 자르는지 두고 봐라, 라고 큰소리를 치게 만드시는가?

욥에게 복을, 요람에게는 벌을 주고 회개하게 만들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로 문맥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 요람 왕에게 당신은 회개해야 한다, 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해야 마땅할 자에게 이 질문은 가지 못했다.

오히려 아람 왕은 하나님께 화를 냈다.

(3) 그렇게 구약시대가 지나갔다. 여러 왕들이 미련하게 했던 시대이다. 그리고 예수가 오시고 교회에게 영광된 사명이 주어진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 나라의 증거들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몸이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의와 진리와 거룩의 증인들이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주께서 응답하실 것이며 주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도록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요람 같기도 했다가 욥 같기도 했다가 하는 인생을 산다. 잘하고 싶은데 조건이 주어지지 않고, 잘하고 싶은데 보상을 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잘못했을 때에도 성질을 부린다.

하나님이 그때 그렇게 해주셨으면 제가 지금 왜 여기 있나요?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한 말과 똑같다.

40년 전에 응답하셨어야죠. 제가 80이 되었는데 이제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시자구요?

우리의 현실도 같다. 이렇게 체념하고 분노하고 막막하다.

욥기는 세친구들을 통해 기록한다. 회개해라, 회개하면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러나 욥에게는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욥은 결국 창대해진다.

욥은 잘잘못을 나누는 도덕적 2분법으로부터 빠져나와 온 천하를 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선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하는 나의 후사다. 내 통치를 이어갈 내 자손이다.

잘잘못의 자리를 넘어 꿈도 꾸지 못했던 창대한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조건 없이. 회개 없이. 오직 하나님이 가지신 목적을 위해 욥은 이 시련과 혼란을 겪었고 그가 알던 모든 세계는 역류하고 파괴되었다.

성경은 욥이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 과정을 건너야 한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이것을 잘못했을 때 주어지는 벌이라고 생각하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회개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고난 속에 있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외친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그런 지위와 신분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요람은 잘못했다. 그러나 요람의 잘못은 한 개인이 가진 실력의 차원에서 보면, 그 이상 잘할 수는 없다.

열왕기를 따라가다 보면 여로보암의 길과 다윗의 길을 밝혀내게 된다. 다윗의 길은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는 길이다. 사람은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 역대 왕들이 겪었어야 하는 역사는 그들이 무능하고 미련하고 악하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외에 아무런 남은 것이 없다.

그 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회개해서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함께 들어있다는 것이다. 거기는 분명히 회개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회개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어야 한다.

죄 사함이 끝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영광과 명예가 있다.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구약시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신약시대의 교회에서도 거의 실패한 역사를 가지는 데 그 실패가 그 고난이 바로 영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멋있는 교회를 세워서 세상 앞에 찬란한 꿈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가시관을 써야 한다. 홍포를 입어야 한다.

(4)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냐 하면,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이 잘 나타내준다.

(마5:1~12) 우리는 이 말씀을 조건화한다.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화평케 하고, 청결하게 하고, 하는 것들을 조건으로 삼아 자신감과 평안을 답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속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후회밖에 남은 게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평생 자랑거리가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말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생각할 줄 모르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피해를 보고 말할 권리가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고 천덕꾸러기가 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1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이 우리를 비웃는다는 것이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왜 이런가? 세상이 안 붙여 준다.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 말이 안 통해. 그래서 다 떠밀려 났다. 버려진 것이다. 이들이 복이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무지하고 쓸모없는 것이 복되다, 이런 얘기가 아니다. 세상은 우리가 아는 기대와 가치와 전혀 다른 내용과 목적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안심, 성공, 영광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간은 이런 것이구나, 를 아는 것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깨닫는 것이다. 한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몫을 한다는 것. 이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도전 앞에 물러나고 타협하고 도망가서 이제 세상과 방불하게 되었다. 십자가를 걸어 놓고 은혜를 얘기하고 기도를 얘기하고 봉사를 얘기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법이다.

마태복음 11장이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혔다. 갇히기 전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메시야다. 이 사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 사람의 말을 들으라.

그러나 감옥에 있으면서 의문이 있어 제자들을 보낸다. 당신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가 맞습니까? 아니면 내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도 헷갈렸다. 왜? 감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며, 문둥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요한은 생각했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가?

세력을 만들어야지 힘을 만들어야지 이제 병을 고쳐가지고 어떻게 하시자는 것인가? 이제 장님 눈떠서 언제 글을 가르치겠는가?

우리의 상상과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렇게 다르다. 우리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힘이 하나의 권력이 되게 해달라는 거다.

본때 있게 살게 해주십시오. 양보할 필요 없이, 죽어지낼 필요 없이, 뭐라고 말할 필요 없이, 존재감을 보상받게 해주십시오.

다. 결어

(1) 이것이 신약시대의 가장 큰 시험이다. 여러분은 은혜를 구하는가, 법을 구하는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법대로 합시다, 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기독교를 모르는 거다. 은혜롭게 합시다, 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신자인 것이다.

교회로 모였지만 이것이 하나의 조직이 되고 하나의 정치가 되고 하나의 책임들이 되면, 법대로 합시다, 가 은혜로 합시다, 를 이긴다.

법대로 합시다, 에는 무엇이 있는가? 손해 보고 양보하고 짐을 나누어져야 하는 일들은 사라진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손해이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하나님께 화를 냈던 요람왕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회개하라. 그러나 회개하고 떳떳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욥이 부름받은 그 놀라운 자리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인생이 되도록 여러분 자신을 믿음에 묶어라.

【기 도】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아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아들을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으시겠느뇨, 라고 소리 지르며 무릎 꿇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