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9) (왕상15:9~24)

2021. 11. 14.(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설교 때 영화 얘기를 또 하셨는데 이번엔 벤허도 아니고 대부도 아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거대한 유람선이 조난된다는 점에서는 타이타닉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조난선에서 몇 사람의 생존자가 구조를 받게 되는데 그들은 뒤집힌 배의 맨바닥 (바닥이 위로 치솟았다.)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 거기서 쇠 바닥을 망치 같은 것으로 두들겨 바깥쪽 배 바닥에 착륙한 구조 헬기에서 들었고 결국은 바닥을 용접으로 뚫어내고 그들은 살아난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있었는데 배의 기관실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지나야만 했었다.

모두가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있을 때 배에 같이 타고 있었던 신부님(진 헤크만)이 천정으로 점프해서 열기 밸브에 매달리고 온몸으로 밸브를 잠근 뒤 본인은 떨어져 죽는다.

신부님은 밸브를 잠그기 전 이런 유명한 말을 한다.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려거든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

인생이란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대해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고 영화는 얘기한다.

(2) 목사님께서 실력자로 인정하는 허리우드 스타들이 몇 명 있다. 대표적으로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라는 죄수 역할을 맡았던 모건 프리만이다. 또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등은 합격점을 받는다.
(사실은 많은 배우가 있지만 이름을 다 기억 못 하겠다.)

모건 프리만이 주로 선한 이미지의 역할을 맡는 데 비해 진 헤크만은 주로 악역을 맡는다. 그런데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는 뜻밖에 신부님 역할을 맡았고 조연이면서도, 결코 적지않은 비중을 영화 속에서 차지한다.

(3) 설교 끝날 때쯤 한 편의 영화를 더 소개하셨다.

『Cool Hand Luke』 우리 말로는 『폭력 탈옥』 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직역하면 “비정한 루크” 쯤 되는데 여기 루크(Luke)는 누가복음의 그 누가이다. 폴 뉴먼이 주연이고 연기파인 조지 케네디가 나온다고 해서 한번 보려고 한다.

목사님 좋은 작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밤에는 좀 주무셔야죠. 심야에 비디오 보시는 건 건강에 해롭습니다. 네? 이 작품은 낮에 보셨다구요? 죄송합니다.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 우리가 다룰 아사왕은 열왕기에 나타나는 왕 중에 선한 왕으로 분류되는 몇 안 되는 왕이다.

아사라는 이름은 서양 이름에도 흔하다. 아서(Arthur)왕 이야기의 아서도 이 아사에서나온 이름이며 맥아더의 아더도 이 아사에서 나온 이름이다. (필자 주: mac은 영어에서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맥아더는 아더의 아들이다.)

좋은 이름이다. 아합이라는 이름을 쓰는 서양인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는 무리와 달랐는가?,가 오늘 본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의 기록은 어떤 사안은 과장하고 어떤 사안은 감추어서 기록되어 있다. 사실 그대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기에 울분으로 쓴 역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우리가 살펴야 한다.

집에 가셔서 역대하 14장 이하를 읽어 보시면, 아사왕 이야기가 거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열왕기의 기록보다 훨씬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 그는 왕이 된 이후, 구스왕 세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는 바람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위기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서 약한 자를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기도해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그에게 선지자가 찾아와서, 하나님은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이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니 믿음을 가지고 강하게 왕 노릇을 하십시오, 라는 격려를 받게 된다.

이 말은 아사왕에게만 격려가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과 인근의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전파가 되어서 에브라임 지파나 시므온 지파에서도 아사왕을 찾아 내려오고 함께 모여 큰 부흥을 이룬다.

그들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다 죽이자, 라고 열심을 내면서 약속을 한다. 맹세도 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것을 맹세해야 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맹세를 했다고 봐야 한다.

우상숭배가 주류를 이루는 분위기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미약했고 믿기도 어려웠고 그런 상황이었기에 맹세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당시 노획물 중에 소를 700마리 염소를 7,000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고, 나라를 힘있게 여호와 신앙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그 후 북왕국 이스라엘이 쳐들어왔는데, 아사왕은 북왕국 보다 더 북쪽에 있는 아람왕 벤하닷에게 많은 공물을 주고서 북왕국의 뒤편을 공격하게 했다.

이것으로 북왕국은 물러갔고 아사왕은 이 해결을 위해 외교전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셨다.

