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11) (왕상19:8~18)

2021. 12. 12.(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즘 남포교회는 엘리야 세상이다. 엘리야라는 말의 뜻은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다’ 는 뜻이라고 한다.

엘리야는 등장부터 달랐다. 보통 선지자는 어디에 사는 누구의 손자, 또는 아들 누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다, 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갑자기 아합에게 나타나서 강력한 말로 도전한다. 앞으로 내 말이 없으면 비는 안 오고 가뭄이 계속됩니다.

아합의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아합이 했던 많은 악행을 고려해 보면 이런 말을 듣고도 엘리야를 죽이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2) 이런 입장은 곧 바뀐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등 850명을 전부 죽였다. 물론 하나님의 일 하심이다. 그러나 얼마나 살벌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엘리야가 아합을 죽이지 않았다. 죽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합을 모시고 궁전까지 갔다.

엘리야는 정말 종잡을 수 없다. 아합에게 과감한 도전을 하고는 바로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었다.

갈멜산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뒤 바로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갔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제자 삼으라고 하셨지만 별로 엘리사에게 친절한 스승은 못 되었다.

그리고 사마리아 왕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찾으러 왔던 여러 군사들을 죽게도 했다.

그리고 불 수레와 불 말을 타고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갔다.

(3) 나는 잘 이해 못 했다. 불 수레를 탄 것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친히 안고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는 엘리야대로 감싸 안으시고, 역사는 당신의 뜻대로 발전시키셨다.

엘리야야, 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기회를 더 주어야 하지 않겠니?

2. 내 용

가 서 론

(1)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 인물 중에 하나이다. 구약에서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대표적인 인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종, 즉,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대표로 내세울 수 있다.

엘리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매우 도덕적이고 매우 경직된 지도자로 되어 있다. 갈멜산에서의 승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맞상대한 주인공,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 종, 같은 식으로 이해한다.

엘리야는 이방 우상 선지자들을 850명이나 죽인 큰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자신이 기대한 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몹시 불만을 토로하고, 하나님 앞에서 토라진 모습을 보였다. 성경에는 이런 엘리야에 대해 하나님이 대응하신 내용이 강조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2) 엘리야는 등장부터 돌연한 출연이었다. 디셉 사람 엘리야는 등장하자마자 하나님께 어떤 명령이나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합에게 도전을 한다.

내 말이 없으면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삼 년 반의 가뭄을 선언한다. 갈멜산의 대결에서도 엘리야는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합과 많은 선지자들을 상대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세 때처럼,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라, 나일강을 피로 물들여라, 홍해를 갈라라,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식으로 엘리야가 만든 규칙대로 대결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엘리야는 다 응답을 받는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하나님의 종임을 나타내 주십시오.
그 후 갈멜산에서 일곱 번이나 기도해서 구름이 오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한다. 이걸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한것이 아니라, 엘리야는 강청을 하고 오히려 하나님은 종속적으로 참여한 것처럼 보인다.

나. 본 론

(1) 이렇게 담대한 엘리야의 사역은 다 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가 없고 아합 왕권도 몰락되지 않는 현실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도망을 간다. 목숨을 위해서도 가지만 하나님에 대한 불만 때문에 선지자의 사명을 벗어 던지고 광야로 왔고 호렙산에 이른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느냐, 라고 물으시지만, 광야에서는 뜻밖에 천사를 보내어 먹이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힘을 내서 가라, 라고 하실 뿐 다른 말씀이 없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자 하나님이 물으신다.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느냐?

엘리야의 대답에는, 하나님이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빈정거림이 묻어난다.

아합이 모든 하나님 믿는 자를 죽이고 나 하나 남았고, 나도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수가 있습니까? 도망가는 수밖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 굴 앞에 나와서 서라.
결국 엘리야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을 안 하니까 제가 이러는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강한 바람도 보이시고 지진도 보이시고 불도 보이시지만 그 속에는 안 계시고 세미한 음성 속에 등장하신다.

아람 왕 벤하닷을 폐하고 하사엘을 왕으로 세워라. 이스라엘의 아합을 제거하고 예후를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네 후임으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워라.

하나님은 엘리야의 불만에 대해 이렇게 답을 하신 것이다.

엘리야의 불만은 이것이었다.

왜 하나님께서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저의 진심을 보이시고도 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얘야, 역사를 더 연장하자. 여기서 끝내지 말자.

나는 불을 내려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과 지금 나의 종이 하는 일이 나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러나 백성들이 회개할 것과 왕권이 회개할 것을 기다린다. 그러니 지금 어떤 결정을 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엘리야는 불만이었다. 그는 잠시 무대에서 떠난다.

아합과 벤하닷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는 이름 없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죽게 되어 엘리야에게 물으려고 왔을 때, 엘리야는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찾으려고 오는 오십 부장과 병사들을 불태워 죽인다.

