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4) (왕하 3:5∼27)

2022. 1. 23.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을 보면 아합이 죽고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자신의 속국으로 있던 모압이 배반했기에 징벌하러 가면서 남왕국의 왕인 여호사밧과 함께 가는 장면이다.

원정길을 1주일쯤 가니까 식량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떨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북왕국 왕인 여호람이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찾는다.

여호와께서 오늘 여기서 우리를 죽게 하시려나 보다.

그가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그 말을 받아서 엘리사를 불렀다.

자신들이 닥친 곤궁을 해결할 하나님의 방도를 구한다.

땅을 많이 파서 물웅덩이를 만들어라.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웅덩이마다 물이 가득하여 기갈을 면하게 된다.

(2) 그리고 엘리사가 여호사밧을 위하여 전한 하나님의 약속은, 기갈을 면할 뿐 아니라 이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있는 대로 그들은 모압 영토를 침범하여 모든 열매를 수탈하고 농토들을 황폐하게 한다. 나무를 베고 돌을 밭에 뿌렸다. 침략전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쫓기던 모압 왕이 마지막에 궁지에 몰리자, 성 위에서 자기 맏아들을 번제로 바쳐서 전세를 역전시킨다. 본문 27절이다.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이스라엘 군대는 모압 왕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 이상의 비참한 결과는 보지 말자. 이쯤에서 만족하고 돌아가자.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비석에 모압의 대승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27절에 격노했다는 것은, 모압의 병사들이, 자기들의 왕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깊이 분발하여 전세를 역전시킨 것으로도 보인다.

나. 본론

(1)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필 필요가 있다. 길르앗 라몬의 전투에서 하나님은 아합을 죽이기 위해 누가 아합을 꾀어 이 전쟁터에 와서 죽게 할꼬?, 라고 하셨고 한영이 답을 했다.

어떻게 할래?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을 넣어서 아합을 꾀어 전쟁터에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가라, 너는 성공할 것이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시키실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답을 주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법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인격자이며 창조주이고 부활이신 하나님의 풍성함을 우리 스스로 제한한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옳으면 당연한 보상을 받는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덕을 다 지키면 뻔뻔해진다. 나는 내가 할 것을 다 했어. 이런 사람은 자신감에 차서 동정도 용서도 없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 신에게 아들을 바친 왕이 여호와의 백성을 이기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이런 생각을 역사적인 사실로 반박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하나님이 내 편이니 나는 승리한다, 는 생각은 기독교에서는 승리주의라고 하며, 하나의 신앙 왜곡이다.

하나님이 내 편을 든다는 것은 매우 애매한 조건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야 한다. 나는 늘 우월하고 우세해야 한다.
또 주술적인 신앙도 있다. 내가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도 답하신다는 것이다. 무속적 공식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절함에는 꼭 답을 해야 한다. 잘못된 생각들이다.

간절함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무속신앙은 치성에 관한 종교이다.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내 간절함에 왜 답을 해야 하는 지도 설명이 안 된 채로, 내가 간절하면 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답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간절한 것을 치열하게 나타낸다. 한겨울에 내복 차림으로 나가서 냉수로 목욕을 하고 치성을 드린다.

승리주의적 신앙이나 주술적 신앙의 약점은 그 모든 일의 조건이, 믿는 자라고 말하는 나라는 데 있다. 내가 주인이 되면, 기대와 방법과 결론이 내 손안에 있게 된다.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동원되는 이유는 단 하나, 나보다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긋나는가?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방법을 택하시고 하나님이 결과를 주신다.

우리가 우리의 기대와 목적 속에서 신앙을 사용할 때는, 원하는 것이 형통뿐이다. 이 형통은 배고프지 않고 병들지 않는 것이다.

신명기 6장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겪은 시험이고 훈련이다.

내가 너희를 낮추고 시험하여 너희 마음이 어떤지 알려 하였노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나님이 목적이어야 한다. 너희 목적이 앞서면 너희가 구하는 것은 먼저 떡이다. 그러면 하루 사는 것이 급급할 뿐이다. 너희 삶에서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와 내용과 방법은 없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 우리의 간절함과 주님을 위한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열왕기를 통해 우리의 기대를 깨신다. 우리의 공식을 깨신다. 우리는 이미 아합에게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이 자비와 긍휼과 기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도덕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진지함이나 최선이나 형통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넘기를 원하신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큰 싸움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승리인가? 패배인가? 믿는 사람은 패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패배라고 말한다. 예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만 그 죽음이 부활로 가는 문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부활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피한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십자가 없이 부활을 가지려고 한다. 십자가는 왜 필요한가?

