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7) (왕하 5:120∼27)

2022. 3. 6.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엘리사가 공짜로 고쳐준 나아만에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쫓아가서 보상을 요구하고 보상을 받아 집에 감추고 스승 앞에 나갔다가 저주를 받은 유명한 사건이다.

저도 여러분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보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 더더욱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안 된다, 는 교훈이 먼저 떠오른다.

열왕기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역사적 사실을 앞에 두고 반성하는 자세로 기록된 것임을 감안하면, 게하시 사건은 부도덕하거나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다는 것보다 더 크게 보아야 한다.

게하시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밑에 있는 종이다, 이렇게 차별하지 말고 그 아들에 그 아비라는 말처럼 두 사람을 묶어서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자가 무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게하시는 보상을 요구했다, 는 지적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현실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2) 수사학적인 비유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시다. 주로 등장하는 것은 은유이다. 은유는 직유와 달리 유사성을 묶는 것이 아니라 비유사성을 묶는 것이다. 비유사성을 묶는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둘 사이에 유사성이 없지만, 함께 묶음으로써 그 둘 사이에 공통된 본질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러니 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일상 속에 있으나 쉽게 보지 못하는 주제들을 밝혀내는 것이다.

게하시는 하나님이 보상을 받을만한 분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자신의 주인이 나병을 고쳐준 정도라면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받지 않았다는 것은 게하시 입장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고, 자기가 받고 싶은 양 보다는 많이 줄여서 받아온 것이다.

나. 본론

(1) 하나님이 노하시고 당연히 엘리사도 노한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고 순종하는 백성인데 이런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꾸짖으신다.

바벨론은 이방 국가이며 우상을 섬기는 나라이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포로가 되어 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바벨론은 성전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는데 왜 우리 위에 군림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엘리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엘리사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유일한 권세를 옹호하면서 보상을 바라는 게하시와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지만, 그 권세가 우리에게 보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세상 권력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애매하게 우리 속에 섞여 있다.

(마11:2~6)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도전이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앞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가 행하신 일을 듣고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났다. 당신이 메시야가 맞습니까? 아니면 내가 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대답했다. 내가 메시야다. 너는 가서 내가 하는 일을 얘기해라.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장님이 눈을 뜨고 옥에 갇힌 자가 풀려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라.

우리는 이 내용을 게하시적으로 읽는다. 못 고칠 일, 해결 못 할일, 낮은 자에게도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 이렇게 생각한다.

요한이 어리둥절했던 이유는 이거다. 쓸모없는 것들을 고쳐서 어디에 쓰시려구요? 권력을 가지셔야죠. 빌라도를 죽이고 로마 황제를 없애고, 유대민족을 성전에 모아서 거룩한 전쟁을 해야 할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시간을 소모하고 계시는가요?

딱 우리의 경우와 같다. 우리는 보상이 없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 보상이 없어도 나서는 경우, 우리는 매우 인색한 도움을 주면서 자존심을 만끽한다.

나는 불쌍한 사람을 도왔어.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심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권력투쟁과는 결부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나의 존재는 하나님이 보상을 바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가 되어서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권력의 싸움이 아니라 섬기는 나라다, 라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내가 있으므로 해서, 절망한 사람들에게 쓸모가 없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내 나라의 본질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게하시다.

우리가 엘리사를 원하는 것은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치고 쇠도끼를 뜨게 하고 하는 그런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왕을 폐하고 정권을 잡아서 하고 싶은 것을 해치우려고 한다.

엘리사는 권력의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이것을 엘리사는 권력 욕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설명하면 안 된다. 엘리사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의 본질을 증언했다.

과부에게 도움을 받고 그의 아들을 살려주기도 했다. 아주 개인적인 일이지 국익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우리의 필요에도 도움이 안 된다.

(사42:5~9) 우리는 이 본문에 있는 약속들을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당연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되는 하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 필요가 없는 자들, 베풀어서 무슨 보상을 얻게 되는 자들이 아닌 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다. 구원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로, 예수 믿는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끝없이 도덕성과 권력의 관점에서 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보상을 받으려면 도덕적 흠이 없어야 하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회개하고 다음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쓰겠습니다, 라고 기도한다.

인간이 그 이상으로 진정성 있게 표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꼭 아들을 죽여서 구원을 줄 필요가 있는가? 얼마든지 쉬운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2) 우리는 구원 새 생명, 부활, 같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을 전혀 못 하고 있다. 그리고는 일이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 조르고 있다.

