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3) (왕상 22:13∼28)

2022. 1. 9. (일)

박 영 선 목사

1. 내용

가. 서론

(1) 북이스라엘의 유명한 악한 왕인 아합과 남왕국의 아사왕의 아들인 여호사밧 왕이 동맹을 맺고, 늘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되는 북쪽에 있는 아람 왕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두 나라가 합심을 했으니 전에 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들을 찾아올 것을 기대하고, 또 이 일이 하나님께 합당한 일인지, 하나님이 편들어 주실 것인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기로 한다.

그래서 아합왕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선지자들을 불러서 묻자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하게 하시겠다, 라고 하셨으니 전쟁하러 나가십시오, 승리를 취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뭐가 좀 께름칙했는지, 이외에 더 믿을 만한 선지자가 없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합이 답하기를,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 사람은 늘 나에게 흉한 말만 해서 내가 부를 마음이 없었습니다, 고 했다.

그래도 불러 보십시다. 그래서 미가야를 부른다. 이 미가야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자, 올라가서 승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합이 말한다. 너 진심을 얘기해라, 똑바로 얘기해라. 너 나한테 좋은 말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웬일이냐?
(2) 미가야가 진실을 말한다. 내가 환상을 보니 하늘의 만군이 여호와를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가서 아합을 꿰어서 전쟁터에 나가 죽게 하겠느냐, 그러자 모여 섰던 많은 영들 중에,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고 했다.

그중 하나가 말하기를, 제가 가서 꿰어 오겠습니다. 어떻게 꿰어 올래?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서 그를 꿰어 오겠습니다. 네 계책이 좋다. 너는 가서 그를 속여서 죽음으로 끌어내라. 네가 성공할 것이다.

아합은 결국 길로앗 라못의 전투에서 죽게 된다.

나. 본론

(1)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도덕성에 어긋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정의롭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말하자면 누구를 속이고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 내는, 이런 비겁한 방법을 명하시고 허락하시고 보내실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이런 질문을 하도록 한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다면 타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든 것의 근거는 하나님인데, 모든 기준도, 내용도 방법도 하나님인데, 하나님과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인정할 수 없는 길을 갔다고 하면 하나님이 잘못된 것인가, 내 기준이 잘못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와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더 밑바닥에 깔린 신앙의 근거는 도덕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내 안에 있는 먼지 털기를 한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야 기도가 나오고 그래야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꾸중을 듣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돌아서서 도덕적 과오를 먼저 지우고 돌이킨다. 우리 신앙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도덕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도덕이 기준인 사람들의 문제는, 그 규칙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게 욥이다.

(2) (욥 7:17∼21) 묘한 고백이다. 고백이라기 보다는 원망이다. 욥의 친구들은 말한다.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을 보니까 너에게 죄가 있다.

욥은 대답한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했단 말이냐?

욥이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잘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제가 죄를 지었던들 하나님께 뭐 그리 심각한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아니십니까? 나와 씨름을 해야겠습니까? 나는 죽어 버릴 테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욥은 자신의 시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 죽음으로 항변하는 것은 자기를 변론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답이 없구나. 내가 아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는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일이 생겼으니, 나는 모르겠다.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들추어내서 씻어 내고, 생각나지 않았던 것까지 다 고백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죽으면 좋은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다.

목을 맸는데 밧줄이 끊어졌다. 강물에 뛰어들었는데 물고기가 밀어 올려서 살았다. 이런 간증은 수도 없이 많다.

(렘 20:7) 7절은 이런 뜻이다. 주께서 저를 속이셨으므로 제가 속았나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켜서 제가 이 일을 맡았는데 보상이 이것밖에 없단 말입니까?

예레미아는 무엇을 속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권고하기 위해 세웠다면 그들 앞에 갔을 때 어떤 권위가 있어야 했고 백성들은 항복해야 했다.

거꾸로였다. 예레미아는 선지자가 됨으로써 누구보다도 더 처절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기준으로 현실에 대응한다고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모르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거짓말도 어떻게 긍정적으로 쓰시는가?

(3) (롬 5:9∼11) 우리는 쉽게 이렇게 정의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되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피를 흘려 우리를 살아나게 하셨다면 예수께서 살아나신 이후에는 얼마나 더 크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겠는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사망에서 불러일으켰다면, 영생이신 예수께서 주실 것은 얼마나 클 것인가?