너는 100만 대군을 보냈던 구스왕 세라도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했었는데 이렇게밖에 못하는가? 네 남은 생애는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사왕은 회개를 하지 않고 선지자를 옥에 가두어버린다. 그리고 41년 동안 통치를 했는데 39년째에는 발에 병이 들었는데 여호와께 묻지 않고 의원에게 물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여기서 의원은 아마도 무당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 본 론

(1) 이런 아사왕의 행적은 그가 진정한 신앙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아사왕은 구스 군대를 물리치고 하나님만 섬기자는 맹세를 했으며 그때 그의 할머니 마아가도 폐위를 시켰다.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아내였고 아비얌의 어머니였고 아사에게는 할머니였다. 마아가의 얘기는 르호보암 때에도 앞뒤로 두 번이나 등장하고 아비얌때도 등장하고, 아사때 와서 할머니를 폐위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데 마아가는 여호와 신앙의 반대편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 내에서도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쫓아내기 어려웠다.

지난번에 아비야 얘기를 할 때, 아비야가 잘나가고 힘을 내기 시작할 때, 3년 만에 갑자기 죽는데, 제가 아마도 아비야는 독살당했을 것이다, 라고 했을 때 여러분은 아무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늘 보면 조금 이해가 되고 그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마아가가 폐위가 된 것이다. 이 일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아사왕 통치기의 남왕국 얘기는 짧게 기록한 반면, 같은 시기 북왕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하여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사왕 2년에 북왕국을 시작했던 여로보암이 죽고 그 아들 나답이 왕이 된다. 나답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바아사란 사람에 의하여 죽고, 왕권을 뺴앗기고, 그 가문이 몰살을 당한다. 바아사는 씨를 남기지 않고 죽인다.

바아사는 비교적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아사왕 26년에 죽고 그 아들 엘라가 왕이 된다. 엘라도 2년이 안되는 1년 남짓한 기간 재위했는데, 시위대장이었던 시무리가 반역을 하여 엘라를 죽인다.

시무리도 바아사와 엘라의 가문 모두를 죽여버린다.

시무리가 반역을 통하여 왕권을 쟁취했지만, 군부에서 시무리를 인정하지 않고 오므리라는 군대 장관을 왕으로 모신다. 시무리는 자살을 하여 7일 만에 죽었으나 오므리를 지지하는 층과 정적 디브니를 지지하는 층이 맞서서 4년 동안 내란을 치루었다.

아사왕 31년에 오므리는 왕이 된다. 아사왕 38년에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왕이 된다. 그리고 아사왕은 재위 41년째에 죽는다.

아사에게는 북왕국의 왕권 변동이 생생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역성혁명과 폭력이 눈앞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이 아사가 본 현실이요 역사였다. 아사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에 대단히 급급했다.

남왕국도 왕권을 지키는 근거와 명분이 무엇인가, 할 때 우상을 섬기는 것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혼재되어있었다. 이 두 가지 일을 필요에 따라 자신들의 명분으로 삼았다.

아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유일하고도 시급한 문제는 왕권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였다. 왜냐하면 왕권을 빼앗기면 자신의 가문이 씨도 안 남고 전멸되기 때문이었다. 아사를 보면, 어떤 때에는 기도를 어떤 때에는 맹세를 했다가 어떤 때에는 외교 정책을 펼친다. 칭찬도 받고 꾸중도 듣는다.

우리는 열왕기를 읽을 때마다 이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왜 우상을 섬겼을까, 여호와를 섬기면 모든 것이 형통했을 텐데, 라고 단순한 이분법에 의한 의문을 제기한다.

아사가 여호와를 진정으로 의지했으면 그에게는 불안도 변덕도 없었을 것이다. 북왕국에서 일어났던 일은 언제든지 남왕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아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북왕국은 계속 왕권이 바뀌고 우상을 앞세워서 명분을 세워 자신들을 변명하고 거짓된 공감을 요구했다.

남왕국도 동일하게 여호와 신앙을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공감과 어떤 이해와 어떤 항복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안 해주신 것 같다.

왜 여호와도 섬겼다가, 딴짓도 했다가 하는가? 우리 현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앙생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때 불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감동하게도 하시고 어떤 때는 외면하신다. 어떤 때는 힘든 곳으로 몰고 가신다. 이것이 신앙 현실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일하시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어떤 정성에 기계적으로 답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놀란다.
이 시대의 왕들이 누구는 쉽게 여호와를 따라서 전 생애를 마쳤다, 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에서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그가 겪는 현실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낫지 않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기도는 기도고 해답은 없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에게도 제대로 된, 우리의 기대에 맞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

(2) 우리 교단에서 가장 큰 어른은 박윤선 목사님이다. 윤리 도덕적으로 그렇게 완벽한 분은 없었다. 그의 생애에 걸쳐서 최고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 교단은 박윤선 목사님께서 이렇게 하셨어, 이런 생각을 하셨어, 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결론이 된다.