하늘에 구하여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려와 다 죽인다. 두 번째도 똑같이 반복되었으나 세 번째는 오십 부장이 빈다.

제발 전과 같이 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심부름을 온 졸병에 불과하니 저희와 함께 가 주십시오.

이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가라 하셨고, 그제야 엘리야는 나선다. 후임인 엘리사를 만났을 때도 그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엘리사가 친근하게 하고 붙잡으려고 해도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다.

위와 같은 사건들에서 하나님과 엘리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보통 선지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어떻게 반응을 보이시는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인데 엘리야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단순 무식한 선지자이다. 순진하고 진지하고 무식하다.

(2) 그는 결판을 내고 싶어 했다.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한 일을 칭찬하시지만 지금 결판을 내자는 엘리야의 조급함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폭풍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엘리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기를 기도했고 그를 데리러 온 아하시야의 부하들에게 하늘의 불을 구하여, 말하자면 폭력적 결과를 기대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를 꾸짖지 않으신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마음을 바꾸신다.

엘리야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주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어가기로 결심하신다.

하나님께서 갈멜산에서 역사를 끝장을 내고 싶으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자신을 증명하신 것은 사실이다.

엘리야는 역사를 끝장내자고 했고 하나님은 그러지 말고 역사를 이어가자고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이 있게 한 점이 엘리야 사역의 가장 위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야는 순진하고 조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자신의 사역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불쌍히 여길 마음은 없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면서, 니느웨 성이 멸망한다고 외치도록 하셨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한다. 여기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장차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주적이 될 나라였다. 마땅히 멸망시켜야 할 나라였다. 그러나 왕과 백성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멸망시킬 계획을 철회하셨다.

요나는 화가 나서 동산에 앉아 니느웨가 언제 망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뙤약볕 아래서 기다리는 것이 고역이 되자 하나님이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그늘을 만들어 주신다.
시원해졌는데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어 넝쿨을 씹게 하시고 넝쿨은 없어지고 다시 불볕이 되었다. 요나는 죽겠다고 아우성친다.

왜 그러냐, 요나야.

박넝쿨 하나를 허락하시지 않는 하나님 못 믿겠습니다.

요나야, 박넝쿨 하나에도 너는 목숨을 거는데 니느웨성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백성이 12만 명이나 있다. 내가 그들을 아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무지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한 번 더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 무지함은 엘리야에게서 본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고 잘못했지만,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무지한 정의와 심판을 내리자고 하니까 하나님은 마음으로 뜨끔하셨다.

그게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향한 엘리야의 열성에 감격하셨을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엘리야에서 보이는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여러분이 마음속에 가져야 할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순진함이 가지는 약점들에 대해 상처를 주시지 않는다. 꾸짖지도 않으신다. 엘리야를 하늘에 데려가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품에 안고 데려가신다.

엘리야의 승천은 영광스러웠다기보다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아끼셨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단점에 대해 하나님은 보상하시지 않고 보호하셨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신 깊은 애정을 우리로 보게 한다.

(3) 역사를 연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무지한 자들이 그들의 무지함으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을 깨우치고 싶어 하신다. 그들을 깨우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식이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완성하기로 이때 마음먹으셨다. 마음을 바꾸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판의 잣대가 율법이었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 신앙과 불신앙.

그러나 신약에 오면 이 잣대가 은혜로 바뀐다. 은혜로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가 등장해야 한다.

예수가 등장하여 은혜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고전15:55~58) 세상이, 사망이 운명이 아니라 생명이 운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망을 조롱한다. 이 일에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과 예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우리의 인생.
이러한 이김은 하나님께부터 만 나오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 우리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헛되지 않은 삶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갈멜산은 사망이 끝장인 현장이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불로 심판한 것은 마땅한 자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를 더 끌어서 예수를 보내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겪게 하고 성령이 오게 했다.

이제는 법이 잣대가 아닌 은혜가 심판의 잣대가 되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는 한 사람의 범죄로 모두 죄인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두가 은혜 아래 있게 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아담의 잣대가 예수 안에서 은혜의 잣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씨를 심어, 결실을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한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에서는 이 수확량을 세지 않는다. 다만 결실의 풍성함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사망이 없다. 사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사망은 더 이상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엘리야는 율법의 잣대로 충실히 하나님의 일을 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는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마음이 움직이셨다. 생명이 이기는 자리까지 역사를 진전시키셨다. 그래서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을 생명이 왕 노릇 하게 하셨다. 세상에서의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며 아무 의미가 없다.
사망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지만 생명은 자라게 하는 것이다. 영생은 시간적 개념보다 더 크게 존재의 영광과 무한함과 풍성을 말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인류를 법을 근거로 하는 대상에서, 은혜를 근거로 하는 대상으로 바꾸셨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다. 명예로워라, 영광되라, 한번 해봐라, 기회를 유용하게 써라.