십자가를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최대치, 최선, 최고에 묶인다. 그것이 다 죽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모른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만들고 싶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싶으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을 자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겪으셨지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고 그 문을 반드시 통과하셔야만 했다. 이것이야말로 사망이 끝인 세상에 문을 만드신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를 패배라고 알고 있는 세상에서, 사망이 우리를 삼키는 조건 속에서, 그 사망을 통과하라는 훈련을 요구받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우리의 도덕성이나, 승리주의나, 주술적 신앙은 사망의 길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의 조건 속에 집어넣고 훈련을 시키신다. 여기를 우리가 쉽게 통과하지 못한다.

이사야 6장이다.

이사야는 소명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가서 말씀을 전해도, 들어도 저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다. 이사야가 얘기했던 사명의 주인공이 나다. 너희가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모를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하는 일도 그런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너희는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고 생각도 못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모를 길을 여셨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목적과 방법과 길을 허락하셨다. 어떻게? 우리에게 사망을 이기는 부활 생명을 주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래서, 그 사람의 운명이 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리가 운명이요, 부활이 운명인 인생이 주어졌다.

(3) 예수를 믿고도 왜 죄를 짓는가? 잘못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죄는 사망을 만들지만, 우리의 신분상 우리에게는 죄가 사망을 선고하지 못한다.

법 아래에 있을 때는, 사람을 죽인 것이 죄지만,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사망에 들어가는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혼만 난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여러분의 도덕성을 약화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자녀를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그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잘잘못을 가려주는 것이다. 살려둘까, 죽일까를 판가름하지 않는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판단을 해야 한다.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롬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죄를 묻지 않는다. 사망에 가지 않는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구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공포가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두려울 수 있지만, 그것은 공포가 아니고 진정성이다. 자식이 부모 말을 안 듣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죽이는 부모는 없다.

죽는 것보다 더한 벌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바를 이루시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팔십 평생을 사는 동안, 자존심을 지키고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화를 내신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우상이었다.

우상은 바알을 섬겼다, 아세라를 섬겼다, 가 아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길로 우리가 가야 하는데 곁길로 갔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돈이다. 부자를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우리의 최대의 만족이 되어 있다.

우리가 다른 종교에 예수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를 경멸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달라야 하지 않는가? 자녀라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장난이 심해서 여러 명이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먹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사람만 남았다. 그 사람이 다 책임지는 거다. 도망도 못 갔다면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을 해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버지한테 혼은 나지만 아버지가 죽이지는 않는다.

(행4:12)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통과한 과정과 길을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망을 꺾고 부활을 심는가? 창조 때에도 온 힘과 정성을 다 쓰셨듯이, 구원에 대해서도 열심을 다해 오셨다는 사실이 역사 내내 담겨있는 것이다.

다. 결어

(1) 지금 코로나 시대이다. 코로나는 없어져야 할 병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도전이다. 우리가 딴생각을 품고 널부러져 있으면 깨우시는 것이다. 벼락을 치듯이. 욥의 울부짖음에 폭풍 속에서 오시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잠자는 영혼과 일상을 깨우기 위해 얼마든지 일하신다. 성경은 지금도 말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일을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하나님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의 알량한 소원을 가지고, 타협을 하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벌을 받아 마땅한 기도이다.

아버지, 성적은 따지지 마시고 용돈이나 많이 주세요.
용돈이 문제냐? 내가 모든 것을 너에게 물려 줄 거야.
그런데 너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니?

여기서 빗나가면 우리는 겁내지 않아야 할 것을 겁내게 되고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게 된다.

(2) 돌아와서 성경의 증언을 들어야 한다. 무엇이 여러분의 힘인가? 예수로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 권능이 아닌가? 우리의 못난 것이 못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속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 이 믿음으로 여러분의 모든 현실을 이겨내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은 곤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기르시고, 복되게 하시고, 명예로운 자리에 오라고 씨름하십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쉬운 길로 도망가지 않게 하옵소서. 비겁하거나 부끄럽거나 변명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서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