하나님의 거짓말이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약속들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이 말은 우리에게 어렵다. 우리의 신앙 기준이 도덕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가 자식과 부모 같은 인격이 있는, 사랑이 있는 관계가 아니라 비정한 규칙의 관계가 되었다.

비정하고 무정하면 용서가 없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 딱 규칙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내 자식에게는 더 엄하게 할 수 있다.

쟤한테는 왜 안 그러세요? 쟤는 내 자식이 아니잖아.

하나님은 우리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엄하시다. 우리의 유익과 복음을 위해 화를 내신다. 우리를 궁지에 모시는 것은 거기가 끝이 아니라 영광과 지위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회개는 더 잘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죄를 안 짓는 게 전부이다. 답답하다.

로마서 9장에 가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고 너희 손가락질 하지 말라. 너희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복을 받았다. 그러니 저들의 넘어짐이 너희에게 구원이 되었다면 저들이 회복될 때에는 너희에게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느냐? 그러니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저주한 것은 얼마나 못난 짓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화내시고 아직까지도 회개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로 분명한 증거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선민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주어졌던 백성이다. 그 약속이 취소될 수 없다면, 저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받는 벌들이, 약속 안에서 허용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약속은 그들이 받는 벌보다 크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 삶에서 적용된다.

우리의 좌절, 어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은 더 크다.

(4)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이렇게 말한다. 그때가 좋았어. 우리는 몰랐어. 우리가 다 같이 모였을 때 좀 더 감사해야 했는데.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나는 반문한다. 그때는 천국이었는가?

그때는 코로나가 없는 자리였을 뿐이다. 그때 여러분이 영광의 최고의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교회에서, 여기는 정말 교회답다, 하는 곳은 별로 없다. 물론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그렇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교회사의 문제이다. 교회사의 문제라는 건 우리의 역사가 짧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은 순교와 부흥밖에 없다. 경험 부족으로 우리는 더 깊은 자리에 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돌아가자, 이다.

안이숙씨의 󰡐죽으면 죽으리라󰡑를 말하면서 내가 얘기했다.
안이숙씨는 계속 자책한다. 나는 순교를 허락받지 못했어.
순교가 끝이면 안 된다.

죽음이 명예라면 살아있는 것은 더 큰 명예와 더 큰 기회여야 한다. 이걸 모르니까 죽기를 바란다. 회개에 그치지 말고 돌아서서 앞으로 나아가라.

믿음의 약속의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하나님은 정성을 다해 우리를 키우신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죽음에도 내어놓는다. 조롱도 받고 외면도 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구약 내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같은 역사를 지내왔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넘어 이 모든 것을 유익으로 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이 베푸신 이 은혜는 거짓말이다. 도덕적으로 보면.

잘못했는데 잘했다고 하는 것 아닌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묻는다. 창조를 믿어? 그럼. 그 거짓말을 믿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를 벗어나면 모두 거짓말이라고 한다.
처녀가 애를 낳은 걸 믿어? 믿지. 그 거짓말을 믿어?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 가지는 끝이 없는 사랑과 정성, 넓은 품, 진정성이 거짓말인 셈이다. 잘못한 아이에게 잘했다고 하지 않는가?

은혜를 베푸시며, 기적을 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약속을 반복하시며, 우리가 세상에서 잘못 가지고 있는 목표와 생각을 붙잡아 돌이키게 하시며,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마주쳐 그를 무릎 꿇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다만 불편한 것을 없애거나, 내 속에서 만족하려는 타협을 넘어서야 한다. 여기 신자의 자랑이 있다.

다. 결어

(1) (사 43:22∼44:5) 너는 나를 잊었어도 나는 너를 잊을 수 없다. 나는 나 된 것을 이유로 너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이룰 것이라. 너희가 끝내,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라, 나는 여호와의 자식이라, 라고 말하는 날을 내가 반드시 만들겠다.

세상의 위협과 도전이 너희의 현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깨우치심과 우리를 기르시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세상의 위협을 눈 부릅뜨고 보는 것처럼, 성경의 약속들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벌하시는 하나님. 책망하시는 하나님.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도전과 위협이 현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이 현실보다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일어서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