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8) (왕상15:1~8)

2021. 10. 3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즘 초등3부에서는 로마서 필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학부모 교사들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교재를 나누어 주고 있다. 매우 좋은 기회라 나도 꼭 참여해서 로마서 열여섯 장을 모두 써 봐야겠다.

로마서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세어보니 15번 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필사는 처음이다.

(2) 로마서 강해 설교는 뭐니 해도 역시 박목사님의 설교다. 이때 설교를 따라가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도 은혜의 시간이었고 나중에 두꺼운 책으로 나왔을 때 다시 읽어보니 더 좋았다.

“내 목회 생활 중 그때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 그런데 그때 로마서 설교를 했잖아. 하나님의 이끄심은 정말 알 수 없는 거야.”

어느 때라고 설명은 하지 않겠다. 남포교회 새 신자만 아니라면 대충은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때 목사님께서는 내가 짐작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것 같다.

그 빛나는 로마서 강해 설교는 그런 고난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3) 로마서에는 너무나 귀한 성경 말씀과 은혜가 넘치는 구절이 있다.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면 여기다.

(롬7:18~25) 바울은 24절에서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난파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 두 가지 법이 있는데 자신이 항상 죄의 법에게 끌려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25절에서 바울은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8장 1절이 시작된다. 자신에게는 여전히 두 가지 법이 있고 자신은 죄에게 항상 지지만, 이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첫 번째 복음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라고 한다면, 두 번째 복음은 단연코 로마서 8장 1절이다.

2. 내 용

가. 서 론

(1) 오늘 열왕기에서 말하는 유다 왕 아비얌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왕인데. 그가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일 것이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특별한 족적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고, 그가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 2절에 그의 어머니 이름이 마아가라고 밝히는데 마아가는 압살롬의 딸이다. 본문에는 아비살롬 이라고 풀어서 쓰여있다.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부인이고 아비얌의 어머니였다.

아비얌은 잘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그의 아들 아사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가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당연히 마아가는 아사의 할머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할머니라고 기록하지 않고 어머니라고 기록했는데, 이스라엘 문화에서 윗분들은 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래 손들은 다 자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벤허는 훌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벤허의 성은 유다였고 이름은 벤허였는데 벤이 누구의 후손 전부라는 뜻이다. 훌을 허라고 기록한 것은 실제 발음과 문자 표현상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성경이 이 이야기를 계속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들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하11:18~23) 여기서는 아비얌이 아비야로 표기되고 있다. 르호보암은 자기의 정실부인인 마할랏보다 뒤에 결혼한 마아가를 더 사랑해서 마아가가 난 아들 아비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나아마였고 당연히 나아마는 솔로몬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의 정실부인은 애굽 왕 바로의 딸이었다. 나아마는 솔로몬의 처첩 중 한 명이었고 성경은 그녀를 암몬 사람이라고 두 번이나 기록한다.
암몬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녀가 아세라 신을 섬기던 암몬 출신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솔로몬 때에도 아세라 우상이 들어왔고 르호보암 때에도 아세라 우상이 들어왔다. 마아가도 아세라 우상과 친숙했던 것 같고 나아마 황후와 마아가 왕비와의 인척 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다.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았는데 이 아사가 나중에 할머니인 마아가를 폐위시킨다.

나. 본 론

(1) 이런 이야기들이 왜 필요한가? 열왕기는 남왕국 유다까지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 기록한 역사서이다. 왜 이런 역사서를 쓰게 되었는가? 그 배경은, 어쩌다 우리나라가 망했는가? 를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본토로 귀환한 뒤 감격 속에서 쓴 것이다. 열왕기에서는 비탄에 젖어 분노하면서 역사를 적고 있고 역대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약속했던 것을 이렇게 이루었다, 는 감격 속에서 썼기에 역대기에는 북왕국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윗의 가문과 왕가만을 정통 역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야를 기록할 때 열왕기에서는 그가 르호보암 같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고 기록하지만, 역대하는 달리 기록했다.