권력을 주십시오, 권력을 주십시오, 나에게 부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정의를 실현하게 하시고 악한 자들 다 죽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기도의 밑바닥에 있는 진심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응답을 받지도 못하고 현실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빛과 소금의 존재라는 것도 실감하지 못하며 현실에 적용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상은 댓가를 준다. 권력을 준다. 이사 가는 날을 가르쳐주고 이번에 국회의원이 될지, 안 될지를 가르쳐준다. 그래서 우상은 자신에게 보상을 내놓으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신다. 하나님은 분명한 뜻과 목적이 있다.

나는 너희의 욕심의 한계 내에서 편드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너희를 내 형상으로 만들 때부터 너희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했고 너희는 내 자식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제사장이다. 너희가 거기에 이를 때까지 나는 타협이 없다.

(시40:1~9) 이 시는 다윗이 썼다. 다윗은 자신의 죄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거기서 꺼내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우쳤을 것이다.

이 기도를 했던 사람이 또 있다. 게하시다. 게하시가 구원을 못 받는다면 우리는 더 희망이 없다.

게하시는 정말 어리석었다. 이 기도는 그런 사람이 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가 게하시의 기도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나면 바울이 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다. 그런 그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다. 잘못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해야, 안 다는 것이다.

잘못이란 하나님의 일하심과 다른 곁길로 간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잘못 속에서도 붙들어 오신다. 내가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졌다. 이 고백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모든 포로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성전이 무너지고 궁전이 무너지고 성문이 파괴되고 적국의 포로로 와서 회복의 기미가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깨우친다. 하나님은 권력이나 능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그가 만드신 인류도 닮아가도록 하신다. 사랑과 의와 진리와 영광과 명예를 우리 속에 만들고 계신다.

(4절) 여기서 얘기하는 교만과 거짓은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것을 답이라고 말하는 것을 꾸짖고 있다.

이것은 게하시가 되지 말자, 골리앗이 되지 말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 이외의 답을 찾았다고 외치는 사람을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가?

(5절)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야곱과 씨름하시고 요셉을 감옥에서 단련시켜 총리를 만드셨고 모세를 불러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내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들을 살려서 가데스 바네야까지 끌고 가셨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니까 할 수 없다, 너희는 여기서 죽고 네 자손들을 데리고 들어가마, 라고 하셨다.

사사기 내내 열왕기 내내 지금까지 내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뭐가 뭔지 모르고 반대하고 곁길로 가고 우기고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셀 수 없는 많은 은혜와 권능과 의로우심으로 대하셨다.

(6절) 나는 너희에게 보상을 받으려고 하나님 노릇 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삶 속에 늘 있는데 신앙과 결부되면 우리는 못 알아듣는다.

자식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부모님 그동안 잘 돌보아 주셨는데 제가 교통비 아껴서 여기 10만원 가지고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모가 기뻐하겠는가? 화를 내겠는가?

야, 인마 그걸 왜 아끼니? 용돈으로 써야지. 필요하면 더 달라고 해. 먹고 싶은 자장면 하나 안 사 먹었단 말이냐?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우리는 맨 밑바닥에 공포가 있다. 부모라는 생각을 안 한다. 부모는 대신 죽는다. 자기가 살려고 자식을 죽이지 않는다.

(6절) 나는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 주님, 그렇다면 저도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뛰어 들어오는 것이 기독교다.

(8절)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모두에게 거저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모두에게 위로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상을 위한 것도 아니며 공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자라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너에게 주어진 시간과 너에게 주어진 정황에서 명예와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겁내지 마라, 너는 사랑 안에 있으니까. 전능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 결어

(1) (9절) 우리가 이게 뭐야, 라고 놀라는 현실이란 과연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이것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라고 외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희생, 헌신, 같은 단어로 넘기지 말라. 우리의 현실에는 다 구도가 있고 배역이 있다. 내가 대사를 하고 결정을 해서 위대한 현실을 만들 수 있다.

(2) 게하시를 욕하는 것으로 때우지 말라. 엘리사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다. 누가 나를 건드리겠는가? 내 앞길에 무슨 고난과 어려움이 있은들 거기에 무슨 비극과 실패가 있으랴? 이것을 수긍하는 귀한 게하시가 되기를 바란다.

【기 도】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은 자책 속에서 죽어났던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게하시를 보았으니 우리가 회복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권능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돌이킨 바울과 같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