그러나 그분은 입버릇처럼, 설교를 할때에도, 대화를 할때에도 늘 이 말을 하셨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모르는 죄를 많이 지셨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윤리 도덕적으로는 실수가 없었던 분이다.

그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속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현실이 있었고 그것을 다 극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답을 알 수 없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자. 이 열왕기 내내 성경은 이런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기대와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준다.

우리의 현실도 그렇다. 우리의 신앙 현실은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다.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순진하게 생각해서 기도 많이 하고 정직하게 살면 세상 사람들보다는 나는 인생을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아니라고 한다.

성경은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는 계속 그렇다고 우긴다. 그러다가 분통을 터트리고 시치미를 떼고 신앙생활을 한다.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답은 없고 도망갈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의 그 얼굴로 매 주일 교회에 온다. 그건 기적이다. 그런 상태로 계속 교회에 올 수는 없는데 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습관으로 나온다. 나는 몽유병자다. 나는 정신이 없다. 이것 이외에 답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면 왜 우리의 기대와 소원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가?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실이 우리를 최악의 자리까지 밀어 넣는다.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신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밀리고 밀려서 맨 끝에 가면 우리의 기대가 부서지고, 우리가 스스로를 속였던 것도 다 부서진다. 여기서 정한 마음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비명이 나온다.

(욥23:1~9) 기도해도 답이 없고 금식을 해도 답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은 만나주시지 않는다. 이런 아우성이 멋진 영화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우리말 번역은 탈옥이라고 해서 약간 재미없게 되었는데, 원제는 『Cool Hand Luke』이다. 여기서 Luke는 누가복음의 누가를 말한다.

서양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이름으로 많이 이름을 짓는데 누가라는 이름은 많이 안 쓰는 것 같다. 존을 제일 많이 쓰고 톰도 많이 쓰고 오늘 본 아서(아사)도 많이 쓴다.

Cool Hand는 비정하다는 뜻인데 영화 내용도 비정하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가졌으나 확인이 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친다. 하나님이 답을 안 해주시고 만나 주시지 않아서 자기 몸을 담보로 하고 위기의 상황으로 자꾸 자기를 밀어 넣는다.

법죄를 저지르고 감옥에도 가고, 탈옥도 한다. 낭떨어지에서 떨어진다면 그때는 하나님도 잡아주시겠지, 라는 생각도 한다.

맨 마지막 장면에 그는 시골 조그만 교회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하나님, 이제는 답을 하시지요. 아무런 답이 없다. 좋습니다. 무릎을 꿇겠습니다. 그리고 천장을 보지만 아무도 안 나타난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총에 맞아 죽고 영화는 끝난다.
여러분이 이 영화에 결론이 없다고 쉽게 보시면 안 된다. 실상 우리는 결론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상이 완벽하게 나타난 사람은 없다. 그리고 10년 후에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가 나온다. 진 헤크만이 신부로 나오고 그 신부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전통적인 신앙으로는 답이 되지 않아서 분노하는 신학자이다.

포세이돈 호는 태풍에 뒤집혀서 살아남으려면 갑판이 아닌 수면으로 솟아오른 배의 바닥으로만 가야 했다.

기독교가 세상의 진리를 뒤집어 놓았다고 표현하는 장면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기관실을 통과해야 했다. 건너가야 하는데 뜨거운 밸브를 잠그지 않으면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때 진 헤크만이 밸브에 뛰어올라 잠그기 시작한다. 뜨거운 증기는 계속 나온다. 진헤크만은 몸부림치면서 소리친다.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알고만 있었던 사실을 전면에 꺼내어 내놓는 것이다.

(3) 욥이 그렇다. 욥은 이유를 알 수가 없는데 최악의 사태로 밀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대드는 일밖에 없는데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때 비로소 욥이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이다. 그의 기대와 소망과 값싼 해답들을 다 빗겨낸 후 맨몸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사건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여러분의 소유를 모두 바치고 수도원에 가면 된다, 는 뜻이 아니다. 인생 전체에 대한 얘기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오해, 왜곡, 기만, 기대, 우리의 거짓말 등을 벗겨내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아우성치는 것이다. 불평할 대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곳으로는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때이다.