(대하13:4~9) 아비야는 여로보암과 싸우면서 에브라임 산 중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이스라엘 무리를 격렬하게 꾸짖는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이긴다. 여로보암은 22년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아비야가 왕이 된 것은 여로보암 재위 18년째였다. 아사는 여로보암 재위 20년째에 유다의 왕이 되었으니까 아비야는 왕이 된 후 2년 만에 죽은 것이다.

(대하13:19~22) 아비야는 북왕국 여로보암 18년째에 즉위했고 아사는 20년째 즉위했으니까 아비야는 만 2년 남짓 밖에는 왕위에 있지 못했는데 큰 전쟁을 치르고 점점 강해져서 아내 열넷을 거느리고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고는 죽어버린 것이다.

왕조 실록들이 그렇듯이 어떤 치부를 감추고, 후세에 남기는 것은 명분이 있는 것만 남기는데, 아비야는 별다른 표현이 없다. 그는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고 왕성하게 힘을 발휘했는데 일찍 죽는다.

아마도 국내외의 정치 세력 간의 갈등 속에 죽은 것 같다.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록들을 남기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역사적인 현실이 있다. 선민인 그들이 포로가 되고 성전이 파괴가 되고 왕들이 붙잡혀 가는 일이 왜 일어났는가? 그래서 분함과 비난 일색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팔고 남왕국 유다를 바벨론에 판 사실이 어떤 교훈을 주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이 기록을 왜 남겼는가? 이것이 독자들의 질문이 된다.

쉬운 이해는 이분법이다. 여호와를 따르면 성공하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면 망한다. 그러나 이 쉬운 이야기를, 북왕국은 200년, 남왕국은 350년 동안 반복해서 잘못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아비야가 왕이 될 때 르호보암은 이 아들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해서 28명의 아들 중 아비야를 택하고 나머지는 전국에 분산시켜서 탈이 없게 했다.

그러나 왕권을 둘러싼 정치 세력의 충돌이라는 것은 끝까지 귀추를 알 수 없다. 왕족이 있고 외척이 있고 친척들이 있는데 외척이 세력이 크다.

자식을 부인이 낳고, 왕비보다 처가 쪽이 자식에 대한 애착심이 친가 쪽보다 강하다. 그래서 각 세력 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하나님 인가, 우상인가 하는 이분법이 현실로 오면 이런 피할 수 없는 권력다툼으로 점철되는데 과연 이것이 무슨 교훈을 주는 것인가?

이스라엘은 이것을 자신들의 역사로 가짐으로써 이스라엘의 정신을 여기에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신을 담는다는 것은 아래의 뜻이다.

우리는 정신이라는 것이 완벽한 명분이며 초시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사를 보면, 모두가 항복할 만한 명분을 얻으려면, 길고 지난한 모순과 갈등과 실패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쉽게 하나님만이 최선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하다, 이렇게 답을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우상이 신이 아니라 수단과 변명에 불과했었다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2)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부딪치는 가장 큰 시험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진심을 드렸는데 왜 현실에서 보상을 받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헤매인다.

우리는 사실 하루가 바쁘다. 하루는 1주일보다 길고 1주일은 1년보다 길다. 눈 깜빡하면 70~80년이 후딱 지나간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실패한 것밖에는 없다. 잘한 것은 기억이 안 나고 잘못한 것만 기억이 난다.

이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갔는가? 여러분은 분명히 좌절도 겪었을 것이고 절망도 겪었을 것이고 분노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체념했을 것이다.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현실은 현실인 인생을 살았다.

내가 죄인이지, 내가 죄인이야.

지금은 다 돌아가신 신앙의 선배님들이 기도를 하든, 설교를 하든, 대화를 하든,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늘 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래야 진실하고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한 번의 진심이나 각오로 끝나지 않는다. 그 각오는 현실의 도전에 부딪친다. 여기 열왕기에서는 권력다툼이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한다.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냥 목숨을 바치면 되잖아.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이야기다. 선택의 여지가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사는 것이 첫 번째 책임이다.
비겁하게 타협하는 게 신앙이야?. 목숨을 바쳐야지.

