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5) (왕하 4:1∼7)

2022. 2. 6.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엘리사의 사역이다. 엘리사는 북왕조 아합왕의 아들인 여호람 때에 선지자 노릇을 했고 많은 기적이 소개되어 있다.

엘리사를 이해하려면 엘리사가 엘리야를 이어서 선지 사역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엘리야의 선지 사역과 엘리사의 선지 사역은 모양이 다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으로 넘어간 왕들과 백성 앞에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이시다, 라고 선언한 것이 엘리야라면, 엘리사는 일상 속으로 들어와서 하잘것없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푼 것으로 대조된다.

(2) 우리가 성경을 배울 때는 구약의 사건들을 문맥 없이 배웠다.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의 승자로, 엘리사는 그 뒤를 잇는 많은 기적들의 승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적 해석력을 가지고 보면 엘리야 때는,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나타날 때까지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심사만 하는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다윗의 길을 걸었느냐, 여호보암의 길을 걸었느냐, 하는 식의 2분법으로 백성들의 충성도를 심사하는 분으로 보였는데 엘리사 때에는 양상이 바뀐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에, 인생 속에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나. 본론

(1)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인해 감동을 받으셨다면, 엘리사 때는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런데 굉장히 사소한 일들, 말하자면, 어느 가난한 여인의 처지, 굶게 된 선지자들을 먹이는 일, 같은 사소한 일들로 엘리사의 사역이 소개된다.

물론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직접 오신다는 깊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좀 다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에 찾아오시고 깊이 관여하시는 것은, 엘리야의 선포를 구경만 하지 않고, 우리 편을 들고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사역의 차이는 이름에서도 나온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이시다, 였고
엘리사는, 나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구원은 기다리고 있다가 심판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승자가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문학적 읽기는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신학적 읽기까지 가야 하지만 문학적 읽기가 시급하다.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 속에 있는 파편에 몰입하는 것을 넘어서서, 문맥을 이어 읽으면 본문이 풍성해진다.

엘리야로 인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다, 는 것은 놀라운 문학적 이해이다. 말라기에 소개되는 엘리야는,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고,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게 하는 사역을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하나님이 엘리야로 인해 그 마음을 백성에게 돌리신 것으로 묘사된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문맥적으로 잇는 이해는, 좀 더 신학적인 이해로,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나타난다.

(창22장)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언반구도 없이, 갈등도 없이 바치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찌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막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네가 네 아들도 아끼지 않고 바쳤으니, 내가 맹세코, 너로 모든 민족의 구원이 되게 하고, 네 씨로 네 대적의 성문을 얻게 하겠다, 라는 어마어마한 약속을 한다.

네 믿음의 행위로 인하여 내가 너를 열방의 구원자로, 대적을 멸하는 하나님의 전사로 너를 삼을 것을 맹세하마.

그러나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부터 했던 약속이다. 이삭을 잡아서 받은 약속이 아니라, 이삭을 낳기도 전에, 처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받은 약속의 반복이었다.

(창12:1∼3)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엘리야의 놀라운 선포와 고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응하시고 그 반응으로 엘리사의 사역이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좋다. 내가 심사위원으로 물러나 있지 않고, 너희를 승리하게 하겠다. 그걸 위해 나는 너희 각각의 정황과 인생에 뛰어들겠다.

여기까지가 문학적 이해이다. 그러면 신학적 이해는 어디까지 가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를 때 하신 약속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한 보상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뜻이 있는 것인가?