우상에게는 도망가야 소용이 없다. 약속도 없고 기대도 없지 않은가?

이사 가는 것을 물어보려고 점집에 갔다가, 애들 학교는 어디로 보낼까요?, 라고 묻지는 않는다. 누구와 결혼할까요?, 도 안 묻는다.

다. 결 어

(1) 우리는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 한계 속에서 계속 타협하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계속 몰아서 하나님의 질문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드신다.

이것이 신자들의 신앙 현실이요, 신자들의 당연한 신앙 경로이다.

우리는 이것들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조심해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루아침에 찬송 한 장 부르고, 기도 한번 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인생을 사니까, 아무도 시간과 인생이 만들어 내는, 갈등과 절망이 만들어 내는, 어떤 실력, 근육, 정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커 나아가지도 않는다.

원망하고 체념하고 대강 사는 신자를 양산해 버렸다. 여러분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하나님은 이 도전을 계속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흔드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열왕기에서 보는 왕들의 형편을 볼 때마다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랬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생각하지만, 열왕기 저자들의 판정은 하나다. 그는 다윗의 길을 따랐다.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 이 판정을 삶의 중간에서는 할 수 없다. 결론에 가야 한다.

(2) 우리 인생도 그렇다. 우리가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한다고 이해했는가?

실패와 절망이 끝이 아니고 그게 일을 한다는 걸 안다면,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가 가야 할 생존경쟁이라는 것을 안다면, 타협만으로는 살아낼 수 없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 거짓말한 적 한 번도 없어?

이 질문은 얼마나 우스운 질문인가? 어떻게 인생을 살면서 거짓말을 안 하겠는가? 우리가 천사인가? 우리는 현실의 도전에 완벽한 신앙으로 답을 할 수가 없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약속은 있는데 답은 안주어 지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의 몸부림과 원망은 우리가 지나가야 할 고비, 고비들이다. 그것들로 지혜가 생기고 힘이 생기고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것이다.

이것 없이 순진무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해 나오는 거짓말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면 간단한 일을 33년을 사신다. 인생을 살아내시고 제자들과 토론하시고 반대에 부딪치고 오해를 받고, 우리 손에 죽으시고, 를 모두 겪으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위대한 부활이 결실을 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시간이, 과정이, 탄식이, 몸부림이 있다.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만 여러분은 하루를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 이 고백이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반복되기를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과 힘 주심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현실들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우리를 깊고 높고 놀라운 자리로 인도할 것을 믿습니다. 주께서 마침내 승리하셨듯이 우리 인생도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중하게 여기고 하루를 하루만큼 살아내는 순종과 믿음과 은혜와 충성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왜 목사님께서는 설교 시간에 영화 얘기를 종종 하시는 걸까? 여기에 답을 할 수 있다면 남포교회의 성도인 집사님 (장로님)의 성적은 최소한 B+는 된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고, 우리의 삶에는 여러 상황이 있는데, 그것을 알기 쉽게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하신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인생을 보고 인간성을 살피고, 삶의 현장을 목격하신다, 이런 목사님의 안목이 잘 드러나는 것이 영화 대부Ⅰ편을 해설하실 때다. 대부는 갱 영화이고 악행이 화면에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런 폭력에 눈과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

목사님은 대부(마론 브란도) 와 자기 딸이 강간을 당해서 억울함을 풀려고 찾아온 장의사와의 대화에 주목한다.

“돈을 많이 낼 테니 원한을 갚아 달라고. 이봐 자네가 내 가족이 된다면 자네가 당한 일은 가족의 일이야. 그러니 자네와 내가 가족이 먼저 되어야지.”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한마디로 가르친다.

(2) 쇼생크 탈출이다. 주인공 엔디(팀 로빈스)는 교도소장과 교도관에 많은 돈이 남도록 회계 정리를 해준다. 그리고 그 댓가를 요구한다.

“내 동료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주세요. 그리고 그것을 지붕 수리할 때 지붕에서 마시게 해주세요.”

엔디가 쇼생크를 탈출한 뒤에도 남아 있는 많은 동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엔디가 이렇게 말했어.” “엔디는 이렇게 했지.“

(3) 목사님의 설교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

이런 시험문제가 나와도 나는 답을 쓸 수 있다.

”너의 인생은 뭐냐?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 네 인생에 하나님이 쉬지 않고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냐?“

시험문제에는 답을 쓸 수 있지만, 목사님의 질문에는 답을 못하고 매주 헤매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