그러나 사실은 죽는 것이 최고의 포기이다. 죽으면 더 이상 아무런 책임이 없어진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매일이 아슬아슬하다. 마치 어제가 없었던 것 같이, 인생을 어떤 뚜렷한 승리의 기억이나, 완벽한 해결책이 없는 채로 사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가장 큰 괴로움이다.

열왕기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350년 동안 그들이 어떤 현실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가는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350년이 지나갔어도 끝난 것이 아니고 그 뒤로도 몇백 년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70~80 인생은 한번 겪을만하지 않는가?

(3) 우리는 우리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현실과 타협했던 결과물이 별것 아니라는 걸 아는 데 평생이 걸린다.

성공, 승리, 만족, 무병장수, 부귀영화, 만사형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실력이 없어서 눈 질끈 감고 타협해 버린 모든 것들이 소용이 없다, 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선택은 하나다. 멋있어지는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척도가 하나 있다. 내가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지나간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지나간 시간이 자금의 나를 만든 것을 부인하고, 다시 돌아가면 나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난날의 실망과 좌절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구약이 필요 없어진다. 이스라엘 역사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왜 이 긴 시간에 걸쳐 씨름을 하시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권능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은 쌓인다. 아비야는 승승장구하고 마음껏 힘을 발휘하기 위해 열네 명의 아내를 얻었고 스물두 명의 아들과 열여섯 명의 딸을 낳았다.

그는 왕이 되기 전부터도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대하3:6~7) 그는 말한다. 아버지는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이런 말을 통해 그의 의욕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찍 죽었다. 하나님은 목적한 결과를 만들어 가고 계신다. 이걸 모른다면 우리는 회개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정답을 말하는 게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기의 현실을 해결할 때 성경에서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한다. 불행한 것이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게 전부는 아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 내게 주어진 도전 앞에서 나는 어떻게 갈등하며 어떻게 지난날의 교훈을 적용하는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다. 결 어

(1) 코로나가 오자 세상은 모든 책임을 교회에게 집어 던졌다. 교회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다른 기대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비난을 받자, 교회는 서로 비난했다. 그러나 교회끼리 비난할 일이 아니다. 각 신자가 실력과 수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된다. 교회가 신자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늘 불안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정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자랑이 될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사시기 바란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가 모여서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들고 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의 빛이고 생명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각각의 신자가 큰 지혜와 용기와 소망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10월에 초등3부 강한빛 전도사님은 성령의 9가지 열매(갈5:22)에 대해 설교를 하셨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우선 구도는 쉽다. (요15:4) 나무가지인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열매의 내용은 한 가지도 쉬운 게 없다. 내 경우는 오래 참음과 절제가 가장 어렵다. 참는다는 것은 견딘다는 것이고 절제는 할 수 있는 걸 자제한다는 뜻이다. 둘 다 너무 어렵다.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이 있는데 사람 좋고 컴퓨터도 잘한다. 문제는 산수(수학이 아니다.)가 약하다. 초등학교 때 학교를 잘 안 나가서 그럴까? 예를 들어 10%, 0.1, 1/10이 같은 개념이라는 걸 쉽게 이해 못 한다.

이번에 지급하는 상여금은 기본급의 30%만 지급하세요. 기본급이 100만 원이라면 지급하기 전에 세워보는 식은 당연히 100만 원x0.3=30만 원이다. 30%를 계산할 때 왜 0.3을 곱하는가가 이 직원에게는 큰 난관이다. 나에게도 난관이다.

처음에는 이걸 잘 못 참았다. 아니, 총무님 초등학교 산수책 보시고 연습을 하세요. 지금은 어느 정도 참는다. 그러나 아직도 오래 참지는 못한다.

(2) 초등3부 6학년 1반 우리 아이들에게도 상을 걸었다.

선생님과 줌으로 분반 공부할 때 성령의 열매 9가지를 다 외우면 상으로 5,000원권 문상(문화상품권) 줄게. 지난주에 한 명이 외웠다. 5,000원 문상 한 장 보내는 등기 우편료가 3,400원이다. 그래도 즐겁다.

나머지 5명도 외울 때마다 문상을 보낼 예정이다. 끝.