우리의 걱정은 내가 잘못하면 지옥에 간다, 가 아니다. 더 잘하는 데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탁구를 할 때 실점을 했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신자들도 기독교가 이렇게 바뀌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요12:24)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얘기하신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죽음이 끝인 우리의 운명을 사망이라는 자리에서 부활로 꽃피우는 것이다. 부활이란 생명이 사망을 겪어야 가는 자리이다. 사망이라는 자리가 없으면 생명과 부활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생명은 계속 승리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는 생명이 불순종을 겪음으로써 사망에 이르고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에 이른다. 이러한 구원 역사가 우리에게는 이미 증명되어 있다

(4) 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두 가지 불만이 있다.

사회 외적인 요소로서 권력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 인간 내적인 요소로서 스스로 부족하다는 자책인데 이러한 생각들은 바로 사망의 잣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명의 잣대로 간다는 것은 못 했으면 다시 한번 더하는 것이다.

손흥민이 지금 우리나라의 최고의 애국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오른발 왼발을 가리지 않고 차도록 혹독한 훈련을 시켜서 손흥민이 지금 저렇게 훌륭해졌다고 한다.

훈련이란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는 거다. 잘하는 사람은 슛을 때리기만 하면 골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골을 넣어간다. 우리는 그가 슛을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신자들이 가지는 기회와 운명도 이와 같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설명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내 마음에는 육신을 따르는 죄의 법칙이 있고 진실을 따르는 영의 법칙이 있다. 그러나 나는 늘 죄 아래 잡혀 온다. (롬7;23~24)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사도 바울은 뜻밖에,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리로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한다. (롬7:25)

갈등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갈등이 옛날에는 죽음과 삶의 문제였는데 지금은 영광과 기회의 자리에 온 것이다. 여기에는 사망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다. 결 어

(1) 우리가 갈멜산 전투를 기억하고 엘리야를 높이 평가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가자,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기억해야 한다. 더 간다는 것이 다만, 한 번이라도 잘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라고 우연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선택해야만 하는 율법의 기준에서 끌어내어 은혜의 기준 위에 올려놓으셨다. 하나님이 올려놓으셨으니 우리가 마음대로 은혜의 기준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우리가 속한 자리에서 승리하라고 하신다. 여기서 승리는 자격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의 속성이다.

이러한 명예를 누려라, 잘난 척을 해봐라, 라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만 한다. 잘난 척은 한 번도 못 한다.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복음일 수 없다.

(2) 엘리야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있다. 여러분 가정에서 최고의 위기는 부부가 이혼하려는 것이다. 자식들은 엄청난 공포에 질리게 된다. 막판 싸움에서 이제는 끝장을 내자고 하다가 돌이킨 많은 경우가 어린애가 울었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울 때 부모가 자기의 자리를, 자기의 책임을 각성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를 벗어나는 결정을 하게 된다.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도 그랬다, 라고 우리를 위로하신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못나게 살지 말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일들을 실제로 행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은혜 위에 있고 승리와 영광의 기회라는 것을 알게 하셨으니, 열심히 살겠나이다. 지켜주시고, 복되게 하시고, 우리의 입술에 찬송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이번 설교를 들었다면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정리되어야 한다.

갈멜산 전투를 보시고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셨다고 한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멜산 전투 전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역사를 끝내야겠다, 고 마음을 먹으셨는지 안 먹으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전투의 결과를 보시고 역사를 더 계속 시켜야겠다, 고 생각하신 것은 분명하다.

설교 내내 이 말씀이 의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부부간의 이혼 전쟁을 예로 들어 주셔서 겨우 알아듣게 되었다.

그날 저녁. 그 부부는 오늘은 결판을 내야지, 하면서 싸웠다. 그래 내일은 법원에 가자. 시끄러운 소리에 아이가 깼다. 아이는 살벌한 분위기에 질려 울기 시작한다. 부부는 생각한다. 아이구, 내 새끼가 무슨 죄냐. 우리가 참아야지. 목사님은 부부의 이런 결정을 위대하다고까지 하신다.

(2) 하나님도 꼭 그러셨다는 것이다. 내 종은 엘리야 한 명인데 헛된 우상을 섬기는 종들은 850명이나 된다구. 좋아. 오늘 내가 끝장을 내고 세상을 정리하겠어. 그러나 막상 백성들이 가짜 선지자 850명을 모두 죽인 것을 보고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셨다. (감동하셨을 수도 있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을 수도 있다.)

아이구, 이것들이 내 새끼였지. 아무렴 좀 더 기회를 주어야지.

엘리야 사역의 위대한 점이 여기라고 하신다.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신 것, 역사를 더 이어지게 하신 것.

사실 엘리야는 그 반대였다. 여기서 끝을 내세요, 하나님.

(3) 하나님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답을 하신다.

아니다, 엘리야야, 더 가자.

아니다, 내 아들 예수야, 더 가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