(2)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았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11장을 문맥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고 죽음과 저주가 왔다. 그 결과 인류는 대를 이어 못나게 굴었고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하셨다. 그 후 셋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허락하셨지만, 인류는 바벨탑을 쌓아 벌을 받았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브라함인 것이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뜻이 깊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을 우리의 책임 사항으로 이해하는데, 성경은 믿음이 어디서 시작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를 많이 감추어 놓아서, 그런 오해가 더 심하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선택했거나, 헌신했거나, 책임을 지지 않았고 그는 단지 부름을 받는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붙들려 나왔다.
그는 자기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씩 알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백세에 아들을 낳는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바친다.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재현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문맥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위를 칭찬하시고 그 보상으로 약속을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약속은 뜻밖에도 본인의 항복으로 결실을 맺고 완성이 된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하신다. 결과는 그 약속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너는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약속은, 나는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겠다, 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너는 이 약속을 받았으니 알아서 살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알아서, 라는 것은 마음대로가 아니다. 너는 다른 존재다. 내가 너에게는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루겠다. 그때까지는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결실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의 결실은 보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결실인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이 좋으면 형통을 보상으로 바란다. 여러분이 컸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크면 어지간한 문제는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고난도 당할 수 있고, 억울함도 당할 수 있다. 기쁜 것도 절제할 수 있다. 이것이 성장이요 믿음의 결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결실이 어떤 조건의 변화이기 때문에 거기에 못 이르면 자꾸 불평한다.
내가 얼마나 더 해야 하나님이 내 편을 드실 것인가?
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하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은 문학적으로 해석해도,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보상을 주신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다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모세에게서 보았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해 40세에 궐기했을 때 그는 당연히 하나님이 편을 들어 주실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꾸하지 않으셨고 그는 타버린 재처럼 40년을 광야에서 살았다.

그가 40년 만에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당연한 질문을 한다. 왜 40년 전에는 가만히 있으셨습니까? 지난 40년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했으면 쉬웠을 것 아닙니까?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내가 하나님인 것을 한 번도 중단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온 천하와 역사와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분이 상을 주신다.

우리는 구원이 천국 가는 문제보다 더 큰, 영광의 문제라는 것을 확인했다. (롬3:23)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른다. (엡1:3∼6)

여러분의 자식을 부나, 명예나, 유명한 것을 평하지 않는다. 자식의 문제는 인성의 문제인 것이다. 한 인간의 가장 큰 영광은 인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광이 되며 찬송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바쳐 잘하면 자존심을 세워주는 보상을, 병에서 지켜주는 보상을, 부러움의 보상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문학적 해석을 도입하는 이유는 이것이 신학적 해석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문맥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걸쳐서, 엘리야와 엘리사에 걸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구이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를 알며 하나님은 우리 각각의 생애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엘리야는 큰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가셨을 때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예수님과 함께했다.

엘리야의 등장으로 하나님은 누구신가, 가 선포되었다. 엘리사를 통해 그 후에 깊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각각의 생애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 결어

(1) 믿음이 좋아야 해,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도전으로 알고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2차 적인 문제이다. 실패해도 자라야 한다. 후회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낫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안 그런다. 오늘 승리했으니 내일은 가만히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나의 하루하루가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멋지게 해 볼 수 있는 데… . 이 후회가 지금을 살게 해야 한다. 나의 지난날의 후회와 절망이 쌓여서 오늘의 속 깊음, 성실함을 만들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상처가 부활 후에도 그 손에 남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하셨는가, 내가 잘못했는가의 싸움을 한다.

(2) 하나님의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박국 선지자가 잘 보여준다. 하박국은 남왕국 유다가 망할 때쯤 선지자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든다. 하나님. 악인들이 의인들을 이렇게 괴롭히는데 보고만 계실 건가요?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네 말이 맞다. 내가 곧 바벨론을 일으켜 이 나라를 심판하겠다. 아니 악인들만 벌하셔야지 의인들까지 함께 벌하시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모든 어려움도 의인은 믿음으로 지켜내야 한다. 이렇게 이해가 된다. 문학적 이해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문학적 이해도 없을 때가 많다.

성경에서 하박국은 이렇게 반응한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우리 안에 양과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앞에서 본 문학적 이해에 따른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나님 저는 목숨이 끊어질지라도 하나님 편을 들겠습니다. 이런 각오가 나와야 한다.

하박국은 각오를 말하지 않고 찬양을 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라, 가 무슨 뜻인가?

내가 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넘어지면 하나님이 넘어지는 것 아니고
내가 외면하면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다.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감수하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라고 감수하는 것이다. 보상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부활이다.

이런 생애를 살겠습니다. 여기서 찬송이 나온다. 여기를 넘어야 현실이 기적이라는 이해가 생긴다. 나는 내가 아는 인생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엡3:14∼21) 내가 지금의 형편으로 충만으로, 영광으로 가는 길,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사랑하며 충성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지도록 책임지고 일하게 하옵소서. 감사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