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6) (왕하 5:8∼14)

2022. 2. 20.(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아람의 군대장관이요, 왕을 호위하는 친위대 책임자인 커다란 군사적 지도자가 나병을 고치기 위하여 엘리사를 찾아오고 그 병이 깨끗해지는 기적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은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문학적인 센스가 있어야 한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장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적국이고,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미워해야 할 상대이다.

그러나 나아만은 큰 권세는 있지만 절망에 빠져 있었고 뜻밖의 곳에서 희망의 소식이 전해진다. 아람이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잡아간 포로 중 어린 소녀가 나아만 집안의 시종으로 일하다가 주인의 병을 알고 전해준 소식이다.

당신이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병은 깨끗이 나을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아쉬울 것이 없지만 이 문제만은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다. 더구나 소녀의 말은 귀담아 들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에 온다.

(2) 그는 적국의 장관이요,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오는 것이지만, 양국에서는 그의 왕래를 소홀히 볼 수 없다.

아람 왕은 친히 글을 써서, 내 군대장관이 치료차 귀국에 가니 놀라지 마시고 선처바랍니다, 라는 소개장을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의 왕은 매우 당황하게 된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고칠 수 없는 병을 나더러 고쳐달라고 하니, 고칠 수 없다고 하면 분명히 우리나라를 침공할 명분으로 삼을 것이다.

왕은 옷을 찢는다. 성경에서 옷을 찢는다는 표현은, 매우 분하거나, 매우 비참할 때를 나타내는 것이다. 왕은 자신이 곤경에 빠졌음을 나타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말한다.

왕이여, 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십시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오게 된다.

나. 본론

(1) 이 사건의 기록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의 자존심, 우월함 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매 장면마다 그런 우월감이 각별하게 묘사되어 있다.

엘리사가 고쳤지만, 나아만은 포로로 잡아간 작은 소녀에게서 이런 소식을 들었다. 귀인이나 왕족이나 외교관에게 권면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작은 소녀라도 이쯤은 안다, 라는 것과 너는 나라의 기둥이어도 이것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 하는 자존심이 묻어나 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오고 엘리사는 문전박대를 한다. 엘리사는 문을 열고 나와 환영하지 않고 사환을 통해 뜻을 전한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나아만은 분노했다. 자신의 정성과 지위를 무시한 무례한 행위였다. 단순히 씻으라는 것으로는 아무런 치료 효과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같이 온 부하들이 말린다. 주인님. 이보다 더한 것을 하라고 했어도 했을 것 아닙니까? 나아만은 내려가 씻고 병이 나았다.

여기에는 많은 잘난 척이 있다.
너의 병은 약을 줄 것도 없어. 이 정도 병은 아무 데나 가서 씻으면 돼.

나아만은 너무 놀랐다. 예물을 받으십시오.
엘리사는 말한다. 뭐, 이 정도로 예물을 받는가? 우리는 이 정도는 전부 그냥 치료해 준다.

나아만은 고백한다. 여호와만이 신이십니다. 그러니 두 나귀에 실을 흙을 주십시오. 이 흙을 쌓아놓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한가지, 주인이 섬기는 림몬 신당에 들어갈 때 주인을 호위해야 하므로, 주인이 절할 때 저도 하겠습니다만, 그건 진심이 아닙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엘리사가 답을 하는 것 같다. 네가 절을 하든 말든 내 관심사가 아니다. 빨리 가라.

(2) 잘난 척은 엄청했지만,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가 되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를 통해 그 엄청난 일을 하셨던 하나님은 뭐고 지금 우리의 신세는 뭐야?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는 왜 이러셔?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우리는 뭐야?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하는 이 장면에 우화가 들어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너무나 뻔한 걸 너무나 한심하게 잘못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한 꾸중이 여기 들어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왜 생겼냐구? 너희는 보고도 모르는 거지?

만져보고도 모르고 느끼지도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흙이라도 조금 가지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너희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성전을 가지고 약속을 받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냐? 아니면 너희가 잘못 보고 있느냐?

(시8:1∼4) 온천지의 경이로운 장관에 놀라면서, 이것을 다 인간의 손에 맡기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시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꾸짖기 위해, 총칼로 나가 싸울 필요도 없이, 어린아이가 손가락질 한번 하는 것으로 충분한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명예와, 지위와, 운명을 주셨기에, 온 땅의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인가요?

이 고백은 우리가 형통할 때는 아멘이다. 그러나 어려워지면 이게 뭔가, 라고 한다.

우리가 어렵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현실적으로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일그러져 보인다. 하나님은 이것을 꾸짖으신다.

하나님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외면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떤 때는 우리에게 공감을 자아내지만, 어떤 때는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까지 하게 된다.

너희는 너희가 만져본 부분만 하나님이라고 고집한다. 그래서 너희 판단대로 하나님이 고맙다가, 미웠다가, 한다. 찬송했다가 분노했다가, 한다. 이것이 나아만 사건이 주는 교훈이다.

(3) (사40:27∼31) 내가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힘주시면 나는 이길 수 있어.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다. 하나님께는 아예 피곤이 없다, 라는 뜻보다는 하나님은 어떤 일에 피곤하지 않으시다, 라는 뜻이다.

우리를 돌보고 이끄시는 일에 하나님은 피곤하시지 않다.

하나님의 피곤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땀 흘려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힘써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우리의 반발과 무지와는 타협하지 않으신다.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도 힘을 다하여 우리를 밀어붙이고 계신다. 그는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곤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힘이 부족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인생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서면 그 보상으로 새 힘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새 힘을 얻는 곳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 결어

(1)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그 길을 가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이 빨리 없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회개를 한다.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답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이었나? 나와 하나님 사이의 충돌을 성경은 어떻게 화합시키고 있는가?

우리의 인생은 무엇이 만드는가? 세상의 경험에서도 나온다. 젊었을 때 고생은 돈 주고 사서 한다. 어려운 일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린아이로 끝나야 한다. 어린아이란 무엇인가? 소원이 단순하다.

소년은 외부환경에서 어려움만 없으면 된다. 더 크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책임이다. 난관이 생기고 낙심이 생긴다.

난관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연습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당연히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만 못하게 하셨다. 이 말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산을 물려받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짧은 이 인생 쉽게 살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내가 만진, 이런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 벌하신다. 너희는 너희 한계 속에서 나를 한정하고 내가 그런 하나님이기를 바라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너를 그냥 두겠느냐? 나는 네가 코끼리 전부를 볼 수 있는 자리까지 너를 끌고 가겠다.

인간이 원하는 안심과 형통에 너를 버려둘 수 없다. 나는 너를 내 자식으로 불렀다. 그러니, 가자. 이 통렬한 우화를 기억해야 한다. 나아만, 그러면 알아들어야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생각나야 한다.

나는 예수를 믿으면 내 인생은 형통할 줄 알았어. 그러나 하나님은 더 나아가자고 하셨어. 안목과 분별을 키우시자고 하셨어. 우리의 작은 요구에 하나님은 역사와 영생과 온 우주를 아우르는 크기와 길이와 넓이로 우리를 부르셨어.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믿음과 안목이 열려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적을 기어코 보고야 말겠다는 복된 결심이 서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습니다. 에브라임아, 유다야,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번제가 아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하나님 나를 알기를 원한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을 영광과 복됨과 자랑과 권능과 지혜와 찬송으로 알아가게 하옵소서. 이 일에 인내, 충성, 단련이 있도록 붙잡아 주시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